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일(7월5일)부터 치러지는 기말고사를 앞둔 중학교 3학년짜리 작은딸이 얼마 전부터 '근처에 있는 구립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며 가방을 짊어지고 나갔습니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시험 한 달 전부터 시험에 대비해 주말도 없이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하지만 생활이 어렵다는 이유로 학원 수강을 끊었고, 아이는 마땅히 공부할 공간이 없어 구립 도서관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연히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겠지'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남편이 전화를 한 번 해보라고 했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는 남편은 학생들의 탈선장면을 많이 목격하기 때문에 혹시라도 도서관에 간다고 하고선 다른 곳에서 놀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을 해 보라는 거였지요. 전화를 했더니 바로 받습니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중랑구청이라고 합니다.

뜻밖의 대답에 깜짝 놀라 "도서관에 간다더니 왜 구청이야?"했더니 구청로비에 있는 만남의 광장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집 바로 옆에 있는 구청 로비에는 방문객들이 앉아서 쉬기도 하고 대화도 나눌 수 있도록 둥근 원탁에 의자까지 준비해 둔 공간이 있거든요. 도서관에 갔더니 빈 자리가 없어 시원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딜까 생각하다가 구청을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쳐다볼 텐데 창피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런 것 상관없다며 시원해서 집중도 잘 되고 너무 좋다고 합니다. 밤 9시가 다 돼 가는데도 오지 않아 또 전화를 했습니다. 아직도 구청이냐고 했더니 저녁 8시에 구청에서 쫓겨났는데 지금은 은행이라고 했습니다.

"엄마 뭐가 창피해? 난 하나도 안 창피해"

황당했습니다. 아이가 말하는 은행은 우리 아파트 상가에 자동기계가 설치된 곳입니다. 생각해보니 공간이 넓고 에어컨도 설치돼 있어 시원하고 또 창가에 넓은 테이블이 있어 책을 펴놓고 엎드려 공부할 공간은 충분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나 2면이 통유리라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고 사람들도 수시로 드나드는 곳인데 어떻게 그곳에서 공부할 생각을 하였는지, '왜 집 놔두고 추하게 떠돌아다니며 공부를 하느냐고 빨리 오라'고 했지요. 그러나 시원해서 좋다며 조금만 더 하고 오겠답니다. 아이는 에어컨이 없는 17평의 집에 언니랑 누우면 꽉 차버리는 자신의 방이 너무 답답했나 봅니다.

혼자 쓰기도 비좁은 방에 책상과 책꽂이, 두 아이의 책과 옷, 가방까지. 아무리 치우고 정리를 한다고 해도 방은 자꾸만 어수선해지니 집중이 잘 안 됐나 봅니다. 아이는 다음 날도 도서관에 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화를 해보니, 또 자리가 없어 구청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저녁 8시가 되어 또 쫓겨났고, 은행이라고 했습니다.

"너 왜 자꾸 창피하게 떠돌아다니면서 공부하는 거야? 집도 없는 아이처럼."
"엄마 뭐가 창피해? 난 하나도 안 창피해. 여기 시원해서 얼마나 집중이 잘 되는데."

"너 정말 은행 맞아?"
"엄마는 내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면 모르겠어."


물론 잘 알지요. 아이는 아직 거짓말을 하고 다닐 정도로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요. 하지만 독서실에 가는 큰딸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짝 들여다 보라고 했습니다. 고등학생인 큰 딸도 시험기간이라 한 달만 독서실을 끊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작은딸은 독서실 끊어 달라는 말도 없이 제 나름대로의 공부 장소를 물색하고 다니면서 떠돌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다영이 은행에서 공부 하지 말라고 해.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다 쳐다보고, 자기네 학교 학생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낄낄 웃으며 지나간다니까. 학원 못 다니는 것 소문내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창피하니까 낼부터 가지 말라고 해."
"공부를 하기는 해?"

"응! 문제집을 열심히 풀고는 있어."
"그럼 됐어. 그래도 다영이가 너무 당당해서 좋지 않아? 엄마나 너 같으면 어디 생각이나 할 수 있겠어?"
"아무튼 엄마 낼부터 하지 말라고 해."


작은 딸이 자기의 몫을 훌륭히 해낼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작은 딸의 성격이 당당해서 좋다고 추켜세우기는 했지만 기분이 썩 좋을 리는 없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에어컨 바람이 빵빵하게 나오는 시원한 학원에서 선생님의 알토란 같은 설명을 들으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도 해가며 편안히 공부를 하고 있을 텐데, 좁고 더운 집을 피해 20분을 걸어 간 구립 도서관에는 자리가 없어 또 20분을 걸어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구청 로비에서 공부를 하다 쫓겨나 다시 에어컨이 있는 은행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 아팠지요. 잠시 후 아이가 돌아왔습니다.

"공부 많이 했어?"
"응! 엄마 공부 짱 잘돼."

"오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 창피하지 않아?"
"왜 창피해? 내가 공부하겠다는데. 난 그런 것 신경 안 써."


아이는 도서관, 구청, 은행, 친구가 다니는 교회 등을 돌아다니며, 그렇게 떠돌이 공부로 시험에 대비했습니다. 내일이면 드디어 시험입니다. 그러나 시험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씩씩하고 당당하고 활발하고 쾌활한 아이의 성격이라면 굳이 공부에 승부를 걸지 않더라도 자기의 몫을 훌륭히 해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거든요. 이게 단지 엄마의 교만일까요?

덧붙이는 글 | 방송에도 올렸습니다.


#작은딸#시험기간#시험공부#도서관#구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