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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산에 머물고 있던 태조 이성계가 회암사(檜巖寺)로 행차했다. 이성계의 거동은 즉각 개경에 있는 태종 이방원에게 알려졌다. 이방원에게 태조 이성계의 움직임은 최대의 관심사항이었다. 개인적으로 부자지간의 효와 불효의 가늠자였고 태상왕으로 권력의 일부분이 태조 이성계 주변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회암사에 도착한 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중수하고 궁실을 짓는데 필요한 인부와 목재를 보내라 했다. 예상 밖의 요구였다. 이성계가 회암사로 거동한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주지스님으로 있는 무학대사를 잠시 만나러 가는 것으로 알았다. 헌데 궁실용 목재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 이방원은 왕실용 목재와 150여명의 인부를 보냈다. 이것도 잠시. 궁실을 지어 눌러 살겠다던 태조 이성계가 동북면으로 향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태조 이성계의 동북면 행은 태종 이방원의 예측과 빗나갔다. 좋은 목재를 무학대사에게 건네주고 되돌아오리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동북면은 아버지의 세력기반이 있는 곳이며 중앙 통제가 느슨한 곳이다. 더구나 최근 동북면에서 반란의 징후를 포착했다는 첩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터였다. 아버지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종잡을 수없는 아버지의 행적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안변에서 급보가 전해졌다. 안변부사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반란이라니?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의 동선과 일치한 안변에서의 반란이라면 묵과할 수 없었다. 조사의의 반란은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부자지간의 이간질로 받아들였다.

조사의는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으로 왕후의 후광으로 형조의랑이 되고 순군에 이르며 승승장구하던 인물이다. 강씨의 몰락과 함께 변방으로 내몰린 조사의는 태종 이방원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의 동북면 행차와 조사의의 반란이라? 확실한 정보는 없지만 함수관계가 있는 것만 같았다.

조사의는 이방원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친 태종 이방원은 임금이 아니라 국법을 어긴 범법자였다. 세자를 죽이고 임금을 끌어내린 이방원은 천하의 역적이었다. 세상이 성공한 쿠데타라 인정해도 자신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를 인정하는 백성들이 우매하게 보였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선비들이 역사의식 없는 비굴한 인간들이라 생각되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막내아들을 잃고 산천을 방황하는 태조 이성계가 동북면에 오는 이때가 절호의 찬스라 생각되었다. 아들을 미워하는 태조 이성계가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리라 믿고 싶었다. 허나, 간과한 것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이방원을 미워하는 것이 부자지간 애증이라면 조사의의 이방원에 대한 적개심은 정치적인 대립이었다. 정치는 세(勢)싸움이다. 세가 약하면 지게 마련이다. 반짝이던 이슬이 태양이 떠오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과 흡사하다.

태조 이성계의 행차와 거의 동시에 봉기한 반란군

뭔가 있을 것 같은 경계심을 풀지 않은 태종 이방원은 상호군(上護軍) 박순을 동북면에 급파했다. 동북면에 파견된 박순은 도순문사(都巡問使) 박만과 고을 수령들에게 '조사의를 따르지 말고 뇌화부동 하지 말라'는 왕명을 전하다 함주에서 반란군에게 피살되었다. 조정에서 보낸 관군 장수를 살해 했으니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박순의 피살 소식과 태조 이성계의 거가(車駕)가 철령을 넘었다는 소식이 동시에 개경에 전해졌다. 밤새 말을 달려 온 회양부사(淮陽府使) 김정준의 보고를 받은 태종 이방원은 아연실색했다. 조사의의 반란과 아버지의 움직임은 뭔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만 같았다. 조사의의 반란을 과소평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뭔가 있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우선 아버지와 조사의를 떼어놓기로 했다. 무학대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동북면을 찾아가 아버지의 거가를 돌려줄 것을 부탁했다. 태조 이성계가 존경하던 왕사 무학대사라면 능히 그 일을 해내리라 믿었다. 무학대사를 동북면으로 보낸 이방원은 전열을 정비했다.

좌군총제(左軍摠制) 이귀철을 동북면 도체찰사로 삼고 대호군(大護軍) 한흥보를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삼아 지역 군사력을 보강했다. 그런데 아버지를 찾아간 무학대사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고 불길한 전황이 날아들었다. 호군(護軍) 김옥겸이 조사의에게 포로로 잡혔고 호군(護軍) 송유가 반란군에게 피살되었다는 것이었다.

최정예 부대를 투입하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태종 이방원은 안평부원군(安平府院君) 이서와 중 익륜 그리고 설오를 태조 이성계의 행재소에 보냈다. 반란군이 날뛰는 위험지역에 있지 말고 빨리 개경으로 돌아오기를 극력 요청하는 한편 조영무를 동북면, 강원, 충청, 경상, 전라도 도통사(都統使)로 임명했다. 외국과의 전쟁에 버금가는 전시체제다.

이빈을 서북면 도절제사, 이천우를 안주도 도절제사, 김영렬을 동북면과 강원도 도안무사, 유양을 풍해도 도절제사로 삼아 후방 방비를 견고히 한 태종 이방원은 민무질과 신극례에게 군사를 주어 동북면으로 출동하라 명했다. 최측근 정예부대의 투입이다.

민무질과 신극례는 1차, 2차 왕자의 난 때 혁혁한 무공을 세운 측근중의 측근이다. 태종 이방원의 측근부대 투입은 기필코 반란군을 소탕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아버지를 매개로 한 반란은 용서할 수 없었다.

측근 정예부대를 투입한 태종 이방원은 직접 병조(兵曹)에 나가 진두지휘했다. 그 모습은 광화문 앞에 천막을 치고 혁명군을 지휘하던 모습과 흡사했다. 그러나 반란군과 조우한 조정군에서 날아온 소식은 우울한 것이었다. 맹주(孟州)에 진입한 역전의 용사 이천우가 조사의에게 포위당하여 100여명의 장졸을 잃고 아들 이밀의 기지로 겨우 포위망을 탈출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분노한 태종 이방원은 여흥부원군 민제를 수성도통사(守城都統使)로 삼아 개경을 맡겨두고 권화를 도진무(都鎭撫) 삼아 직접 출정했다. 반란군을 꼭 제압하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각오다.

오랜만에 입어본 갑옷이었다. 백마에 올라 탄 이방원의 눈초리는 분노로 이글거렸고 꼭 분쇄하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불타올랐다. 개경을 출발한 태종 이방원이 금교역에 머무르고 있을 때, 아버지의 거가를 돌리기 위하여 파견한 이서와 중 설오가 치열한 전투 때문에 철령이 막혀 돌아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한 가닥 희망마저 절망이었다. 북교까지 호종한 민제, 성석린, 우인렬, 최유경 등에게 개경을 잘 지키라 명하고 동북면을 향하여 진군했다.

반란군을 분쇄하라

태종 이방원이 원중포(元中浦)에 도착했다. 뒤 따르던 조영무, 김영렬, 신극례가 군사를 이끌고 철령(鐵嶺)으로 향하는 모습을 환송했다. 임금이 여기까지 선두에 선 것은 지휘관들에게 임금의 의지를 심어주고 장졸들에게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서였다.

한편, 조사의 군대는 7천여 명 정도였는데 올량합(兀良哈)이 오면 만여 명이 될 것이라는 소리에 사기가 올라갔고 태조 이성계가 철령을 넘었다는 소문에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했다. 조사의 부대에서 들불처럼 번진 올량합은 낭설만도 아니었다.

동북면의 지리적 여건상 올량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우수리강 지류인 무링허 유역에서 살아온 올량합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들며 살아왔다. 추장아래 수십 호가 뭉쳐 살던 올량합은 물자교역과 군사동원에서 동북면 무장들과 빈번한 교류가 있었다. 어쩌면 중앙행정기구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동북면은 이들과의 교류로 독자적인 세력을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북면에서 세력을 구축하여 중앙에 진출한 이성계다.

조사의 부대가 조정군을 연파하며 파죽지세로 안주(安州)에 진출했다. 살수(薩水)를 건너려다 얼음이 깨져 수백 명을 잃고 강 언덕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괴소문이 진중에 퍼졌다. 뜬소문만도 아니었다.

"조영무 장군이 동북면으로 향했고 이천우, 이빈, 김영렬, 최운해 장군이 맹주(孟州)를 가로 막았다. 또 황주와 봉주에 4만여 명의 군사가 진을 치고 있다."

조사의 군대가 포위당했다는 소문이었다. 조사의를 따르던 장수들의 얼굴색이 변하고 군졸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군졸이 장수를 죽이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칼을 뽑아들고 막아서는 장수를 군졸들이 살해하고 도망하기 시작하자 진중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이다. 장졸들을 통제하지 못한 조사의 군대는 스스로 궤멸되고 말았다.

조사의 반란군, 태조 이성계와 묵계가 있었을까?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조사의는 50여 기(騎)를 거느리고 반란의 본거지 안변으로 후퇴했다. 흐트러진 전열을 정비하기 위하여 안변에 들어간 조사의는 도안무사(都按撫使) 김영렬에게 생포되고 말았다. 조사의의 생포와 거의 동시에 태조 이성계의 거가는 안변을 빠져나와 평양으로 향했다.

아들 조홍과 함께 개경으로 압송된 조사의는 순군옥에 하옥되었다. 조사의는 국문 없이 하옥된 이튿날 아들과 함께 주살되었다. 여타의 반란사건에 비하면 이례적인 종결이다.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지는 형문을 가하여 연루자를 캐내는 것이 역모사건의 처리 과정인데 주모자를 신속하게 처형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태조 이성계의 거가가 철령을 넘은 것과 때를 같이하여 조사의가 봉기했다. 조사의가 살수에서 패퇴할 때 태조 이성계는 안변을 빠져나왔다. 조사의 부자의 처형 후 태조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왔다. 우연의 일치라 하기에는 의도적인 구석이 있다.

조사의와 이성계 사이에 교감이 있었는지? 교감은 없었지만 태종 이방원에게 반기를 든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이라 기대했는지? 아무런 묵계도 없었는데 조사의가 이성계의 행차를 선동의 도구로 악용했는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다.

#조사의#회암사#동북면#철령#도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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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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