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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길사
그러나 이런 역사적 배경과는 다르게 사회·경제적 요건은 놀라울 만큼 유사했다. 전근대사회는 농업이 기반이 되는 사회다. 그러나 농업사회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자영농이 붕괴해 무산계급으로 전락하게 됐다. 이들은 품팔이꾼이나 소작농으로 명맥을 이었고, 토지는 일부 대토지 소유자에 의해 분할되어 그들의 사익만을 채우는 데 사용됐으며, 국가의 권력은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형편이었다.

사회의 근간이 되어야 할 농민들이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라쿠스 형제에게도, 신돈에게도 근본적인 문제는 토지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민회에서 열변을 토한다.

"…그들은 오직 다른 사람들의 부와 사치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들 자신의 소유라 할 단 한 뼘의 땅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신돈 역시 유고문(諭告文)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종묘, 학교, 창고, 사사, 녹전군 등의 공수전과 나라 사람들의 세업인 전민을 거의 다 기득권 세력이 강탈했다. …… 그들은 농장을 더욱 확대하면서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고 나라를 궁핍하게 만들고 있다."

때문에 그라쿠스 개혁의 핵심은 토지를 빼앗긴 무산자에게 국유지를 분배하여 자작농을 육성하고자 하는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이었고, 신돈의 개혁 역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으로 대표되는 토지 문제 해결이 핵심이다.

이들의 개혁 시도는 일반 민중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기득권 세력에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사회에서도 어떤 집단에서도, 자신의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침해하게 된다면 이들은 격렬한 반발을 한다. 하물며 그들이 상대해야 할 집단이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집단이었음에야, 이들의 실패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이들은 짧은 개혁 기간 내내 격렬한 반대에 시달렸고, 결국 반대파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죽음과 함께 개혁의 조치는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라쿠스와 신돈의 패배에서 가장 역설적인 것은, 이들의 패배가 체제의 몰락을 앞당겼다는 점이다. 개혁가의 실패와 죽음은 내부적 모순을 결코 덮지 못한다. 내부적 모순은 여전히 사회에 잠재되어 있고, 새 시대의 개혁가들은 기존 체제에 한계성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그라쿠스와 신돈의 이정표를 계승하고 실행으로 옮긴 카이사르와 이성계(그리고 정도전)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기존 체제를 뒤엎고 새 체제를 건설하는 길을 택했다.

그라쿠스의 동기는 내부적 위기에 처한 공화국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 과정에서 둔 무리수 때문에 체제의 파괴자로 비쳤으나 공화국에 대한 그들의 충심은 확고했을 것이다. 그라쿠스는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여 실행으로 옮긴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붕괴시키고 제정의 기초를 닦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마도 씁쓸하게 웃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은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라쿠스의 개혁은 기득권측의 반발과 현실의 장벽에 부딪혔다. 사진은 로마의 콜로세움.
그라쿠스의 개혁은 기득권측의 반발과 현실의 장벽에 부딪혔다. 사진은 로마의 콜로세움. ⓒ 한길사
그라쿠스가 개혁에 실패한 원인을 흔히 '시기상조'라고 한다. 그렇다면 시오노 나나미 선생이 지적한 대로, 그라쿠스가 10년을 더 기다려서 집정관이나 재무관으로서 개혁을 추진하였다면 과연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60년 뒤에 카이사르가 농지법을 통과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집정관이라서가 아니라 '삼두 정치'라는, 로마 공화정의 시각으로 볼 때 지극히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 계급의 좌장 격이라 할 수 있는 크라수스와 (결정적으로) 군대의 막강한 지지가 뒷받침되는 폼페이우스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카이사르의 농지법이 통과되리라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카이사르가 현직에 앉아있을 때도,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을 때도 반대 세력은 그에 대한 증오를 감추지 않았고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카이사르가 내전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전에서 승리하지 않았더라면 적대 세력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려 했을 것이다.

그라쿠스가 집정관으로서 토지 개혁을 추진하였다면? 여전히 그는 기득권에게 위험분자로 비쳤을 것이고 그의 개혁은 시작과 동시에 좌초되었거나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굴복을 택하게 되지 않았을까. 체제 내의 개혁은 체제 밖의 혁명 못지않게 어려운 법이다.

가까운 역사에서도 이러한 예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는 기존의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칠레의 국가권력을 쟁취하여 사회주의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적 권력은 기득권이 쥐고 있었고, 그는 집권 기간 내내 기득권 세력의 사보타주에 시달려야 했다. 합법적 국가원수인 아옌데를 보호해야 할 국가 기구는 오히려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저명한 로마사가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개혁과 혁명의 갈림길에서 후자를 택했다고 말했다. 수단의 과격성 때문에 이렇게 평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라쿠스는 혁명을 택하기에는 하부 지지기반이 너무 미약했고, 개혁을 택하기에는 지나치게 조급하고 비타협적이었다. 결국 그는 개혁과 혁명의 중간점 사이에서 배회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이에 비하여 동생 가이우스는 형의 실패를 거울 삼아 지지기반을 튼튼히 했다. 그는 원로원을 적대시하는 대신에 기사 계급의 지지를 얻었고, 곡물법의 도입으로 무산 계급을 한편으로 끌어들였다. 가이우스는 합법적으로 호민관 직에 연임하여 개혁의 성공을 이끌어내는 듯했으나, 원로원의 정치적 모략 앞에 지지층은 분열하고 최후에는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고야 말았다.

가이우스의 결정적 패인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실히 결집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원로원의 조종을 받는 드루수스의 선심 공약 앞에 지지층은 손쉽게 그를 배신했다. 가이우스가 지지 기반을 확실히 결집해내어 흔들리지 않고 한목소리를 내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이우스가 다시 한번 호민관 재선에 성공했더라면 개혁은 확실히 탄력을 받아 대세로 굳힐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그라쿠스의 개혁은 사회적 모순을 잠재우는 데 일익을 했을 것이고, 그 이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의 정치가 군대(승전 장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 본위의 정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여러모로 그라쿠스의 실패가 아쉽다.

우리 시대, '개혁'이라는 화두

우리는 개혁의 시대에 살고 있다. 수많은 정치인이 개혁을 부르짖으며, 현 참여정부 역시 개혁의 기치를 걸고 집권했다.

일본제국주의와 군사 독재라는 일그러진 근대의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 사회는 개혁의 당위성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개혁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역사적 과제이다. 변화없는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개혁은 체제가 동맥 경화증에 걸리는 것을 막고 장기적으로 체제의 붕괴를 막게 한다. 특히 IMF 사태는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라쿠스의 개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그라쿠스 개혁의 의의는 포에니 전쟁 직후 불평등한 토지 소유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막고 빈민층으로 추락하는 중산층을 구제하는 데 있다.

이는 현재의 한국 사회와도 일정한 접근성이 있다. 포에니 전쟁에 비견될 수 있는 IMF 사태를 이겨낸 한국의 서민들은 오히려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에 노출되어 있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으며, 현대의 토지 문제라 할 수 있는 집값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등하고 있고, 서민 경제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여건 속에서, 경제적 불평등을 막고 서민의 이익을 보장할 한국의 '민중파'가,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할 민중파의 존재가 절실하다. 현대의 농지법에 비견될 만한 토지공개념의 도입 또한 시급하다.

그라쿠스의 실패를 반추해 볼 때, 비타협적이고 조급한 개혁 시도는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사회를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에 노출시키게 된다.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기득권의 발호를 저지하고 원활한 수행을 이끌어내려면 시민사회의 동의와 사회적 대단결이 필요할 것이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권력을 잡는 것보다, 권력을 사용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권력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이 말은 깊이 음미해볼 만하다.

"정말로 슬픈 현실이지만, 인간은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 서툴기만 해 점점 더 남이 참아주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 <피렌체사>

그라쿠스는 현실 정치에서 패배했지만...

분명 그라쿠스는 현실 정치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후세에 영광스럽게 남았다. 먼 훗날, 프랑스 대혁명 시기 정치적 평등에 이어 경제적 평등까지 주장했던,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평가받는 바뵈프(Babeuf)가 자신의 별칭을 '그라쿠스'로 삼고, 자신의 주장이 담긴 신문 이름을 <호민관>으로 정한 것은 머나먼 선배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변혁의 시기에는 늘 수많은 그라쿠스들이 있었다. 왕안석, 조광조, 로베스피에르, 정약용, 마르크스, 트로츠키, 간디, 체 게바라, 그리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시대의 조류에 맞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들. 이들은 과거에 존재하였고 오늘날에도 활동하고 있으며 불평등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아직 수많은 그라쿠스가 있어 희망적이다.

덧붙이는 글 | <로마인 이야기 글쓰기 대회> 응모글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그라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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