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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는 것은 다 주어라, 막 퍼주어라
잔치외교와 기생외교가 개막된 이래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사신은 싱글벙글했다. 최상의 대우와 어여쁜 미인을 안겨주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하륜이 건의하여 실행하기 시작한 대명외교 전략은 입국하는 사신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달라는 것은 퍼주되 국토를 보존하고 민족의 자존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때맞춰 병조에서 통계보고가 올라왔다. 조선의 총 군사 수가 29만6310명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정예 장졸 이외에 지방 관아에서 관리하는 군졸까지 포함된 숫자였다. 명나라의 심기를 건드려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하륜의 소신에 설득력을 뒷받침해두는 통계였다. 하륜은 평소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명나라와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역이라는 이름으로 말(馬) 1만 마리를 보내라 하는 것도 보내주었고 소 1만 마리를 보내라 하는 것도 10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 당시 말은 전략적 군수물자였고 소는 대표적인 생산 산업 농사의 기둥이었다. 명나라의 요구가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농업을 마비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내주었다.
'달라는 것은 주되 국토는 지키자'는 것이 대명 외교 전략이었다. 이러한 전략을 조심스럽게 구사하고 있는데 명나라에서 얄궂은 첨보가 들어왔다. 조선을 확실하게 묶어두기 위하여 통혼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즉 조선의 왕실과 혼인하기 위하여 공주를 차출하려 한다는 것이다.
명나라는 극복의 대상이다
태종 이방원은 다른 것은 다 주어도 이 문제만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극복의 대상인데 딸을 보내거나 받으면 영원한 사위국이 아닌가? 고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이에 깜짝 놀란 태종 이방원은 경정궁주를 조준의 아들 조대림에게 하가 시키고 아직 나이 어린 경안궁주마저 권근의 아들 권규에게 출가시켰다.
태종 이방원에게 있어서 명나라 황실과 통혼은 가문 이상의 혼인으로 받아들여졌다. 명나라 황실과 혼인하면 한민족(韓民族)의 피와 한민족(漢民族)의 피가 섞이지 않은가? 피가 섞이면 현실에 순응해야 하지 않은가? 피가 섞이고 어떻게 요동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이방원의 뇌리에는 두 차례 사신 길에 목격한 요동의 고구려 유적과 유민들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두 딸을 서둘러 혼인시킨 태종 이방원에게 불길한 정보가 날아들었다. 명나라가 여진족을 직할 체재로 다스리겠다는 정책이었다. 그동안 여진족은 조선에 조공했고 그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국경을 넘나들며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조선은 묵인해주었다.
그런데 명나라가 여진족을 직접 통치하겠다면 문제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국토와 연결된 중요한 문제였다. 이것은 철령위(鐵嶺衛)의 또 다른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한민족을 한반도에 묶어두려는 대륙세(勢)와 대륙으로 뻗어나가려는 한민족이 부딪치는 분기점이 철령(鐵嶺)이다.
"삼부(三府)가 모여서 여진의 일을 의논하였다. 황제가 여진에게 칙유(勅諭)하여 오도리(吾都里), 올량합(兀良哈), 올적합(兀狄哈) 등을 초무(招撫)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라고 하였는데 여진은 본래 우리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삼부가 회의한 것이었다." - <태종실록>
역사에 기록된 근거 자료를 찾아라
의정부와 사헌부 그리고 사간원 대신들을 모아 회의를 마친 태종은 하륜을 불렀다.
"사고(史庫)를 열어 윤관이 동여진(東女眞)을 치고 변경에다 비(碑)를 세운 것을 면밀히 조사하여 보고 하시오." - <태종실록>
"전조(前朝)의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살펴보니 시중(侍中) 윤관이 동여진(東女眞)을 치고 변경에다 비(碑)를 세웠다는 것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체 없이 동북면에 나아가 그 비를 확인토록 하시오."
하륜이 동북면으로 떠났다. 명나라의 부당한 요구에 역사적인 자료를 들이대며 명나라의 요구가 불가함을 논박하겠다는 치밀한 전략이다.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편입하려는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는 전략이다. 동북면을 다녀온 하륜이 그 비(碑)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명나라와 외교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여진족은 우리나라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이민족이다. 고려 조정이 강하면 납작 엎드려 조공하고 약하면 국경을 넘나들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로 부임한 윤관이 여진족을 얕잡아보고 정벌하려다 무참히 참패했다.
이에 절치부심 칼을 갈던 윤관은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17만 대군을 이끌고 출진하여 함주,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진, 숭녕, 통태, 진양 등 9성을 평정하고 비를 세웠다. 이듬해 봄에 개선한 윤관은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때 윤관이 세운 비(碑)를 근거로 '우리나라 영토다'라는 것을 주장하자는 복안이다.
명나라의 여진족 직할통치계획은 착착 진행되어 요동천호(遼東千戶) 왕가인이 명나라 황제의 칙유(勅諭)를 가지고 입국했다.
"삼산(參散), 독로올(禿魯兀)등 여진지방 관민인 등에게 칙유(勅諭)하여 알린다. 너희에게 인신(印信)을 주어서 스스로 서로 통속케 하고 생업을 편하게 하여 짐과 함께 태평의 복을 누리도록 하라."
명나라가 여진족을 직접 통치하겠다는 외교문서다. 동등한 입장에서 주고받는 외교문서라기보다 일방적인 통보다. 올 것이 온 것이다. 눈 빤히 뜨고 오늘날의 평안도 일부와 함경도 지방을 내주는 궁지에 몰린 것이다. 이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김첨을 명나라에 계품사(計稟使)로 파견했다.
"너희 아버지가 인정했으니 딴지 걸지 말라"
"본국의 동북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길주, 단주, 영주, 웅주, 함주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나라 건통 7년에 동여진이 난을 일으켜서 함주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의 예왕이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나라 초년에 이르러 몽고가 여진을 거두어 복속시킬 때 본국의 조휘와 탁청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하여금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의 인민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 지어 길주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를 독로올(禿魯兀)이라 불렀으며 영주를 삼산(參散)이라 칭했습니다. 또한 웅주를 홍긍(洪肯)이라 부르고 함주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황제의 칙유(勅諭)에 '삼산(參散)과 독로올(禿魯兀) 등 여진 지역의 관민인(官民人)을 직접 초유(招諭)한다' 하셨습니다. 상고하건대, 삼산천호(參散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가 비록 여진인에 속하기는 하나 본국 땅(本國地)에 와서 산지가 오래되었고 본국의 인민과 서로 혼인하여 자손을 낳아서 부역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또 신(臣)의 조상이 일찍이 동북지방에 살았으므로 현조(玄祖) 이안사의 분묘가 현재 공주에 있고 고조(高祖) 행리와 조(祖) 이자춘의 분묘가 모두 함주에 있습니다. 생각건대 소방(小邦)이 고황제의 '왕국유사(王國有辭)'라는 은혜를 입었사오니 그곳에 살고 있는 여진 인민들을 본국에서 전과 같이 관할하게 하시면 한 나라가 다행하겠습니다. 이에 지형도본(地形圖本)을 받들고 경사에 가게 하여 주달(奏達)합니다." - <태종실록>
재반론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반론이다. 외교문서이니만큼 정중한 예를 갖췄다. 하지만 내용은 유구한 역사를 상고하고 지도를 첨부하여 '너희 아버지 주원장 홍무제(洪武帝가 인정했으니 딴지 걸지 말라'는 얘기다.
사신을 명나라에 파견한 태종 이방원은 상호군(上護軍) 박영을 동북면선위사(東北面宣慰使)로 임명하고 현장으로 출동하라 명했다.
"동요하는 여진족을 안무하라."
동북면에 도착한 박영은 국경을 철통같이 경비하고 술렁이는 여진족을 진정시켰다. 명나라와 담판을 짓기 위하여 경사에 들어간 계품사(計稟使) 김첨이 황제의 칙서(勅書)를 가지고 돌아왔다.
"조선 국왕 이휘에게 칙유한다. 상주(上奏)하여 말한 삼산(參散) 천호(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등 10처 인원(十處人員)을 그대가 성찰(省察)하라. 이에 그대의 준청(淮請)을 칙유하노라."
여진족을 간섭하지 않을 테니 조선이 계속 관리하라는 뜻이다. 조선의 승리다. 명나라를 상대로 한 외교전에서 거둔 작은 성공이었지만 큰 수확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구획 짓는 국경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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