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롬보 산장에서의 하룻밤은 정말 추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나라에서 온 산악회원들이 사골국물에 밥을 넣은 사골국밥을 줘서 맛있게 먹었다. 얼마 만에 맛보는 우리 음식인가. 거의 한달 만에 처음으로 우리 음식을 먹으니 힘이 저절로 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오전 8시 일찍 출발했다. 마지막 산장인 키보(Kibo)로 가는 날이다. 왼쪽 계곡을 따라 세네시오 무리가 늘어서 있는 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1시간 정도 오르자 작은 나무도 보이지 않고 풀도 찾을 수 없는 고산 사막지대가 펼쳐졌다. 작은 바위와 황량한 흙만이 보인다. 킬리만자로 산은 바로 코앞에서 우뚝 솟아 있는데, 가도 가도 좁혀지지를 않는다. 킬리만자로는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산이다.
이제부터는 자신과의 싸움일 뿐이다. 저 멀리 킬리만자로의 하얀 봉우리만이 등대 역할을 할 뿐 그 무엇도 나침반이 되어 주지 않는다. 나의 가빠지는 숨소리만이 들린다. 온통 삭막한 침묵만이 흐른다. 자연으로부터 침묵을 배운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어 하면서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것일까. 정상에 있는 자유가 그리운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로부터의 구속이 두려운 것인가. 분명한 것은 아프리카는 자유를 찾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구속이 두려운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프리카이다.
오랜 침묵의 등정에서 나타나는 돌연변이는 '얼룩말 바위(Zebra Rock)'이다. 바위 표면에 검은색과 하얀색의 줄무늬 같은 모양이 새겨진 것이 얼룩말 모양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정말로 사람이 일부러 얼룩말 무늬를 바위 표면에 그린 것처럼 비슷하다. 실제는 검은색의 화산암 바위에 빗물이 흘러 내려가면서 하얀색의 흔적을 남기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키보로부터 주걱으로 얻어맞아 절벽 산이 된 마웬지 봉우리
얼룩말 바위를 조금 지나면 '마지막 샘터(Last Water Point)' 라는 팻말이 보인다. 그 이후로는 아예 물이 없는 완전 사막지대라는 표시이다. 옆에는 나무로 된 간이 의자도 만들어져 있어 등산객들에게 쉬어 가도록 권한다.
오른쪽으로는 5149m의 마웬지(Mawenzi)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킬리만자로 제2 봉우리인 마웬지는 생김새부터가 울퉁불퉁하고 험한 바위산이다. 가파르다보니 암벽 등반 전문가가 아니면 오르기가 쉽지 않은 산이다. 마웬지가 험한 절벽의 바위산으로 변한 것은 게으른 마웬지가 불씨를 늘 꺼뜨린 뒤 빌리러오자 형인 키보가 화가 나 주걱으로 내리쳤기 때문이라는 설화가 이곳 차가 부족사이에 내려오고 있다.
마웬지 산을 뒤로 하고 다시 키보 봉우리가 있는 키보 산장으로 오른다. 마웬지 봉우리에서 키보 봉우리까지는 11km 정도 떨어졌는데, 그 사이는 말의 안장처럼 가운데가 움푹 팬 모양을 했다고 하여 '안장 산등성이(The Saddle)'라고 부른다.
3시간 정도 걸어 간이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팻말에는 키보 산장까지는 1.48km가 남아있고, 호롬보 산장으로부터는 7.8km나 떨어져 있다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키보 산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팻말을 보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킬리만자로 산에서 만난 <황금사과> 작가 김운경
다시 출발해 안장 산등성이를 계속 걷는데, 조그만 바위 위에 일본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걸터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인으로 생각했던 등산객이 우리말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니, 여기 웬 일이십니까."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나 누군지 모르세요."
"아, 김운경 선생님 아니십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을 킬리만자로 정상 바로 아래에서 만났다. 아프리카 여행 오기 전 내가 좋아했던 텔레비전 드라마 <황금사과>를 쓴 작가 김운경씨였다. 설마 우리나라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데다 김씨가 선글라스를 써서 몰라봤던 것이다.
"아 그런데, 김 선생님, 그 <황금사과>는 왜 아역시절 연기를 갑자기 줄이고 성인 연기로 바로 넘어 갔나요"
"그럴 사정이 있었습니다."
"아역시절 연기가 내가 자라던 시골 상황과 비슷해 드라마에 푹 빠졌었는데, 갑자기 성인 연기로 옮기면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나는 킬리만자로 산에서도 드라마 <황금사과>에서 아역 연기가 대폭 줄어들면서 드라마가 일찍 종영하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놓고 있었다. 나는 김씨가 왜 킬리만자로에 왔는지 보다는 드라마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김씨 입장에서는 황당했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했고 평소 <옥이이모><서울의 달><형> 등 김씨의 서민적이고 소탈한 드라마를 워낙 즐겨 보았던 팬이기 때문이다.
평소 산을 좋아한다는 김씨는 딸과 함께 산악회원들의 단체 등반에 같이 왔다고 한다. 우리는 마웬지 봉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나는 키보 산장으로 올라갔고, 김씨는 호롬보 산장을 향해 내려갔다. 김씨는 내려가면서 정상 등반할 때 먹으라고 내 주머니에 무언가를 잔뜩 넣었다. 땅콩과 캐러멜, 초콜릿 사탕이었다.
마지막 키보 산장에 도착하니 고산증이 나타나고...
키보 산장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산소부족과 호흡 곤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무런 증상이 없던 고산병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고산병을 줄이는 데는 물을 많이 마시고 소변을 자주 보는 것이 좋다고 하여 가능한 자주 물을 마셨다.
키보 산장으로 오르는 길에서는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의 인사말도 달라졌다. 올라가는 사람은 여전히 "잠보"라고 하지만 내려오는 사람은 "굿 럭(행운을 빈다)"이라고 말한다. 우후루 정상에 오르는 행운을 누리라는 뜻이다.
그나마 오르는 높이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킬리만자로 산의 모습이 지루함을 달래주고 있었다. 마웬지 봉을 지나면서 쭉 평평한 고산 사막지대를 걷다보니 드디어 마지막 산장인 해발 4700m의 키보 산장에 도착했다. 그때가 오후 1시 30분. 호롬보 산장에서 올라오는 데 5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키보 산장에서는 12명이 묵는 방에 배정되었는데, 유럽과 미국 등에서 온 등산객들이 미리 차지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웠는데, 두통증상이 오기 시작했다. 다른 등산객들도 고산병으로 침대에 누워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구토 증상을 보이는 사람도 있고, 설사 때문에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사람도 많았다.
미국에서 온 젊은 남자는 여자 친구가 심한 두통으로 고생하자 그 옆에서 간호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호롬보 산장과 달리 키보 산장에는 고산병 환자투성이었다. 두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의 집단수용소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두통이 심하면 언제든지 바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키보 산장까지 온 것만 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는 침대에 누워 낮잠을 청했다. 오후 5시쯤 저녁을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설사 기운도 있었으나 그리 심하지 않아 다행이었고, 두통 증상도 처음보다 많이 나아졌다. 가이드인 제임스는 "밤 11시쯤 우후루 정상 등반에 나설 것"이라며 나에게 충분히 자둘 것을 당부했다.
달빛이 인도하는 우후루 정상 등정에 나서다
우후루 정상 등반은 정확히 밤 11시께 시작되었다. 가이드 제임스가 앞장서고 나는 바로 뒤를 쫓았다. 우리가 제일 먼저 출발하는 듯 앞에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두운 키보 산장을 떠나 평지를 가는 듯싶더니 갑자기 오르막길을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바위부스러기 산을 오르는지 자꾸 발이 미끄러진다. 당연히 오르는데 힘이 든다. 보름달 같이 둥근 달이 환하게 비춰 플래시 없이도 어두운 길을 오르는 데는 거의 지장이 없었다. 출발할 때 달은 마웬지 쪽에서 우후루 쪽을 비추고 있었다. 1시간 정도 오른 뒤 뒤를 보니 산 밑으로 머리등을 달고 산을 올라오는 등산객들의 빛줄기가 하나의 줄처럼 이어져 있었다.
설상가상. 마랑구 게이트에서 빌린 등산용 지팡이가 부러져 버렸다. 지팡이가 없으니 화산재 부스러기에 밀려나는 발을 지탱해줄 버팀목이 사라졌다. 발이 밀리자 힘이 몇 배가 든다. 산도 오를수록 급경사였다.
가이드인 제임스는 다람쥐가 나무에 오르듯 산 위를 마치 날아다니듯 올라간다. 721번째 산을 오른다니 어두운 밤에도 지형이 눈에 선한 것이다. 제임스는 계속해서 나에게 "뽈레 뽈레"를 외친다. '뽈레 뽈레'는 우후루 정상을 오르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조금 지나자 5명의 등산객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점점 체력에서 밀리는 것이다.3~4시간 정도 오른 것 같은데도 정상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줄 몰랐다. 그나마 나를 위로하는 것은 키보 산장에서 느꼈던 고산증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르는데도 많이 사라졌다는 것. 두통이나 호흡곤란은 사라지고 대신 약간의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길만스 포인트에서 우후루 정상으로 가는 길
마웬지 쪽에서 우리의 뒤를 비추던 달은 어느덧 우후루 정상 쪽으로 옮겨 와 우리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한참을 오르고 바위틈을 지나 올라가자 길만스 포인트(Killman's Point) 팻말이 보였다. 분화구의 아래쪽 가장자리인 해발 5685m에 이른 것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쉬지 않고 6시간이나 걸어온 것이다. 유럽 등산객 7~8명이 이미 길만스 포인트 팻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길만스 포인트에서 서쪽 아래쪽으로 바로 표범의 장소인 레오퍼드 포인트((Leopard's Point)가 있다.
나는 너무 피곤해 길만스 포인트에서 사진을 찍으며 조금 쉬어 가려 했다. 가이드 제임스는 "우후루 정상까지 안 갈 거냐"며 바위에 앉으려는 나를 재촉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밤사이에 6시간 이란 오랜 시간을 쉬지 않고 걷고 애초 킬리만자로 등반이 나의 여행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길만스 포인트에 만족하려 했다.
더욱이 길만스 포인트에 오르자 졸음이 아예 잠으로 몰려와 도저히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다. 아니, 더 이상 오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이 옳다. 길만스 포인트부터 고산증이 심해지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길만스 포인트에서 우후루 정상까지 가는 길은 높은 해발고도로 산소량이 해수면의 절반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길만스 포인트에서 우후루 정상까지는 높이는 200여m 차이 밖에 나지 않지만 거리로는 2km나 되어 빠른 걸음으로도 1시간 30분 정도 더 올라가야 한다. 제임스의 재촉에 못 이겨 나는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대부분의 가이드는 귀찮아서 중도에 하산하자고 한다는데, 제임스는 달랐다. 어떻게든 나를 정상으로 이끌려고 했다.
내가 졸음을 참지 못해 중간 중간에 쉬자 제임스는 "여기까지 와서 우후루 정상을 포기할 것이냐"며 이제는 나의 손목을 잡고 앞에서 잡아끌었다. 구름이 산 아래 걸쳐 있어 길만스 포인트에서 정상까지 가는 길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마침내 만년설의 우후루 정상에 오르다
길만스 포인트에서 조금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커다란 분화구가 보였다. 조금 더 오르자 하얀 눈이 등산로 옆에 여기저기 조금씩 쌓여 있었다. 나는 장갑을 벗어 맨손으로 눈을 만져 두 손을 비볐다. 아프리카에 와서 눈을 만져 보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졸음이 확 가시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화구 가장자리의 바위틈을 지나고 굽잇길을 따라 1시간 30분 정도 오르자 하얀 빙하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침 6시30분. 만년설에 덮인 킬리만자로의 정상인 우후루에 마침내 오른 것이다. 먼저 오른 5~6명의 등산객이 우후루 정상 표지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킬리만자로 정상에 있는 나무 표지판에는 "당신은 지금 5895m 우후루 정상에 서 있다"며 "아프리카의 최고봉이자 세계 최고 독립산(단일산)이며 세계 최대 화산 중 하나"라고 우후루 정상을 소개하고 있었다. 우후루(Uhuru) 자체가 스와힐리어로 '자유 또는 독립'이란 뜻으로 킬리만자로는 1960년대 아프리카 독립의 상징이었다.
나는 정말 우후루 정상에 올랐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표지판 뒤로는 지름 2.4km의 커다란 분화구가 보이고, 그 분화구는 다시 화산재로 덮인 작은 분화구를 품고 있었다. 분화구 안에도 곳곳에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표지판 앞으로는 하얀 광경이 펼쳐졌다. 만년설과 얼음덩어리인 빙하의 절벽이 아름다운 하얀 성을 이루고 있었다. 호롬보 산장에서부터 나를 올라오라 유혹하던 하얀 눈과 빙하는 킬리만자로의 다른 검은 산과는 독립된 성이었다. 우후루 정상에서 보이는 빙하는 킬리만자로 산의 남부 빙하지역이다. 적도 부근에 이런 만년설이 있다는 것은 정말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다.
킬리만자로의 해돋이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붉게 물들인다
하얀 설경에 빠져 있는데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붉은 햇살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둥근 해가 떠오르는 해돋이의 장관이다. 검은 구름선 아래에서 솟아 올라오는 해는 마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쇳덩이다.
해가 점점 떠오르면서 병풍 역할을 하던 하얀 구름도 붉은 띠로 변한다. 검은 구름은 점점 붉은 물감에 빨려들듯 푸른색을 거쳐 하얀색을 지나 빨간색으로 변해갔다.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몽골의 초원에서 바라보는 지평선 너머의 해돋이나 에티오피아 타나 호수의 수평선으로 올라오는 해돋이와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땅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해돋이와 하늘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해돋이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하늘 위의 구름 선을 넘어 올라오는 킬리만자로의 해돋이는 아프리카 전체를 비추는 횃불처럼 타올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해가 솟으면서 구름과 정상의 하얀 눈, 빙하가 빚어내는 오묘한 조화이다. 마치 갑자기 하늘에 무지개가 뜬 것처럼 다양한 색상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저 멀리 떨어져 있던 구름이 정상의 하얀 눈과 맞닿아 푸르고 하얀 바다로 변하더니, 빙하는 바다에 떠 있는 얼음덩어리로 순식간에 변해 있었다. 햇살이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에 비추면서 헤밍웨이가 묘사했던 바로 그 빙하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 세계만큼 넓고 거대하며 높은 그리고 햇빛을 받아 믿을 수 없으리만큼 새하얀 킬리만자로의 네모진 봉우리가 내 눈앞에 다가왔다."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은 매일 아침 햇살을 받을 때마다 더욱 빛나고 하얗게 변한다.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맛 볼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인 해돋이를 보니 그동안 며칠 동안 고생하면서 올라왔던 피로가 씻겨나가는 듯 했다. 키보 산장에서 한 밤중에 출발하는 것도 바로 우후루 정상에서 아침 해를 보기 위한 것이다.
정상에는 표범의 시체 대신 희망이 있었다
나도 우후루 표지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가이드 제임스가 "평생의 추억이 될 것"이라며 여러 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제임스와도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뒤로는 붉은 해가 멋진 배경으로 비추고 있었다.
붉은 해가 구름 선을 넘어 올라오면서 해돋이가 끝나자 등산객들도 하나 둘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오면서는 올라올 때 보지 못했던 킬리만자로의 아기자기한 모습들도 눈에 들어왔다. 햇살로 대낮처럼 환하게 밝은데다 정상 등정의 만족감으로 여유가 생기니 시야가 넓어 진 것이다.
내려오면서 나는 안쪽의 분화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넓은 분화구 안에는 여기저기 눈이 쌓여 있는 곳도 있지만, 많은 부분은 눈이 녹아 검은 화산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최근 미국의 학자들이 현재 두께 50m인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이 2020년에는 사라질 것이라는 경고가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만 1700여 년 전에 처음으로 형성된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이 불과 20년도 안되어 사라질 운명에 놓인 셈이다. 지구 온난화는 땅 위의 문제만이 아니라 킬리만자로 정상에도 재앙을 불러 오고 있었다.
우후루 정상에도 길만스 포인트에도, 심지어 표범이 발견되었다던 레오퍼드 포인트 어디에도 헤밍웨이가 말하던 표범은 물론 없었다. 헤밍웨이는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죽어갔다는 표범의 시체 이야기를 통해 인생을 되돌아보는 소재로 삼았을 뿐이다.
그러나 헤밍웨이가 진짜 찾고자 했던 희망과 행복이 표범의 시체 대신 킬리만자로 정상에 빛나고 있었다.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의 끝머리에는 부상당해 죽어가는 주인공을 태운 비행기가 아루샤로 가지 않고 킬리만자로 정상을 향해 날아간다.
주인공 눈에 만년설이 쌓인 킬리만자로 정상이 들어온다. "그는 그 순간 자기가 가려는 데가 그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 헤밍웨이는 말한다. 표범의 시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과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일 뿐이며, 정작 헤밍웨이가 찾고자 했던 것은 킬리만자로 정상의 만년설을 통해 다시 새로운 인생에 대한 희망과 행복이었던 것이다.
하산하면서 느끼는 가이드의 중요성
정상에서 내려오는 데 많은 등산객들이 이제야 길만스 포인트에서 우후루 정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어제 밤에 올라왔던 길을 내려가는데 계곡이 그렇게 급경사 일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런 험한 계곡을 올라왔을까 싶을 정도이다.
키보 산장에 내려와 1시간 정도 쉰 뒤 다시 호롬보 산장까지 걸어서 내려가야 했다. 호롬보 산장으로 내려오다 뒤돌아서 킬리만자로 정상을 보니 하얀 눈이 덮인 만년설이 그대로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젠가 킬리만자로를 다시 찾을 때도 변함없이 저렇게 맞이하겠지.
나는 내려오면서 가이드 제임스에게 더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제임스가 용기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나중에는 나의 손목을 잡고 억지로 이끌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바라보는 저 킬리만자로의 정상에 결코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마랑구 게이트의 입구에 한스 마이어의 기념 구리판과 함께 가이드와 짐꾼들의 이름을 똑같이 새겨 넣은 이유를 알 것 같다. 등반에서 좋은 가이드를 만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킬리만자로는 경험 없는 가이드들이 등산객들에게 오히려 짜증을 내어 등정의 의욕을 꺾는 것으로 유명하다.
몸은 쇳덩이가 짓누르듯 무겁고, 다리는 휘청거릴 정도로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행복하다. 정상 등정 자체가 아니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지에 대한 뿌듯함이다. 애초부터 정상 정복이 목적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다음 언제든지 내려오겠다는 무욕의 자세와 서두르지 않고 제일 꼴찌로 오르겠다는 마음가짐이 오히려 정상에 이르게 했다. 킬리만자로는 나처럼 평범한 초보자가 별 어려움 없이 오르기도 하지만, 등산 전문가가 얕잡아 보았다가 실패하기도 하는 산이다.
호롬보 산장에서 하루를 묵은 뒤 다음날 아침 일찍 처음 출발했던 마랑구 게이트로 내려왔다. 마랑구 게이트 관리사무소에서 가이드 제임스의 보증으로 나는 "우후루 정상 등정 증명서"를 받았다. 증명서 번호는 '4507106'이고 옆에는 가이드 '제임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었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만난 젊은 의사가 나에게 자랑하던, 그리고 나를 킬리만자로로 이끌었던 바로 그 증명서(Certificate)이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배낭 속에 '킬리만자로 정상 등정 증명서'를 고이 간직했다. 가이드 제임스도 나의 아프리카 추억 속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