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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은 경제관련 도서이지만 그 제목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화두를 던져주었습니다. 맘몬(자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선언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꽃에 빠져 꽃을 찾아 떠난 여행길, 햇수로만 따져도 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렇듯이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이 얼마나 무지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내가 본 것, 그것이 껍데기뿐이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뇌의 시간 후 그 이전보다 조금 더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제서야 들꽃들 앞에서 겸손하게 그들이 들려주는 소리들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서울하늘 아래를 걸었습니다. 유난히도 많이 보이는 것이 서양등골나물이었습니다. 아직 꽃을 피우진 않았지만 지난해보다 그 영역이 넓어진 것을 보니 그냥 두었다가는 온통 서양등골나물들의 세상이 될 것만 같습니다. 서양등골나물이 빽빽한 공터에 앉아 그들을 뽑았습니다. 오직 그들만 가득한 공간, 이젠 풀들도 사람을 닮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뽑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 뽑은 만큼은 다른 식물들의 영역이 될 수 있겠지요.
그들을 뽑아내고 있을 때 바닥을 기며 자라는 피막이가 자기의 영역을 위태로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자그마한 열매도 맺었더군요. 너무 늦지 않았다면 꽃이 있을 터인데 생각하며 가만히 살펴보니 육안으로 꽃이라고 확인하기가 쉽지 않은 작은 꽃들이 피어있었습니다. 그동안 피막이를 많이 봐왔고 꽃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작고 수수한 꽃인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저 작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들보다 더 작은 꽃도 만나긴 했지만 내가 가진 카메라렌즈의 한계로 인해 오늘 담은 피막이꽃이 가장 작은 꽃으로 등극을 했습니다.
작은 꽃 피막이를 담으며 '작은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삶의 화두 중에도 '작은 것'이라는 주제가 들어있는데 삶으로 살지 못하고 지적인식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내 속내는 끊임없이 큰 것만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도 돌아보았지요.
'작은 것'을 보려면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지요. 들꽃에 대한 관심이 있으니 그 작은 꽃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이겠지요. 아무리 크고 화사한 꽃이라도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인다고 다 보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혹 화원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화사한 꽃들이 그 곳에 있고, 내 눈에 들어오지만 거의 대부분 나는 그들을 보지 못합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꽃은 사람의 손길이 탄 원예종이 아니라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야생화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들어온다고 다 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우리 주변에도 '작은 자'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로 인해 살아간다 할 수 있습니다. 비교하며 살아가는 속물이다 보니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며 위안받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데'하며 위안을 얻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우리 삶에 위안을 주는 이들, 그들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당연한 것입니다.
관심을 갖게 되면 더 깊이, 많이 보게 됩니다. 관심없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지요. 피막이가 수술이 몇 개고, 꽃잎은 몇개고, 색깔은 어떻고, 열매는 어찌 생겼고, 꽃이 피는 시기는 언제고, 어떤 곳에서 잘 퍼지는지 알 수 있답니다. 물론 그것을 알지 못해도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들을 앎으로 인해 달라지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지만 남이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을 더 깊이있게 하고, 넓어지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더 깊이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해야 합니다. 그냥 서서는 그 작은 꽃들을 볼 수 없듯이 작은 자들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들과 같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그들을 바라봐야만 그들의 아픔이며 희망이 제대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들꽃과 눈높이를 맞추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들꽃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눈높이가 있듯이 작은 자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눈높이도 있는 것이지요.
작은 꽃들도 온전한 꽃이듯 작은 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볼 때 제 구실을 못하는 이들까지도 사실은 다 온전한 사람들입니다. 단지 우리와 다르다는 것만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들은 다르다는 이유때문에 차별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 사는 맛을 느끼라는 신의 축복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너도 나도 온전한 사람이구나!',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것이구나!', '이것이 사람살이구나!'느끼며 살아간다면 그것같이 살맛나는 일이 어디있을라구요.
오늘은 '작은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꽃을 만났습니다. 큰 것만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삶인지 돌아보게 하는 꽃을 만났습니다. 그 작은 꽃들도 꽃이듯, 이 땅에서 작은 자들이라고 소외당한 모든 사람들 역시 온전한 사람임을 잊지말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