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과 엔틱이 공존하던 30년대의 경성, 아니 서울
6일 첫 방송을 시작한 드라마 <경성스캔들>은 무엇보다 신선한 기획이 돋보인다. 퓨전 시대극을 내세우고 있는 이 드라마의 작법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것이 곧 스캔들이다. 70여년의 시간적 격리, 혹은 문화적 지체는 우리의 굳어진 의식에만 있을 뿐이다. 지식으로서의 역사를 잊고 과거라는 선입견을 버리면 드라마의 무대는 그대로 지금의 서울이다.
주인공인 선우완(강지환 분)은 강남의 오렌지족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이효리의 히트곡 'Just 10 minute'의 노랫말처럼 경성의 여자들은 모두 다 연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그의 말은 허풍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수려한 외모에 세련된 매너, 사고 쳐도 문제될 게 없는 든든한 (친일) 가문의 후광까지 갖추고 있다.
자유연애와 성의 해방을 구가하는 현대에도 지조와 정절은 값진 것이어서 고지식한 나여경(한지민 분)은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30년대 경성의 나여경이 완고한 가치관을 가진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신식교육을 받은 경성 여자라는 점에서 전근대에 머물러 있던 여성의 전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전근대적인 윤리의식과 성 개념이 한 편에서 내면의 의식을 규율한다면, 다른 한 편에서는 언제나 그 전근대의 의식을 뛰어넘고자 하는 기운이 싹트기 마련이고 역사는 늘 이런 기운의 세례를 받은 모험가들에 의해 진일보한 세상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그들에게 '신(新)'이라는 접두어를 붙여 그들의 선각을 구별한다.
해화당 서점 나여경이 고루한 전근대적 사고 혹은 전통적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는 여성이라면, 유명 요정 명빈관의 기생 차송주(한고은 분)는 이른바 신여성의 전형이다. 어차피 직업상 접대부인 그녀에게 성 개념의 근대성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생에 머물지 않은 직업 모델로서의 그녀의 일이나 거리낌 없이 남자들의 도박에 끼어드는 그녀의 일상에서 우리는 근대 여성의 면모를 발견한다.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총독부 보안과 수사관으로 출세한 이수현(류진 분)의 등장은 모던과 엔틱, 앙시앵레짐(구체제)과 변혁의 기운이 공존하던 당시의 시대상을 상징하듯 보여준다.
그는 선우완 가문의 머슴 아들이다. 타고난 머리와 출세 지향의 의지로 천출의 신분을 극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진실이야 어쨌든 지금의 그는 자신을 공부시켜준 주인집 아들이자 가장 절친했던 친구(선우완)의 형을 밀고한 천하의 배은망덕한 인간이다.
신분 질서의 해체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신분에 의한 계급적 질서에서 능력에 의한 계급 사회로의 이행과정이 곧 근대이고 식민지 조선에서, 30년대의 경성에서는 바로 그 근대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다. 마치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처럼 계급의 수직적 상승을 실현해가는 근대인 이수현에게 주인마님의 시은 따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이 네 사람을 중심으로 드라마는 전개된다. 경성의 모든 여자들이 자신의 수중에 있는 듯이 생각하는 개명한 난봉꾼 선우완과 완고한 가치관으로 '조마자(조선의 마지막 여자)'라는 별명을 얻은 나여경의 만남은 그 자체로 모던과 엔틱의 숙명적 충돌이다. 또한 그들이 좌충우돌 사랑을 시작한 경성은 개명과 전통이 부닥치던 생활과 문화의 전쟁터다.
신분질서에서 비롯된 선우완과 이수현의 갈등은 구체제와 신체제가 충돌하던 당시의 시대적 긴장을 보여준다. 여성 해방의 상징적 인물처럼 그려지는 차송주가 소녀 시절부터 연모한 이수현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설정은 근대적이기보다는 전근대적이다. 모던과 엔틱의 충돌과 공존은 도처에서 출몰한다.
암울한 식민시대를 벗어던진 유쾌, 통쾌, 상쾌한 역사인식
카메라는 이들의 사랑과 연애를, 독립과 친일의 보이지 않는 전쟁터 경성을 빠르게 쫓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시대를 생각하면 으레 빠져들던 역사의 암울한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다. 참혹한 역사의 현장과 식민지 백성의 고단한 삶은 아예 없다. 밝고 경쾌한 음악과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의 신나는 율동은 무대가 경성이 아니라 서울의 어디쯤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선우완이 몸담고 있는 비공식 직장인 잡지사 <지라시>는 유명인들의 사생활이나 가십을 다루는 현대의 대중지를 연상시킨다. 경성판 <선데이서울>이다. 유명 교육자의 사생활을 폭로하고 사진을 조작하는 지라시 일당의 행태는 현대의 파파라치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식민지 시대 경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경성스캔들>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식민지 시대의 암울함을 벗어던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세상이 건강한 미래의 세상으로 한걸음 나아간 덕택이라 기자는 생각한다. 이제 수난으로서의 민족사를 극복하고 도약과 성취의 민족사를 쓸 수 있을 만큼 우리 역사의 몸집이 커진 것이다. 자신감이 생겨난 것이다.
우리가 당한 식민지배의 역사를 잊어 버리자고 말하지 않는다. 드라마는 오히려 밝고 환한 경성의 일상을 통해 과거의 얼룩을 지운다. 방금 빨아낸 하얀 셔츠 같은 역사를 시간의 빨랫줄에 널어놓고 빛나는 햇볕에 말린다.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의 의식도 개운해진다. 마르고 있는 역사 뒤로 투명하게 푸른 하늘이 걸려 있다.
역사를 대하는 새로운 인식에 눈이 부시다. 앙심으로 굳어 있던 우리의 시간에 유쾌, 상쾌, 통쾌한 날들의 역사가 새로 써진다. '항일투쟁의 가장 강력한 혁명전술 연애'라는 메인 카피처럼, 드라마 속 연인들은 혁명적인 스캔들을 터트리고 시청자들은 새로운 역사와 연애를 시작한다. 바야흐로 혁명은 무르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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