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을 포함하여 한국의 주요 문화유적지에서는 건물 입구에서 해태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과거 한반도에서 해태는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라고 여겨져 궁궐 등 주요 건축물의 장식품으로 사용되었다. 궁궐에서 화재가 빈번하게 발생한 왕조 시대의 고민거리를 반영하는 흔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중국에서는 주요 건물의 입구에서 해태 대신에 사자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돌사자(石獅)라고 불리는 사자 조형물이다.
한국의 해태에 비해 돌사자는 훨씬 더 사나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해태가 주로 문화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데 비해, 중국의 돌사자는 여러 가지 형태의 건축물에서 비교적 골고루 나타나고 있다.
베이징 정양문 입구의 돌사자는 과거에 중국을 방문하는 외국 사신들에게 제 나름대로는 눈을 부라리면서 위협적인 인상을 주려 했을 것이다. 자금성에서 천안문(텐안먼)과 모주석 기념관을 지나면 나오는 문이 바로 정양문이다.
베이징의 또 다른 관광지인 청화원의 주 건물인 공자청(工字廳) 입구에서도 돌사자를 만날 수 있다. 여전히 인상은 험악하기만 하다. 청화원은 청나라 황실의 정원이었으며, 오늘날의 칭화대학(청화대학) 구내에 소재하고 있다.
중국정부가 2006년부터 야심 차게 공개한 베이징 전문 박물관인 수도박물관(서우두박물관)에서도 돌사자들을 만날 수 있다. 베이징 시내에서 출토된 돌사자들이다.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원나라 때의 돌사자와, 조명발에 인상이 더욱 험악해 보이는 청나라 때의 돌사자가 인상적이다.
참고로, 1953년에 세워져 1981년에 외부에 개방된 수도박물관은 본래 공묘(쿵먀오)에 있었는데, 200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서 2006년부터 전시를 시작했다. 현재는 베이징 서쪽 시청구(區)의 지하철 1호선 무시디역 인근에 있다.
한편, 중국의 돌사자는 현대적인 건물에서도 만날 수 있다. 베이징대학의 한 가운데에 있는 도서관 입구를 지키는 것은 경비원들이 아니라 계단 위의 돌사자 두 마리다.
그리고 베이징 동쪽 차오양구(區)에 있는 중국공상은행 입구에서도 돌사자가 행인들을 노려보고 있다. 왜 우리 은행에 돈을 예금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듯이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이 건물 앞에 돌사자를 세우는 예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예술작품에도 돌사자는 빠지지 않고 있다. 지난 6월 26일부터 7월 16일까지 칭화대학 구내에서 열린 이 대학 미술학원의 졸업작품전에 나온 돌사자는 가만히 서 있는 다른 돌사자들과 달리 어디론가 날아갈 것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에서 본 바와 같이, 베이징 시내에서는 전통적인 건물이든 현대적인 건물이든 간에 돌사자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무심코 지나가는 대부분의 행인들은 돌사자를 보고서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겠지만, 이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저것 정말 무섭게 생겼구나’라고 느끼는 사람들을 하나씩 ‘건질’ 때마다 돌사자는 자신의 존재의의를 확인하지 않을까.
중국인들이 건물 입구에 돌사자를 세우는 이유는?
그럼, 중국인들이 건물 입구에 돌사자를 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화재를 보호하는 한편 외부 침입자들을 막을 수 있다는 오래된 관념 때문이다. 그 점은 한국의 해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한서>에 사자에 관한 기록이 나오기는 하지만 실제로 중국에서는 사자가 서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사자를 접하기 힘든데도, 중국인들이 사자에 관한 신앙을 바탕으로 돌사자를 세울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인들이 사자를 알게 된 데에는 불교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불교 신앙 중에는 문수보살이나 불보살이 불법을 전파할 때에 용맹한 사자를 타고 다녔다는 인식이 있다고 한다. 또 <전등록>이나 <능엄경> 같은 불교 경전에도 사자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불교를 매개로 사자의 용맹함을 알게 된 중국인들은 외부 침입자나 화재 등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돌사자를 입구에 배치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돌사자를 세우게 된 것은 비단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건축물의 미적 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목적 등도 작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본다면, 오늘날 중국의 건축물 앞에서 돌사자를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은 불교신앙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인들이 지금까지도 건축물 앞에 돌사자를 세우고 있으니, 중국사회에서 불교의 영향력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살아 있다는 점은, 현대 중국사회에 대한 한국인들의 고정관념 중 하나를 깨뜨리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현대 중국을 바라볼 때에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경제체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중국사회를 분석할 때에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획일적 잣대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다분히 과거의 군사정권이 냉전을 매개로 권력을 연장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결구도를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심어준 데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또 많은 한국인들은 모택동(마오저뚱)의 문화혁명으로 인해 중국에서 과거의 전통이 대부분 파괴되었을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어느 시대든 간에 새로 들어선 체제는 과거의 전통을 일정 정도 파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체적 맥락 속에서 보면, 그러한 파괴는 기존의 전통을 새로이 보충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사회주의적 시각에만 입각하여 현대 중국을 바라본다면, 중국사회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중관계에서 실패하는 원인이 될 것이다. 돌사자의 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교 등 전통 신앙이 중국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혹 이러한 질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현대 중국인들이 건물 앞에 돌사자를 세우는 것은 과거의 습관적 전통 때문일 것이다. 사회주의자인 그들이 불교 신앙을 알고서 그렇게 했겠느냐?”라고 말이다.
하지만, 설령 건축 설계자들이 불교 신앙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돌사자를 배치했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불교가 중국인들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증거가 된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일반 서민이나 건축 설계자들은 돌사자와 불교의 관련성에 대해 무감각할지 모르지만, 사회체제나 시스템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혹은 그것을 이끌고 있는 지식인이나 정치인들까지 그에 대해 무지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불교나 유교 등의 전통신앙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중국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건축물에서 돌사자를 제거하지 않는 것은 결국 불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건축물에서 돌사자를 대대적으로 제거하려면 뭔가 명분을 제시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민간의 불교신앙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에 민간의 불교 신자들이 표출할 저항에 대한 우려는 사회주의자들이 돌사자 등을 제거하는 데에 분명한 장애물이 될 것이다. 결국 중국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불교 신앙이 1949년 이후의 중국에서 돌사자 등을 보호하는 요소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1840년 아편전쟁 이후의 서구화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과거의 전통이 아직도 여전히 일정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서구화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과거의 전통으로 회귀하려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이 점은 사회주의체제를 선택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과 점차 긴밀해지고 있는 중국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가지려면, 돌사자의 예에서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현대 중국에 사회주의적 요소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요소가 아직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