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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교육부가 선보인 전경련 경제교과서 표지.
올해 2월 교육부가 선보인 전경련 경제교과서 표지. ⓒ 교육부
우리는 지금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다. 학교를 무대로 한 이 영화의 제목은 '경제교과서 퍼주기'다.

감독 재벌, 주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홍보기획 보수신문. 전경련과 손을 잡고 주연으로 나섰던 교육부는 무대에서 뛰어내렸다. 교육의 중립성을 수호해야 할 정부가 '재벌과 춤을' 춘 데 대한 비판을 의식한 탓이다.

희한한 영화 '경제교과서 퍼주기'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감독과 주연을 맡은 재벌과 이들의 이익단체 전경련은 지난 25일 돌연 이 영화를 공짜 배급하기로 결정했다. 그 규모도 교육부가 학교에 보내기로 발표한 것보다 10배나 많은 2만부라고 한다. 돈 많은 단체이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영화 제목대로 '교과서 퍼주기'가 시작된 것이다. "일선 고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의 배포 요청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전경련이 내세운 이유다. 학생과 교사에게 전경련의 작품(교과서)이 대량 살포되는 사상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부의 개입은 개인과 사회 전체에 손해를 초래한다'는 이상한 글귀와 함께 노동조합에 대한 비방,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 과정에 대한 찬양을 담은 내용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학교를 잠식하게 됐다.

이제 올 해 2월부터 4개월을 끌어온 이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다. 파국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해피 엔딩이 될 것인가.

'교과서 배급' 홍보 나선 보수언론들

배급을 위한 홍보기획은 보수언론이 맡았다. 내용에 대한 선전을 곁들인 기사에서 신청 전자메일을 적어주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전경련이 '차세대 경제 교과서'를 직접 보급하겠다고 발표하자, 책을 보내 달라는 신청이 빗발치고 있다. …책이 담고 있는 시장주의적 방향도 중요하지만, 책 자체가 기본 내용, 참고서, 교사용 지침서를 함께 담고 있는 방식이라서 보기가 편하다는 것이다. …전경련은 '전화 문의가 너무 많아 경제 교과서 신청 전용 이메일(j@fki.or.kr)로 신청을 받기로 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6일치 A12면 기사)

<조선일보> 26일 A12면.
<조선일보> 26일 A12면. ⓒ 조선PDF

"지금까지 2000부가 배포됐고, 신청 물량만 5000부가 넘는다고 한다. 시장경제 원리에 충실한 경제교육 자료를 찾는 교사와 학생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지금은 시장경제 원리를 모르고서는 정부의 정책이건 개인의 재테크건 성공할 수 없는 세상이다. …교육부는 차제에 경제교육에서 손을 떼고 전경련의 노력을 방해하지 말기 바란다."(중앙일보 25일치 사설 '전경련이 떠안은 시장 경제교육')


'공짜'이면서도 '재테크 성공'까지 보장한다는 사탕발림에 신청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이다. 29일 현재 전경련 홈페이지 '의견을 듣습니다' 게시판을 채우고 있는 것은 책 주문 신청서다.

"병사교육 위해 책 신청합니다"

"고등학교 경제 교육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현재 중학교에 근무하더라도 이번에 발간된 '차세대 고등학교 경제 교과서' 부탁드립니다. ○○중학교 교사"

"늘 구독하는 신문을 보면서 이렇게 유익한 책을 무료로 배부한다는 것에 대해 놀라며 책을 신청합니다."

"차세대 경제 교과서에 대한 내용을 신문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병사 교육을 위한 참고교재로 활용코자 책자를 신청을 합니다. ○○예비군동대"


무대에서 끌려내려오다시피 한 교육부는 엉거주춤한 자세다. 남의 일인양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다.

28일, 전경련 교과서 배포 책임을 맡은 교육부 국장은 "전경련 교과서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했고, 초중등교육을 책임진 또 다른 국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교육부 한 관계자는 "전경련 교과서를 교사들이 참고자료로 쓰는 것은 전교조 자료를 써도 되는 것처럼 가능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교조가 참고자료로 활용하겠다면서 5·18 광주민중항쟁과 한미자유무역협정(FTA) 공동수업자료를 발표했을 때, 사실상 금지 조처한 것과는 상반된 태도다.

전경련 사이트에 떠 있는 교과서 신청 팝업창.
전경련 사이트에 떠 있는 교과서 신청 팝업창.
전경련 교과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민주노총과 전교조도 먼 발치서 목소리만 높이고 있는 형국이다.

전교조는 이날 성명에서 "민주복지 국가 추구라는 대의를 거부하고 재벌의 이익만을 앞세운 편향된 전경련 책자가 교육용 도서라는 꼬리표를 달고 학교에 배포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교육과 무관한 전경련은 교육에 대하여 더 이상 관여치 말라"고 요구했다.

이 단체는 또 교육부에 대해서는 "전경련의 재력을 내세운 비교육적 배포에 대해 수령 거부 등의 지침을 즉시 일선 교육기관에 통보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현재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공짜 배포'라는 전경련의 초강수 공격에 대항할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속수무책인 셈이다. 전교조 한 관계자는 "지금으로선 교육부가 나서지 않으면 막을 방법이 없다"고 털어놨다.

재벌이익 옹호단체가 교육을 돈으로...

하지만 교육부가 쉽사리 나설 것 같지는 않다. 지난 해 2월 15일 전경련과 교과서 공동발간 등 양해각서(MOU)를 맺을 당시 책임자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김진표 교육부장관의 지시를 받고 진행 책임을 맡은 K국장은 그대로다. 전경련 상무와 함께 실무 지원팀장을 맡았던 L국장은 실장으로 한 단계 승진한 상태다.

지금 대한민국은 재벌 이익 옹호단체가 학교 교육을 돈으로 사고 있다. 교육부는 심부름꾼으로 나섰다가 발을 뺐을 뿐, 뒷짐만 지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무능정권이란 얘기가 나오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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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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