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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거나 반짝이는> 책 표지
ⓒ 정신세계사
한 사람이 있다. 청소년기에 클래식에 미쳐서 입장권도 없이 무작정 음악회장으로 달려가는가 하면 원하는 음반 한 장을 사려고 한 달 정도 차비를 아낀다고 터덜터덜 걸어서 다닌다. 결국 그 소년은 음악을 전공하게 되고 비록 연주가로서 발전하지 못했지만 대학 졸업 후 음반회사에 취직해 역시 클래식 음반을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드문 일도 아니다. 지금 사오십 대 중년들 속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다르다. 음반회사를 나온 그 사람은 국내에서 알아주는 잡지에 들어가 클래식과 재즈 평론으로 이름을 날린다. 이쯤 되면 그 사람의 귀는 충분히 절차탁마를 거친 것으로 인정해줄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작 그런 수십 년의 삶을 깡그리 부정하는 것이다. 단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아니 제3국에서 겪은 경험을 통해 대부분 나라에서 벌어지는 인식에 대해 상당히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서양 오케스트라는 식민지 건설이라는 제국주의적 이념 하에서 자란 음향구조이기에 절대 권력을 지닌 지휘자와 그의 요구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식민지 건설은 착취를 위한 것이고, 착취를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 했고,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병사들의 움직이 필요했다. 이런 그들의 사고방식이 서양 오케스트라에 반영되고 있다"(본문 중에서)

음악계에서 김진묵이란 이름은 꽤 널리 알려져 있다. 클래식, 특히 재즈 평론에는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그는 탁월한 국악평론가기도 하다. 특히 산조라는 전통음악에서는 최신 양식에 깊이 빠져 있다. 국악을 전공한 국악평론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김진묵씨는 세계음악의 좀 더 넓은 틀 속에서, 더불어 명상과 유희라는 사뭇 이질적인 두 가지 철학적 전제 속에서 국악에 다가선다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음악은 참으로 다양하다. 20세기 중반까지 세계를 지배한 서구중심의 음악을 벗어나 지구촌 곳곳의 민족음악들을 모두 망라한다면 그 수를 모두 헤아리기도 어렵고, 그 모든 음악을 듣기란 아직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어쨌거나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서구중심에서 벗어나 문화다양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도 서구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경제적으로는 중심국가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해도 하등 무리없을 한국의 경우만 해도 자국의 음악은 여전히 소수의 음악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처한 여러 가지 처지가 대단히 미묘해서 자국의 것을 무조건적으로 주장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 세계화도 결코 해결이 될 수 없는 딜레마 속에서 결코 멈추지 않지만 한국음악은 보존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속에 김진묵씨가 제안하는 까보니즘은 마치 외래어같은 어감은 있지만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그 뜻은 간단하다. 그 스스로 밝히기를 '까분다'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한다. 산조 혹은 시나위 등 자유분방한 양식 속에서 최고의 연주를 표현하는 말 중에 '장단을 갖고 논다'라는 표현이 있다. 워낙 작곡이란 개념이 없는 우리 음악이고 보면 '논다'는 연주가가 음악보다 위에 오르는 꿈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논다와 까분다, 그 사이를 쉽게 연결지을 수 있다면 김진묵씨가 제안하는 까보니즘이 일리 있음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음악이 여러 이유에 의해서 제도교육화 되면서 '노는 연주'를 접하기란 대단히 어려워졌으나 아직 그것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 중 하나가 김진묵씨이다. 그가 그의 자전적 에세이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우리 조상들이 세상에 없는 음악을 만들었으니 그것을 그대로는 아니되 거기에 담긴 우수한 정신과 멋은 고스란히 담아가야 한다는 것쯤으로 해석된다.

▲ 김진묵
ⓒ 김기
딱히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의 걸작으로 꼽히는 '미궁'의 제작 현장에도 그가 서있었다. 물론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품가치를 매길 수 없는 '미궁' 때문에 김씨의 거취가 미궁에 빠질 뻔도 했지만,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그랬듯이 '미궁'은 20년쯤 지나서 국내 창작곡 중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어쩌면 지금 제도음악계가 주목하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그의 고독한 외침(까보니즘)이 또 다른 '미궁'이 되어 20년 혹은 훨씬 더 이후라도 한국음악의 또 다른 지평이 되어줄 수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기존의 애국가가 재미없다며 차라리 신중현이 만든 '아름다운 강산'으로 바꾸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엉뚱한 주장도 이 책에는 들어 있다.

그는 현재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데, 그의 춘천집은 하기 좋은 말로 전원주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의 춘천집은 그런 호사스러운 개념을 갖다 붙이기에는 무리다. 그가 어떻게 그 집을 준비하고, 짓고, 생활하는지도 이 책 부록에 상세히 밝히고 있다. 그의 춘천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퇴비를 위해 옛 방식대로 똥을 누고 산다.

그가 책제목으로 정한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말이'흔들리거나 반짝이거나'인 것처럼 그는 처음 농부가 되고 싶다가 음악가로 행로를 바꾸었고, 그냥 그렇게 클래식이나 재즈 평론으로 이름도 얻었고 그대로면 적당히 교수 자리 하나 굳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형성해준 음악이 싫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외부로 과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투쟁이었다. 그래서 어리석다.

라즈니쉬는 지혜는 어리석음을 먹고 산다고 했는데 음악평론가 아니 '까보니스트' 김진묵은 어리석음을 먹고 어쩌면 진정으로 지혜로운 음악의 미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흔들리거나 반짝이는 - 음악평론가 김진묵 에세이

김진묵 지음, 정신세계사(2007)


#까보니즘#김진묵#클래식#미궁#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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