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 길을 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난 꽤 오래 걸어온 셈이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아무런 흔적도 없다. 이제껏 일상에 매몰된 타성의 길, 맹목에 의지해 갈 수 있는 쉬운 길만을 골라 걸어온 탓이다.
아무리 힘주어 내디딘들 내 발바닥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결국 허공이었다. 어쩌면 허공에 매단 줄을 타야만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어름사니가 내 전생이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걷는 족족 무가 되고 마는 도로아미타불의 길을 걸어왔을지라도 오늘도 나는 길을 향한 걸음을 멈출 수 없다. 걷는다는 행위는 살아있는 자의 의무이자 권리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나온 길에 이정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길을 잘못 들 수 있다는 경고가 수시로 나타나서 어리석은 나를 깨우치곤 했다. 그러나 그 경계(警戒)를 잘못 읽거나 때론 무시함으로써 오래도록 허튼 길에서 헤맸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정표를 오독했다는 부끄러움을 합리화하려고 곧잘 '숙명'을 들먹이는 버릇이 있다. 고백하건대, 내가 허튼 길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헤맨 것은 결코 숙명이 아니었다. 내가 걷는 길에 대한 온전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길이란 시간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걸어야 할 길이란 미래의 다른 이름이다. 길은 걸은 만큼 켜켜이 쌓여 가면서 서서히 역사가 된다. 난 어떤 이념이나 사랑에조차도 순교하지 못한 채 길 위에서 생을 허비해 버렸다.
그 잔혹한 대가일까. 난 지금 황혼이 안겨주는 달착지근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있다. 오류로 얼룩진 길도 길이라는 식의 아전인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 비뚤어진 감정이 바로 내 의식이 두르고 있는 깁고 기운 넝마이다.
최근 나의 길들은 잠잠하다. 불면으로 몸을 뒤채거나 열망으로 몸살을 앓지도 않는다. 나는 솔직히 이 평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은 자꾸만 지평선 너머를 동동거리지만 내 다리는 제자리 뛰기를 계속할 뿐이다. 길을 간다는 것은 무기력증과 싸운다는 뜻이다.
삶의 길을 걸으면서 아무 걸림돌 없이 살았다는 것은 생각 없이 살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나는 살아가는 길에 많은 걸림돌이 있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가끔은 걸림돌이 있기를 희망한다. 부디 걸림돌이 내 일상의 무사안일을 산산하게 깨트리는 유쾌함으로 작용하기를.
길은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담긴 잡동사니 감정을 날려 보낸다. 길은 사제이다. 나그네들의 온갖 고해성사를 듣고 나서 치유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천주교 절두산 순교 성지 고해소엔 "중요한 것만 짧게 간추려 고해하시오"라고 쓰여 있다고 하지만 산길은 걷는 사람이 시시콜콜한 것까지 고백하도록 참고 기다려준다. 길은 보채는 법이 없다. 그것이 길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한때는 나도 비틀스를 애호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영혼의 오솔길을 걸어본 적이 있다는 뜻이다. 나도 한때는 단테의 베아트리체 같은 소녀를 흠모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불가능한 꿈길이 안겨주는 쓰디쓴 굴욕을 맛보았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때로는 어디에도 깃들지 않는 바람의 길을 좋아했던 적도 있으며 때로는 덤덤하게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길을 따라가다 길을 잃은 적도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진흙 구덩이의 길 혹은 구절양장의 길에서 빠져나오기도 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은 차차 개고 내일은 또다시 비가 올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내일 까지는 우산 없이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아주 작은 낙관이 내가 가진 희망의 모든 것이다. 희망은 근거가 모호하지만 절망은 근거가 확실하다. 근거가 확실한 감정일수록 고통을 수반한다.
구절사까지의 산길 4.1Km는 물기 머금고 파릇파릇한 초록이 싱그러운 길이다. 산길을 걷다보면 내 마음도 어느덧 짙은 녹음으로 우거진다. 나뭇잎과 내가 이루는 일체감이야말로 산길이 나를 끌어들이는 매혹의 원천이다.
기우귀가는 불교의 십우도 중 6번째 단계이다. 내 비록 깨달음은 크게 얻지 못했으나 오늘은 이만하면 흰 소 등에 올라타고 피리를 불면서 집으로 돌아가도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