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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에서 오야붕(親分)은 '두목' 혹은 '친부모 같은 사람'을, 꼬붕(子分)은 '부하' 혹은 '친자식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필자 주>.
박정희 정권이 메이지 일본의 이상을 한국에 실현시키려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래서 박정희의 업적을 칭송하는 사람들 중에는 일제 식민통치에 대해 내심으로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박정희를 지지하면서, 그 박정희가 모방한 일본을 반대하는 것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메이지 일본과 박정희 정권의 수명 차이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868년에 성립한 메이지 일본은 군국주의 일본으로 발전하였으며, 1945년 패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역대 정권에 의해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그에 비해, 박정희 정권은 이보다 훨씬 짧은 18년 만에 붕괴하였으며, 박정희의 계승자들 역시 20년을 채우지 못하고 권력을 내주고 말았다.
그럼, 이 같은 차이는 왜 생긴 것일까? 둘 다 똑같이 군대를 동원하고 서양 강국의 지원에 의존했는데, 한쪽은 140년 가까이 계승되고 있는 데 비해 다른 한쪽은 얼마 못 가서 붕괴되고 만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같은 차이의 원인 중 한 가지를, 청년집단에 대한 국가적 통제력의 차별성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메이지 이후의 일본 역대 정권은 청년집단을 비교적 효과적으로 통제하여 국가통합에 성공한 데 비해, 박정희 정권은 특히 도시 청년집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국가통합은 고사하고 10·26의 총격전으로 스스로 붕괴하고 말았다.
메이지 이후의 일본 역대 정권이 청년 통제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일왕을 중심으로 한 고도의 중앙집권적 군국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은 지역분권적인 나라였다. 지방은 다이묘 등 봉건 영주의 권력 하에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중앙에 있는 일왕의 존재에 무감각한 상태였다.
이 같은 종래의 지역분권적 경향을 일소하기 위하여 메이지 정부가 고안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청년을 통한 국민통합정책이었다. 이는 각 지역에 있는 기존의 청년 조직을 국가적 통제 시스템에 편입시킴으로써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건설을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히라야마 가즈히코가 저술하고 일본 신센사(社)가 1978년에 도쿄에서 발행한 <청년집단사 연구서설> 하권에 의하면, 일본 정부는 메이지 38년인 1905년부터 지방 청년단체의 유용성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정부 차원에서 청년단을 육성하는 데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다이쇼 4년인 1915년 9월 15일 내무상·외무상이 청년단 활동과 관련하여 최초의 훈령 및 통첩을 발포한 이래로, 일본의 청년단체들은 근로봉공과 고도 국방국가 건설의 희생양으로 전락하였다. 이 같은 청년 조직들을 발판으로 일본 정부는 고도의 국가통합을 이룩하고 더 나아가서는 20세기 최대의 '대형사고'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
청년단을 기반으로 한 국가통합은 결국 동아시아나 세계에 대한 엄청난 죄악으로 이어졌지만, 일본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 같은 청년정책은 일본이라는 근대국가를 건설한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
이 같은 일본의 성공에 특히 주목한 자가 바로 박정희였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일본을 모방하여 지방에 청년회 조직을 육성하는 등의 청년정책 시행에 나서게 되었다. 예전에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새마을 청년회 같은 조직들은 실은 박정희가 명품(메이지 일본)을 모방하여 만들어낸 '짝퉁'이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메이지 일본의 방식을 똑같이 모방하여 근대국가를 건설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철권통치를 연장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흥미롭게도 박정희 정권은 역설적으로 청년집단 때문에 붕괴하고 말았다. 농촌의 청년집단에서는 특기할 만한 저항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도시의 청년집단은 노동자와 학생을 중심으로 박정희에게 위협적인 공격을 가했다.
한국의 도시 청년집단이 박정희 정권에게 얼마나 위협적이었는가 하는 점은, 박정희 정권이 고려대학교라는 하나의 학교를 상대로 긴급조치 제7호를 발포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60만 대군을 보유한 권력집단이 일개 대학교를 상대로 전쟁을 방불 하는 총력전을 벌였다는 사실은, 한국 청년집단의 대항이 박정희 정권에게 얼마나 큰 공포심을 주었는가를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뭐든지 하면 된다던 박정희는 결국 청년집단 앞에서 그 의지가 꺾이고 그 생명마저 끊기고 말았던 것이다. 선악을 안 가리고 뭐든지 하면 된다던 박정희는 결국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오야붕'인 군국주의 일본은 청년집단을 잘 다룬 덕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계승되고 있는 데 비해, 그 '꼬붕'인 박정희 정권은 청년집단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부모보다 먼저 죽은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오야붕은 청년으로 흥하고 꼬붕은 청년으로 망한 셈이다. 군국주의 일본과 박정희 정권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오야붕과 꼬붕만한 단어를 찾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 군국주의 일본이 청년집단을 잘 다룬 데 비해 박정희 정권은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청년 세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위치에 있는 중간 계층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포섭했는가 하는 문제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메이지 이후의 일본은 지주계층은 물론이고 학교장·촌장 등의 중간 계층을 포섭하는 데에 일정 정도 성공하였다. 이는 일본 정부가 이 계층에게 적절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박정희 정권과의 비교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지주계층은 정부 주도의 자본주의 경제정책 하에서 대체로 공업자본가 계층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박정희 정권은 중간 계층을 포섭하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핵심적인 실패 원인 중 한 가지는 박정희의 분배정책이 재벌 편향적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재벌 편향적 분배정책으로 인해 중간 계층을 안정적인 중산층으로 만드는 데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결국 이는 중간 계층으로부터 적들이 나오도록 만든 원인이 되고 말았다.
한국의 중간 계층이 박정희 정권 시절에 별다른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점은, 박정희 몰락 직후와 그 이후에 발생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항쟁 등으로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87년 6월 노태우의 6·29 항복선언을 도출해낸 핵심 동력은 거리로 뛰어나온 '넥타이 부대'였다. 권력에 대한 한국 중간계층의 불만이 폭발 단계에 이를 정도로 오랫동안 누적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위와 같이, 박정희 정권은 군국주의 일본과 비교할 때에 중산층 육성에 상대적으로 실패했으며, 이 때문에 가정과 사회에서 청년집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위치에 있는 중간 계층을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결국 이는 노동자·학생을 중심으로 한 청년집단이 박정희 타도에 나서게 된 주요 요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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