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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녘 소리도 등대
ⓒ 김준

▲ 당사도 등대
ⓒ 완도군
코를 씰룩거리며 동백 숲 터널을 지났다. 잠깐 하늘이 얼굴을 내밀더니 다시 숲 터널로 이어진다. 여수에서 배를 타고 두 시간, 먼 바다에 하얀 집을 짓고 사는 소리도 등대, 하늘과 바다 경계마저도 모호해져버린 공간속에서 출렁이는 파도를 벗 삼아 떠다니는 고기잡이 배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고개를 넘자 10여 채의 작은 집들과 주인을 잃고 텃밭으로 변한 집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을 가로질러 전봇대가 쫓기듯 숲 속으로 달아난다. 옆으로는 끝없이 바다가 펼쳐진다. 전봇대를 따라 논두렁과 솔밭을 지나 동백숲길을 뚫고 갔더니 새하얀 등대가 나타났다.

이생진 시인은 소리도 등대를 이렇게 노래했다.

언제부턴가 등대로 가는 버릇이 생겼다
왜 그럴까 등대는 혼자살기 때문에

"등대로 가는 길은 어느 길이죠?"
덕포마을 돌담집에서 물어보면
"전신주 따라가시오 전신주도 그리가오"
논두렁 지나 솔밭을 넘어
검은 동백숲길을 뚫고 가면
하얀 집, 그 집이 내 집 같은데 아무도 없다
솔밭에서 날아온 새 한 마리 그밖엔
아무도 없다.

- 등대가는 길, 이생진


등대가 밝힌 길에는 어김없이 일제의 수탈이

▲ 소리도 등대로 가는 길에 만난 덕포마을.
ⓒ 김준
지금은 작은 배도 바닷길을 안내하는 기계를 달고 운항을 한다. 이전 뱃사람들은 오직 선장의 경험과 육감에 목숨을 의지해야 했다. 육지처럼 교통표지판을 달 수 없는 바다에서 가장 큰 의지가 되었던 것이 섬·곶·항만, 좁은 수로 등에 설치된 등대였다.

등대는 빛, 나팔이나 종을 이용한 소리, 전파, 모양 등으로 항로를 안내한다. 모양은 굴뚝모양의 구조물에 등룡을 얹고 내부에 등광을 설치해 선박을 안내한다. 등대는 지킴이가 있는 43기의 유인등대와 519기의 무인등대가 있다.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등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 시기다. 물론 '근대'라는 이름의 것들이 그렇듯, 등대도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진 것이 아니다. 청일전쟁기에 작전상 필요에 의해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서 등대가 필요한 곳을 조사하고, 러일전쟁을 위해 본격 추진되었다.

결국 1903년 팔미도를 시작으로 부도(1904)·거문도(1905)·우도(1906)·호미곶(1908)·말도(1908)·소리도(1910)·어청도(1912)·마라도(1915) 등의 섬에 등대가 만들어진다.

대한제국 시기 농상공부 공무아문에 등대국을 설치하고, 일제말기에는 교통부 해수과에서 등대를 관리했다. 해방후 해무청 시설국에서, 이후 해운국·해운항만청을 거쳐 지금은 해양수산부 아래 지방해양수산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 포항의 호미곶 등대
ⓒ 김준
호미곶 등대의 경우 일본이 자국의 수산실업학교 실습선이 침몰한 것을 계기로 대한제국에 강요하여 설치했다.

철길이나 도로가 근대의 상징이며 일제강점기 수탈 길인 것과 마찬가지로, 등대 또한 그렇다. 그 길이 닿는 곳은 어김없이 인천·군산·목포 등 포구가 자리하고 등대가 있다.

밤에는 불을 밝히거나 소리를 내어 길을 안내하는 등대는 평화로움의 상징이지만 호미곶처럼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도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유인등대 43기, 무인등대 519기가 있다. 전남북에는 군산권에 2개소, 여수권에 4개소, 목포와 신안권에 10개소가 배치되어 있다. 전북지역의 말도와 어청도의 등대는 군산항으로 드나드는 배들을 안내하는 길목이지만, 일본의 대륙진출의 야망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1909년 자지도 '등대지기 살해사건'

▲ 제주 우도 등대
ⓒ 김준
당시 등대는 그 자체를 일본제국주의 상징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제주에서 전라남도로 들어오는 길목 당사도에 1909년 불을 밝힌 등대가 있다.

'항문도(港門島)'라 했다가 어감이 좋지 않아 바꾼 지명이 하필 '자지도(者只島)'였다. 다시 바꾼 지명이 오늘날의 '당사도(唐寺島)'다. 이 지명은 옛날 당나라와 무역할 때 이곳에 기항(寄港)하면서 무사고를 빌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라지만 어민들은 지금도 '자지도'라고 부른다.

지명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이곳에 세워진 항일전적비와 일제가 만든 조난기념비이다. 1997년 세운 항일기념비에는 '동학군 이준하 선생 등 의병 5~6명이 1909년 2월 등대를 습격하여 등대지기 4명을 살해했다. 일제는 이에 피살된 일본을 위해 1910년 조난기념비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은 이후 1920년대 완도 소안도의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800여 명의 전 주민이 일제의 감시를 받을 만큼 항일운동이 거셌던 작은 섬 소안도의 항일운동은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전면에 소개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항일운동의 지도자들이 옥에 갇히자 마을 사람들이 이불을 덮지 않고 자면서 고통을 함께 느낄 만큼 항일의식이 강했다.

주민들 중 자료로 확인된 관련자만 88명이며, 사회주의 색채 때문에 항일운동을 인정받지 못하다 최근 이들 중 20명이 항일운동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조난기념비는 1990년대 누군가에 의해 파괴되었고, 옆에 1997년 항일기념비가 세워졌다.

작은 섬에 새긴 근대의 생채기를 한풀이 대상으로만 취급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것은 등대 기능에 갇혀보지 못한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읽을 수 있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등대를 지키는 사람은 '등대지기'를 싫어한다

▲ 소리도 등대를 지키는 최홍래씨.
ⓒ 김준
등대를 지키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등대지기'다. 공식적인 직업명칭은 '항로표지원'이다. 육지사람들에게 동심과 평화로움의 의미가 '차별'과 '소외'로 바뀐 것일까. 어렸을 때 불러보고 아이들에게 들려줬음직한 동요를 들어보자.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자고
한 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항로표지원은 2교대로 12시간씩 아흐레 일하고 나흘을 쉰다. 태풍이나 폭풍우로 경보나 주의보라도 내릴라치면 교대근무도 별 의미가 없다. 소리도 등대는 3명이 근무한다. 거문도가 고향인 20대 후반의 최홍래씨가 막내다. 남들이 가는 대학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고등학교 졸업 후 항로표지원으로 취업을 했다.

모두들 도시로 나가 젊음을 만끽할 나이에 바다와 등대와 대화를 해야 했다. 어린 시절을 바다에서 자랐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후회를 해본 적도 없다.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에 모처럼 일요일 늦잠을 포기해야 했다. 최씨를 제외한 직원들이 여수로 나갔다가 바람 탓에 들어오지 못하고 혼자서 하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섬사람들이 그렇듯 이들에게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바람이다.

그동안 거문도·백야도·오동도를 거쳐 소리도 등대에 전입신고를 한 것이 이제 겨우 두어 달. 사실 최씨가 등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등대가 최씨를 돌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소리도 등대에는 모두 4채의 관사가 있다. 모두 각자 먹고 자는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대부분의 유인 등대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독립된 생활을 해야 한다. 간혹 가족들이나 등대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찾기도 하지만 대부분 파도소리에 아침을 맞고 바람소리를 자장가삼아 잠을 청한다. 오늘 여수로 나가 거문도행 배를 타고 다시 섬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가슴이 설렌다. 그 곳에는 부모님과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 안개가 많거나 날씨가 좋지 않을 때 나팔이나 종 등 소리로 신호를 보낸다.
ⓒ 김준
최근 등대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본격적인 체험프로그램을 위해서는 갖춰야 할 것들이 많지만, 일부 등대는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숙박이 허용되는 '등대체험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소록도 등대·울산 울기등대·영산포 등대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소매물도 등대 섬이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와 부산 가덕도 등대는 지방유형문화재로, 포항 호미곶 등대는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등대는 인근 지역 바다와 섬의 자연경관·역사 문화자원· 바닷길과 연계된 다도해의 관광자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저널(2007.7)>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등대, #소리도, #이생진 시인, #항로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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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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