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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책 겉그림 ⓒ yes24
어렸을 적 아버지는 똥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겼다. 시골 뒷간의 똥오줌을 귀한 퇴비로 썼기 때문이다. 자칫 7남매 자식들이 뒷간 하나를 두고 기다리다 못해 이웃집 뒷간을 찾아가면 그날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랫배가 터질 듯 아프더라도 어떻게든 우리 집 뒷간에다 똥을 싸도록 했다.

그때는 똥을 생명처럼 여기던 아버지의 속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똥이 밥이 되고, 밥이 똥이 되는 생태계의 순환법칙을 그때는 알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생명 순환의 법칙에 눈을 뜬 뒤에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렇더라도 도심에 살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의식의 날만 가냘프게 세울 뿐 실천적인 삶은 살지 못하고 있다.

귀농 전도사 이병철의 〈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는 실로 밥과 똥의 순환 고리를 회복시키는 생명 순환의 세계를 담고 있다. 귀농생활을 한지 10여 년 동안의 삶을 통해 진정으로 농촌의 삶이 무엇인지, 농부의 삶이 무엇인지, 자연과 함께 사는 길이 무엇인지 낱낱이 일깨워주고 있다.

"왜 우리가 농촌으로, 흙과 함께 하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돌아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흙과 함께 하는 마음자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등 생태적인 삶의 전환에 따른 현실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나눈 내용이라 하겠습니다."(들머리에서)

그가 귀농을 시작한 것은 단순히 도심 속 바쁜 실타래 같은 삶을 청산하고픈 마음이 아니었다. 적어도 땅과 흙과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고픈 이유였다. 더욱이 경제적인 자립과 만족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소박한 밥상처럼 소박한 자유와 만족을 얻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했다. 대지의 어머니로부터 얻고 싶은 가장 단순한 삶이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작금의 농촌 현실이 그다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한미 FTA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그 근본마저 뿌리 채 뽑힐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귀농현상도 다시금 주춤거리고 있다. 도무지 먹고 살아갈 최소한의 여력마저 위협을 받고 있는 까닭이다.

귀농 세월 10년을 쌓아 올린 그는 그래서 함부로 귀농에 대해 권하지 않고 있다. 오직 자연과 다른 생명에 대해 섬김의 자세를 지닌 사람,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돌멩이 하나까지 함부로 해치거나 다루지 않을 수 있을 있는 사람,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보살피고, 단순한 삶이 주는 풍요의 비결을 체득하길 원하는 사람에게만 권하고 있다.

그 까닭에 그는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퇴비를 쓰고 있으며, 농약이나 제초제 대신에 수고로운 김매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처음 농사를 지을 때만 해도 잡다하게 들은 지식과 기술력에 줄곧 의지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하늘과 자연의 움직임에 맞춰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도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도 서서히 늙은 농부가 되고 있는 것이리라.

"늙은 농부란 단지 농사에 대해 경험이 많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 그 도리를 알아 세상사 이치에 대해 달관한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농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제대로 짓고 산다면 이를 통해 절로 세상사의 이치를 깨닫게 되어 물처럼 그렇게 세상에 달관하며 살 수 있는 것이라고 할까요."(251쪽)

이 책을 읽고 덮자니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똥과 오줌을 왜 그땐 그리 귀하게 여겼는지, 하늘의 움직임과 변화에 왜 그리 민감하게 여겼는지 도무지 몰랐다. 그저 내 딴엔 아버지가 있는 힘껏 농사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씨앗을 뿌리고, 풀을 뽑고, 퇴비를 주고, 가을걷이하는 그 모든 것이 농사꾼의 몫이지 않나 싶었던 이유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은 그것이다. 어린 시절의 늙은 내 아버지가 그렇게 했던 것은 그만큼 생명 순환의 법칙을 제 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요, 농사일에 그 누구보다도 능숙했지만 하늘과 자연의 움직임에 한 몸이 되었던 것은 그만큼 하늘과 자연을 무시하지 않는 순한 농부로 살고자 함이었고, 그래야만 풍성한 결실도 맺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 - 귀농 전도사 이병철의 녹색 에세이

이병철 지음, 이후(2007)


#이병철#늙은 농부#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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