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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가난, 걱정, 병? 그것은 삶에 대한 권태다."

마키아벨리의 말이다. 준표(김상중)가 화영(김희애)과 불륜을 벌이는 이유 중 하나다. 준표를 열정적인 남자로 만들어준 것은 화영이기 때문이다. 조강지처의 아킬레스건이 권태라고 붙여지는 이유다. 권태라, 먹고살기 너무 힘겨운 이들이 불륜을 벌인 여력이 있을까? 어디 준표나 화영만일까? 인간은 권태 때문에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며,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점에서 보면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보이지만 결국 매우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존재다. 편하고 즐거운 요소를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고자 하는 이다. 언제나 인간은 권태에서 벗어나 쾌락을 찾는 자신의 행위를 거창한 명분으로 치장하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새로운 사랑의 이름을 내세우는 불륜이 있다. 이 불륜에 이성(理性)은 노예가 되어 합리화의 수단을 제공한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도 말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허영심이 강하고, 타인의 성공을 질투하기 쉬우며, 자신의 이익 추구에 대해서는 무한정한 탐욕을 지닌 자다."

김수현 드라마는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인간관을 그대로 따른다. 김수현 드라마의 계보를 잇는 <내남자의 여자>는 이런 점에서 기존의 드라마에서 보이는 인간관과 배치된다. 다른 불륜드라마와 구별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선하고 관용심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을 중심으로 개체 보존 본능을 발휘하는 존재다. 김수현 드라마에는 항상 인간의 본능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대사들이 난무하는 이유다. 모든 상황은 자기 본위적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합리화하는가이다. 그것에 성공해야 시청자를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남자의 여자>에서 화영은 자신의 상처를 내세워 가해자의 입장을 합리화 한다. 친구의 남편과 벌인 불륜에도 자신의 사랑이라며 당당하다. 이 얼마나 본능에 솔직한가. 화영이 도도하게 구는 것은 자기 개체를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하는 본능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불가항력이었어. 죽어도 좋았어. 너 따윈 아무 상관없었어." 사랑을 차지하는데 친구가 어디 있는가? 곧 당당한 여성의 사랑으로 명분화 된다. 먹고살기 위해 치욕을 감내해야 한다는 김훈 식의 어법은 통하지 않는다. 먹고 사는 문제는 늘 김수현 드라마의 주요 고민도 아니다. 내 자존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남의 가정이 무너지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저를 위해 전부를 바쳤는데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준표에게 당당하게 위자료를 요구하는 지수(배종옥)도 마찬가지다. 먹고 사는 자체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매달리지 않는다. 왜? 자존(自存)이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개체가 가진 존엄성이 깨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생각해서 이혼을 하지 않거나 다시 재결합하는 드라마의 내용은 김수현 드라마에서는 위선이다. 인간의 악한 본능에 맞지 않는다.

김수현 드라마에서 이러한 자기 존재를 위한 말과 행동은 고상하지 않다. 사람은 고상한 말만 섞어 쓰는 사람에게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욕이나 비속어를 적당하게 섞어 쓰는 사람에게 재미를 느낀다. 고상한 표준어나 얌전한 말만 골라 쓰는 이는 권태롭기 때문이다. 더구나 드라마는 권태가 아니라 그것을 벗어나려고 보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가 있니"라고 하지 않는다. "아니, 저 기름에 튀겨 먹을 년"이라고 한다. 어느 표현에 더 꽂히겠는가.

인간은 고상하지 않고, 그것을 전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김수현은 잘 알고 있다.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말이 그러니 행동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행동은 고상하지 않다. 머리채를 잡고 뒹굴고 악다구니를 쓰며 싸우는 것이 인간의 일상 모습이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이 비천한 모습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의 정도가 심할수록 김수현 드라마에 부정적이다. 다행인지 전략의 적중인지 기존의 드라마들이 이를 보여주지 않으니 주목을 받는다.

또한 등장인물들은 세상을 다 아는 듯이 군다. 자아통제감의 극대화다. 이러한 자아통제감은 즐거움을 주는 요소다. 물론 인간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특히 아이는 자신이 세상을 다 아는 듯이 군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즐거운 곳이 된다. 그러면서도 응석을 부린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합리화와 막무가내다.

자신의 입장이나 의견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김수현 드라마의 인물들은 아이다. 응석을 부리고 투정을 부리고 세상에 대해서 냉소적이다. 세상은 자기 손바닥 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세상은 그런 것이라고 서로 훈장질을 한다. 서로 훈장질을 하다 끝나는 것이 김수현 드라마다. 서로를 충족시키니 서로 달라 보이지만 동체(同體)다. 어차피 드라마는 훈장질을 하기 위해 만든다면 할 말은 없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악한 속성을 잘 알기 때문에 국가 체제에서 군주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김수현 드라마는 인간의 본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여념이 없고, 그것의 해결책으로 가족을 선택하기 일쑤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남자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긴다. <내남자의 여자>의 결말이 매우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봉합이다. 본능에 충실한 이들이 자신의 길을 간다면서 갑자기 도의론자, 도덕론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키아벨리즘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스트로 잘못 보았던 모양이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안에 보낸 글입니다.


#내남자의 여자#김수현#마키아벨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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