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경찰청이 진실의 일단을 밝혀냈다. 37쪽짜리 대운하 보고서 유출경위다.
수자원공사의 김상우 기술본부장이 서울대 경영대학원에서 알게 된 결혼정보업체 '퍼플스'의 김현중 대표에게 보고서를 건넸고, 김현중씨가 다시 <이코노미스트> 박모 기자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실상이 이렇다면 이명박 캠프가 곤혹스러워진다. 지금까지 주장해온 변조·유출 경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명박 캠프는 애초에 '안희정팀'을 지목했다가 나중에 '특정캠프의 모의원'을 거론했다.
하지만 이명박 캠프는 물러날 태세가 아니다. 진수희 대변인이 이렇게 말했다. "보고서 종류도 9쪽, 17쪽, 37쪽 등 여러 개가 있지 않으냐. 수자원공사 보고서가 결혼정보업체 대표를 거쳐 언론에 흘러들어간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약한 고리일 뿐이지, 다른 경로를 통해 또 유출됐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고 보니 '다른 경로'가 하나 있긴 하다. 박근혜 캠프 유승민 의원의 입이다. 그는 5월 31일 대운하 보고서 실존 사실을 최초로 언급한 바 있다. <이코노미스트>의 박모 기자가 김현중 대표로부터 보고서를 넘겨받기 하루 전이다.
김상우-김현중-박모 기자로 이어지는 유출 경로
그래서일까? 이명박 캠프는 김현중 대표의 행적을 문제 삼는다. 그가 '뉴라이트 청년연합'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점을 들어 박근혜 캠프와의 연관 가능성을 제기한다.
특히 이명박 캠프는 "5월 31일 발언은 박근혜 캠프 외곽조직의 모 인사로부터 들은 얘기"라는 유승민 의원의 해명과 관련해 '외곽조직'의 실체에 주목한다. 김현중 대표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뉴라이트 청년연합'일 가능성을 예의주시하는 눈치이지만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다.
남겨둘 일이다. 경기 경찰청도 김현중-박모 기자로 이어지는 보고서 전달경위와 동기가 석연치 않아 추가 수사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로선 결과를 기다리는 게 순리다.
그럼 '안희정팀'은 어떻게 되는 걸까? '누명'을 벗고 '광명'을 찾은 걸까? 이명박 캠프는 이마저도 아니라고 한다. 진수희 대변인이 한 마디 더 했다. "이명박 전 시장의 지지율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박근혜 전 대표 쪽의 절박함을 여당이 이용한 것"이라고 했다.
에둘러 말한 것이기 때문에 해석이 쉽지 않다. 굳이 해석하자면 "여당"이 박근혜 캠프의 움직임을 원격조종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상우-김현중-박모 기자로 이어지는 유출 경로에 "여당"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인다. 유승민 의원에게 보고서 실존 사실을 전달한 사람도 '박근혜 캠프의 외곽조직'이니까 '여당'이 발을 걸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명박 캠프는 뭘 근거로 '이용'을 거론한 걸까? 김상우 본부장이 등장한다. 그의 석연치 않은 진술이 부각된다.
정권 실세와 정치 공무원의 은밀한 거래?
김상우 본부장은 김현중 대표가 대운하에 관심이 있어 보고서를 건넸다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친분에 얽매여 보고서를 건넸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는 보고서의 겉표지를 바꿔 건넸다. 수자원공사 조사기획팀 명의로 된 문건을 태스크포스가 작성한 것처럼 꾸며 김현중 대표에게 전달했다. 보고서 내용이 공개됐을 때의 파장과 보고서 유출 경로 추적을 의식한 행위다.
석연치 않아서일까? 이명박 캠프 외에 한 곳이 더 나섰다. <동아일보>다.
<동아일보>는 '검은손'(정권 실세)과 '폴리크라트'(정치 공무원)의 은밀한 거래 의혹을 제기했다. "정권 실세 차원에서 야당 대선주자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 그동안 치밀하게 기획된 프로그램이 이제 막 가동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한나라당 당직자의 말을 전했다.
나아가 "비교적 근거가 있는 내용은 범여권 인사의 입을 통해 직접 폭로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안은 주간지 등에 흘려서 이슈로 만들어 신문·방송이 따라오게 만드는 방식을 쓰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대운하 보고서도 경제주간지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고 환기했다.
이쯤 되면 '안희정팀'도 의혹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김상우 본부장의 뒤가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기 전까지 '용의자' 신분을 벗어날 수 없다.
너무 막연하다는 얘기가 절로 나온다. 다른 건 몰라도 집권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은 '여당'의 원격조종에 응한다는 게 '폴리크라트'의 기민한 처신이냐는 의문이 당장 떠오른다.
그래도 접자. 김상우 본부장의 보고서 유출 동기도 경기 경찰청이 추가 조사한다고 하니 나중에 따져도 늦지 않다.
분명히 해둘 건 따로 있다. 흐름이다.
이명박 캠프와 일부 언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흐름은 거꾸로 가고 있다. 경기 경찰청의 수사 내용은 이명박 캠프가 애초 제기한 변조·유출 의혹을 강화시키는 게 아니라 약화시킨다.
일방적인 얘기가 아니다. 이명박 캠프의 말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보고서 유출 의혹을 구성했던 고리는 '약한 고리'로 격하됐고, 경로는 '다른 경로'로 다양화 됐다.
이러면 판이 커진다. 더 강한 고리, 또 다른 경로를 찾으면 의혹 공방의 범위와 위력이 커진다. 더불어 그 결과, 즉 손익의 폭도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