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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신록의 계절', '계절의 여왕'으로 내게 다가온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5월은 당연히 투쟁의 계절이었고 꽃가루보다는 최루탄 연기 속에 있었다. 그 세월이 강산을 두 번 변하게 했다.

어느덧 나도 흰머리가 드문드문 보여도 어색하지 않은 세 딸의 아비가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도, 나와 같은 동년배들에게도, 광주 항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6월 시민대항쟁 정신은 지금까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가치관으로 유효하다.

백기완 선생 강연회, 그리고 첫 '가투'

85년 12월 초였던 것 같다. 안동문화회관에서 백기완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백기완 선생이 누군지도 모른 채 선배의 손에 이끌려 강연회에 갔다. 강연은 대학 1학년인 내게 충격이고 두려움이었다. 서늘한 입담, 돌리지 않고 직선적으로 내뱉는 학살자 전두환에 대한 통렬한 비판. 밖에 있는 전경들이 곧 들이닥쳐 잡아갈 것 같은 긴장감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본지 모른다.

강연이 끝나고 밖에 나오니 날은 어두운데 몇몇이 스크럼을 짜고 노래를 부른다. 선배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난 스크럼 뒤쪽에 섰다.

"광주학살 전두환은 물러가라"

누군지 모를 선창에 구호를 따라 외쳤다. 대열이 시내를 향한다. 가슴이 쿵쿵거리고 식은땀이 흐른다. 여자 선배와 어깨를 걸고 있는데 무섭다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 때까지 데모는 서울같이 큰 도시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 당시 내게 데모는 '빨갱이=집안 망치는 일'로 은연중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맘모스 제과 앞에서 전경이 막아섰다. 해산을 강요하는 선무방송이 나온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앞에서 비명소리와 둔탁한 곤봉소리가 들렸다. 곧 이어 "뛰어" 하는 고함소리에 뒤돌아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곧 잡힐 것 같은 찰나 전경 두 명이 뒤에서 넘어졌다. 하수구 공사 구덩이에 빠져 넘어진 것이다. 잡히지 않았다.

받은 유인물을 다 버리고 버스를 타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선배와 동료들도 무사히 와 있었다. 밤늦게까지 선배·동료들과 막걸리를 마셨다. 내가 겪은 첫 가투(가두투쟁)였다.

'피'라고 불린 유인물, '가피' '호피'의 기억

▲ 등사지에 끌필로 써서 '등사'한 민중가요 노랫말
ⓒ 안호덕
학교 직원뿐만 아니라 사복형사들이 동아리 방을 수시로 밀고 들어오기 때문에 학교에서 유인물을 제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다. 불법(?) 유인물을 찍어 줄 인쇄소는 더더욱 없었다.

주로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마리스타 학생회관 지하 골방을 이용했다. 끌필로 긁고 등사기로 밀어 유인물을 만들었다. 내용은 선배가 만들고, 제작과 운반은 그 때까지 학교나 경찰에 얼굴이 노출되지 않는 우리들이 맡았다.

2인1조가 돼 한 사람은 종이를 넘기고 또 한 사람은 등사기로 밀어 500장, 1000장을 찍었다. 등사를 마치고 나면 손에 검은 등사 기름이 묻어 화장실에서 비누로 빡빡 씻어야 흔적을 지울 수 있었다. 우리는 기름 냄새 진동하는 유인물을 두 뭉치로 나눠 비닐에 몇 번이나 꽁꽁 싸서 학교와 유인물을 나눌 모처로 운반했다.

지금 같으면 웃고 넘길 일이지만 당시에는 유인물 한 장 돌리는 것도 각오를 요구했다. 학내에서도 별 반 다르지 않았다. 3층 빈 강의실이나 구름다리 위에서 100여 장을 한꺼번에 쥐고 밑으로 던져 뿌리고 나면 득달 같이 사복형사들이 계단으로 뛰어 올라왔다.

유인물을 잘못 뿌리면 유인물이 뭉텅이로 떨어져 학생들이 줍기도 전에 형사들이나 학교 직원들 손에 들어가기 때문에 최대한 멀리 흩어뿌릴 수 있는 방법을 선배들에게 전수받기도 했다.

'유인물은 부채꼴로 감아 공중으로 높이 던질 것.'

그렇게 던져져 흩날려 떨어지는 유인물을 기다렸다는 듯이 주어서 가방에 넣고 촘촘히 사라지는 학우들을 보면서 서로 눈빛으로 성공을 주고 받았다.

반대로 뭉텅이로 떨어져 사복형사들이나 교직원들에게 빼앗기고 나면 선배나 동료들에게 농담 어린 비판을 받아야 했다. 유인물을 빈 강의실 책상에 한장 한장 올려놓고 나오는 방법도 효과 만점이었다. 다만 수업받을 학생들이 들어오기 전에 끝내야 하고 들어온 문은 잠그고 나갈 문을 미리 봐두어야 했다.

그래도 학교에서 뿌리는 유인물 작업은 쉬운 편이었다. 시민들에게 베포하는 일은 매우 위험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당시 유인물을 '피'라고 했다. 집집마다 신문 돌리듯이 돌리는 것을 호(戶)피, 시내에 뿌리는 것은 가(街)피라 했다.

호피는 밤늦게 2인 1조로 뿌렸다. 우편함에 넣거나 마당에 던져 놓고 오는 것인데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K의원집 근처는 안동에서 부촌이고 개가 많아 아주 싫어하는 동네였다. 또 그 동네는 신고정신이 투철한 주민(?)들이 많아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경찰이 골목을 뛰어 올라오기도 했다.

더러는 버스를 이용해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내릴 때 쯤 버스 천장 환기구를 열고 거기에 유인물 뭉텅이를 끼워 넣고 내리면 버스 출발과 동시에 유인물이 흩날려 뿌려진 것이다.

빈 강의실에서 호헌 철폐에 서명하다

▲ 민통련의 '민중의 소리'는 당시 운동 진영의 좌표였고 올바른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매체였다. 발행겸 편집인에 문익환 목사님의 이름이 보인다.
ⓒ 안호덕
86년 권력 찬탈과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의 임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7년 단임제를 입버릇처럼 내뱉은 전두환은 다시 할 수 없는 대통령직을 쿠데타의 동지이자 오랜 동료인 노태우에게 체육관 선거로 이양하며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려고 했다.

국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폭정 7년을 끝내고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뽑자는 논의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헌법을 고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제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

그러나 직접선거로 야당에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전두환은 '헌법 수호'라는 명분으로 7년 단임, 체육관 선거를 고집했다. 개헌 논의는 허용하지 않았으며 개헌에 관련한 일체의 행동을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탄압했다.

당시 어딘지 서명 발의 주체도 명시되지 않은 서명 용지가 학교에 돌았다. 공개된 장소에서 서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는 사람, 믿을 만한 사람들을 통해서 극비리에 서명을 받았다. 어느 날인가 선배가 빈 강의실로 나를 불렀다. 예상했던 서명용지였다.

이 서명 용지가 경찰 손에 들어가 잡혀갈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얼마나 떨리던지…. 누군가 불쑥 잡아 세우고 가방을 뒤질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래도 선배들이 했듯이 화장실에서 서명용지를 내밀면 대부분 심각해 하면서도 서명은 해주었다.

강제 징집, 그리고 끝없는 죽음들

남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라면 녹화 사업이라고 불리는 강제 징집이었다. 학교와 지역 경찰과 연계된 녹화 사업은 '나도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군대에 잡혀갈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누구 누구는 요시찰 대상'이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소문으로 돌아다니면 나도 혹시 그 명단에 있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또 하나의 두려움은 죽음이었다. 극심한 언론의 통제로 그 내용을 세세히 알 길은 없었으나 멀리서 소문처럼 들리는 죽음들은 참혹하고, 무서웠다.

86년 학기 초부터 전방입소를 거부하며 분신한 김세진·이재호 열사에 이어 5월에는 이동수 열사가 분신했다. 그밖에 농민들이 농약을 마시고 죽어가면서 항거하고 택시 노동자가 분신하고, 군대에 끌려간 누군가가 의문의 죽음을 맞기도 했다. 정권은 이럴 때마다 사건을 은폐하며 시신을 빼앗고 장례식마저 가로막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87년 박종철 열사의 타살도 이런 죽음의 하나였다. 당시 2학년인 나는 '또 한 명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는 '잡히면 저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나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6월 항쟁의 뇌관이 될 것은 예측하지 못했다.

대항쟁을 만들기 위한 준비

▲ 전두환 정권 하에서 정권에 의한 타살과 이에 항거하는 분신 등이 연일 끊이지 않았다.
ⓒ 안호덕
87년 새 학기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개헌의 정당성을 알려내는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학교에서는 유인물은 물론 대자보도 못 붙이게 했다. 학칙에 근거해 학생과에 검열 도장을 받아 붙이라는 것인데, 개헌의 정당성을 알리는 대자보를 붙이게 하는 학교는 어디에도 없었다. 붙이고 떼고 다시 붙이는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총학생회 홍보부 차장이었던 나는 홍보부장 누나의 강압(?)에 게시판 앞에서 대자보를 지키느라 수업 빼먹기를 밥먹듯 했다. 같은 대자보를 여러 장 써서 싸우면서 뜯기는 시간을 최대한 벌고 나중에 또 붙이는 게 홍보부장 누나의 하루 일과였다.

4·13 호헌 조치는 일체의 개헌 논의를 불법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군부 독재를 끝장내고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서울에서는 연일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대학마다 교문에서 싸움이 일상화 되었다. 서울의 명동성당은 투쟁의 거점이 되었다. 성당은 폭압적인 진압에서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소였다.

지방 도시 안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내에서 시작된 기습 시위(동을 뜬다고 했다)는 오래가지 못했다. 곧 몰려든 전경들에게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며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다 끝내는 목성동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전경들도 성당 안으로는 치고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성당 정문을 사이에 두고 전선이 그어졌다.

정문 안에서 구호를 외치면 길 건너 전경들은 여지없이 사과탄(사과 모양처럼 생긴 최루탄)을 쏘았다. 비탈진 언덕을 뛰어 올라갔다가 또 내려오고 돌멩이가 오가고 그렇게 87년 6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성난 민중의 물결, 안동 시내를 가득 메우다

▲ 6월 항쟁 이후 전국단위 조직들이 건설되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안동시 결성 선언문. 며칠 전에 작고하신 <몽실언니>의 작가 권정생 선생님이 이름이 보인다. 선생님은 작가이기 전에 지역 운동의 큰 어른이셨다.
ⓒ 안호덕
87년 6월 10일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날이다. 집회 준비랄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결의였고 각오였다. 며칠 전부터 6월 10일 전국 규모 동시다발 집회 준비가 있었다.

12시 조흥은행 사거리 앞.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내리니 군데군데 전경들이 쫙 깔려 있고 시내가 온통 웅성웅성한다. 누가 봐도 곧 금방이라도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집회에서 나와 친구가 맡은 일은 총학생회장 선배가 동을 뜨면 플래카드를 펴서 길을 막는 일이었다. 사거리가 내려다보이는 다방에 자리했다. 곧 벌어질 일에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서로 말없이 커피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는데 선배가 눈짓으로 내려가잔다. 밑에는 벌써 삼삼오오 학생들이 모여있다. 긴장하는 눈빛들이 역력하다. 중간 중간 사복들도 있는 것 같다.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면서 초조하게 낮12시를 기다렸다. 11시 55분, 56분, 57분, 58분…. 가슴이 방망이질한다. 12시! '엥~' 학생회장 선배가 메가폰 사이렌을 켜며 사거리로 뛰어들었다.

"시민 여러분, 호헌 철폐, 직선제로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선배가 고립된다. 옷 안에 감추었던 플래카드를 펼치고 길 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그 사이로 택시가 빵빵 소리를 내며 휙 지나간다.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 플래카드 뒤로 삼삼오오 모여 있던 학우들이 모여들어 금세 200여명이 된 듯 했다. 일단은 성공. 애국가를 부르며 시외버스 터미널 쪽으로 행진하는데 대열이 급속히 늘어난다. 유인물이 뿌려졌다. 시민들도 호응이 좋았다.

시내버스 터미널 부근에서 농민들 대열과 합류하니 숫자가 배로 늘어난다. 학생, 농민, 야당 등이 주최한 집회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버스터미널에서 경찰서 쪽으로 큰 길을 막고 이동하는데 대열은 끝없이 늘어나고 더러 차량 경적도 울렸다. 태극기 행렬, '호헌철폐, 독재 타도' 구호가 메아리쳐 들렸다. 보수의 땅이라는 안동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독재 타도를 외치며 길거리에 나선 것이다.

보수의 땅 안동에서 '독재 타도' 울려퍼지다

전경들과 맞닥뜨린 곳은 성소병원 앞. 최루탄이 터지고 군홧발 소리가 밀려들었다. 뒤로 밀려도 계속 밀어 붙였다. 골목으로 밀렸다. 앞 선 사람이 담을 넘고 있었다. 담을 넘으니 전경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막걸리 양조장인 것 같았다.

"지금 나가면 다 잡혀, 여기 있어."

50대가 다 된 분인 것 같았다. 거기 모인 사람이 스무여 명이 되는 것 같았다.

농민 아저씨에 촌스러운 넥타이를 맨 양복 입은 아저씨도 있었고, 아줌마도 있었다. 안동에서 어깨를 스치며 지나간 사람들이 다 나선 듯 했다. 눈 비비고 담배도 나눠 피우고 막걸리도 한 잔 얻어먹고 전두환 욕도 하다가 나오니 전경들도 시위대도 없었다.

일단 목성동 성당을 지나 시내에 들어오니 난리가 났다. 시위대와 전경들이 엉켜 누가 누구를 막고 잡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대열을 지어 구호를 외치고 가다보니 앞선 전경들은 그 앞 시위대를 따라 가고 있었다. 경찰도 시위대를 통제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몇 천 명일지 모를 사람들이 '독재타도'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를 외치며 몇 시간을 온 시내를 몰려 다녔다.

문화회관 근처에서 잡혀 경찰서 수사과로 끌려 들어갔다. 들어가니 수사과가 만원이다. 잡혀온 사람들이 150여 명은 넘는 것 같았다. 나이 많으신 분들이 형사들 자리를 차고 앉아 있고 한쪽에서는 "죄도 없는데 왜 잡아 오냐"고 난리고, 또 한쪽에서 "밥 달라"고 난리였다.

형사들이 죄인처럼 한쪽 구석에 몰려 서서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풀어 줄 거라고 조용히 달라고 간청을 했다. 밖에서는 구호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을 석방하라"는 고함소리와 노래소리에 전경들은 문 앞에서 최소한 방어만 하고 있을 뿐이다.

밤 9시쯤 다 풀려났다. 경찰서 담벼락에 올라서고 문설주에 올라서서 애국가를 불렀다. 안동에서 일어난 6·10 항쟁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 6월 항쟁 이후에도 대규모 시위와 집회가 이어졌다.
ⓒ 안호덕
6·10 항쟁이 곧바로 승리를 안겨주지는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더 거센 탄압을 가해왔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6월 10일 이후 몇 차례 시내 집회와 학내 선전전 등이 있었다. 노태우는 29일 민정당 후보로서 직선제로 개헌할 것을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에게 요구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겼다. 권력이 국민의 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언론은 국민의 승리라고 치켜세웠다. 6·29 선언으로 군부독재를 끝내고 새로운 대통령,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모든 것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산업현장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한번도 해본 적 없는 파업이 공장마다 줄을 이었다. 학생회가 활성화되고 학생운동이 조직화 되어갔다.

뭉치고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진리를 사람들은 체험했다. 전국 조직이 생겨나고 전선이 급속히 정비되어 갔다. 모두가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풀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김대중과 김영삼 야당 후보가 양보 없는 싸움에 들어간 것이다. 후보 단일화를 위해 양쪽 야당당사에 농성도 들어가고 단식을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직선제는 쟁취했으나 권력은 또다시 민정당 후보 노태우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잊혀지지도 않는 87년 12월 17일 대통령 선거일. 낙담과 절망. 12월 24일 군대 영장이 나왔다. 술에 취한 선배는 팔을 부러뜨려 군대에 못 가게 하겠다고 했다. 당시 군에 간다는 것은 변절이고 운동의 끝이었다. 그러나 끝내 논산 훈련소를 향해 기차에 몸을 실었다. 운동이고 뭐고 다 끝이라고는 생각을 하면서.

6월 항쟁은 나의 가치기준이다

▲ 각 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는 이후 전대협으로 발전한다.
ⓒ 안호덕
20년이 지났다. 대학 3학년 겁 많고 소심하던, 미덥지 않던 운동권 학생이 이제 세 아이의 아비가 되었다. 6월 항쟁으로 국가 권력은 국민들에게 되돌아 왔고 노동자, 농민들은 자기가 삶의 주인임을 각성하게 되었다. 국민들은 뭉치면 이길 수 있다는 것, 권력은 국민들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투쟁을 통해 확인했다. 군부독재가 물러가고 야당에서 대통령도 나왔다. 20년 동안 많이도 변했다.

나는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 민중의 역동성을 믿는다. 87년 6월 항쟁에서 그것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운동은 끝났다고 한다. 노동조합이고 전선이고 신자유화 물결에 다 부서질 거라고 한다. 몇 년 사이 드러난 진보 진영의 성적표는 참혹하다. 민정당에서 이름만 바꾼 그 세력들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갈수기라도 강이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87년 6월 항쟁을 만들어 냈던 진보의 역사는 강바닥 저 아래로 지금도 흘러간다고 나는 믿는다.

6월 항쟁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민중의 것이다. 6월 항쟁의 정신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기준이며 민중의 한사람인 나의 가치기준이기도 하다. 또다시 자주와 통일을 향해 용솟음치는 물결이 형성된다면 나는 아이들 손을 잡고 기쁘게 달려갈 것이다. 미완의 6월 대항쟁을 위해서.

#6·10#안동#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6·29#호헌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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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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