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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 효형출판
'무섭다'란 말로 저자 한영우는 정조 재위 시기의 기록문화를 평가했다. 그 중에서도 화성이란 신도시를 건설하고 만든 공사보고서 <화성성역의궤>와, 어머니 헤경궁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아 화성과 현륭원에 다녀와 만든 <원행을묘정리의궤>가 무섭도록 치밀한 기록문화의 꽃이라고 했다.

매 끼니와 간식의 음식 종류와 그릇의 수, 음식 재료의 종류와 양, 비용을 그릇별로 기록했다. 행사에 들어간 모든 비용 또한 일일이 수량과 단가를 기록하고, 행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명단과 맡은 일, 품삯 등을 이 잡듯이 기록하여 철저한 실명제로 운영했다는 것이다.

<의궤>에서는 문자 기록뿐 아니라 화원을 시켜 주요 행사 도구와 행사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남겨두었다. 이들 그림은 통해 당대 사람들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데 무엇보다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그 치밀한 기록 중에서 정조의 화성행차를 그린 <반차도>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당대 일류 화가들이 그린 <반차도>에는 무려 1800여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저자는 그 화려하고 장엄한 그림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화려하고 장엄한 기록 <반차도>

이 책의 32쪽부터 95쪽까지는 반차도와 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다. 수많은 인물의 복장과 몸짓 하나까지 상세하게 그려놓아 설명을 곁들여 보면 당시의 행차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좌> 행차의 선두, 경기도 화성이므로 경기감사 서유방이 행렬의 선두에서 위풍당당하게 행렬을 인도하고 있다. <우> 정조가 타기로 되어 있는 어가가 등장, 가마는 말이 끌고 간다. 그러나 실제 정조는 이 어가에 타지 않았다.
<좌> 행차의 선두, 경기도 화성이므로 경기감사 서유방이 행렬의 선두에서 위풍당당하게 행렬을 인도하고 있다. <우> 정조가 타기로 되어 있는 어가가 등장, 가마는 말이 끌고 간다. 그러나 실제 정조는 이 어가에 타지 않았다. ⓒ 효형출판

<좌> 이 행차의 주인공 혜경궁이 탄 가마 등장, 협련군과 근장군사 등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면서 화려하게 등장한다. <우> 정조가 탄 좌마가 30명의 협마무예청과 30명의 협마순노 등의 호위 아래 혜경궁 가마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 이번 행차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 때문에 일부러 가마를 타지 않았다. 말 위에 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왕의 실제 형상을 그리지 않는 관례 때문이다.
<좌> 이 행차의 주인공 혜경궁이 탄 가마 등장, 협련군과 근장군사 등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면서 화려하게 등장한다. <우> 정조가 탄 좌마가 30명의 협마무예청과 30명의 협마순노 등의 호위 아래 혜경궁 가마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 이번 행차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 때문에 일부러 가마를 타지 않았다. 말 위에 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왕의 실제 형상을 그리지 않는 관례 때문이다. ⓒ 효형출판

정조의 화성행차, 그 정치적 의미

정조는 재위 24년간 66회 궁궐 밖으로 행차했는데, 그 중 절반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참배를 위한 행차였다. 28세의 나이에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 참배만을 위해 화성으로 행차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 행차할 때마다 백성들의 호소에 귀 기울여 평균 51건의 민원을 처리했다. 행차를 준비하면서 길을 닦고 다리를 보수하도록 했고, 수도 방위체제를 점검하는 군사 훈련의 기회로 삼았다.

행차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별시를 시행하여 지방 인재를 발탁 등용해서 지방민의 사기를 높여주었고, 행사의 준비와 추진에 공을 세운 많은 신료와 군사들에게 상을 내려 왕을 중심으로 내외 신민의 충성을 결집시켜 정치적 개혁의 토대를 구축하려 했다.

정조의 화성행차의 궁극적인 목표는 정조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화성을 무대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모든 친위세력을 하나로 묶어 세우는 거창한 정치 드라마, 정조는 바로 이것을 겨냥했다. 그러니 이 행사에 기울인 정조의 정성과 관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조는 드디어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때와 장소와 기회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시위는 한양에 잠복된 구질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혼신의 도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혼신의 도전적 드라마 속에는 왕조문화를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한국판 르네상스가 꽃피고 있었다."


개혁을 향한 정조의 야심에 찬 도전은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했다. 고질적 피부병이 악화되어 정조는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반차도>로 따라가는 정조의 화성행차/ 한영우 지음/ 효형출판/ 9500원


정조의 화성행차 - 로 따라가는

한영우 지음, 효형출판(2007)


#화성행차#반차도#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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