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시내 서북쪽의 하이뎬구(區)에 유명한 원명원(웬밍웬)이 있다. 청나라 건륭제 때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황립 공원인 이곳은 훗날 제2차 아편전쟁 중인 1860년에 영·불 연합군에 의해 그 일부가 파괴되었다.
넓고 넓은 원명원 중에서 영·불 연합군이 파괴한 곳은 주로 유럽식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던 동문 부근이다. 이곳에 있던 서양루·해안당 등의 건물들이 서양 군대의 약탈·방화 등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
7월 23일에 오후 시간을 이용하여 이곳에 들러보았다. 원명원 입장료는 10위엔(1300원 정도)이지만, 파괴된 유적지를 보려면 15위엔(1950원 정도)을 더 내야 한다. 중국 유적지에서는 전체 입장료와 부분 입장료를 따로 받고 있다.
중국정부가 잘 가꿔서 그런지, 파괴된 유적지에서는 도리어 어떤 아름다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애절한 때문인지, 영·불 연합군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는 일종의 '파괴의 미'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떤 곡조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마치 가족 잃은 자가 외롭고 서글프게 고갯길을 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음악 소리였다. 그렇다고 완전한 좌절의 이미지를 주지도 않으면서, 나름대로 어떤 가슴 시린 비장미 같은 것마저 느끼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첫 번째 사진에서는 파괴된 서양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문으로 보이는 기둥과 뒤쪽 벽면의 기둥이 남아 있기 때문에 건물의 크기를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그림에 보이는 바와 같이, 기둥 몇 개만 제외하면 서양루는 완전히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치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조각품처럼 서양루가 제 나름의 완전미를 풍기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건물 잔해만 찍으려고 사람들이 비켜주기를 기다려 보았지만, 여느 중국 문화유적지에서 다 그러하듯이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대였다.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그런 기적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인구가 워낙 많은 나라인지라, 개장하자마자 유적지 안으로 달려 들어가지 않는 한 유적지 그대로의 모습을 촬영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국가 공권력이라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서양루에 사람들이 '달라붙은' 모습이 그런 대로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서양루가 풍기는 파괴의 미는 영·불 연합군과 중국정부의 합작품인지도 모른다. 영·불은 파괴를 담당하고 중국은 미적 승화를 담당했다고나 할까. 거기에다가, 건물에 '달라붙어' 꿈틀대는 방문객들은 폐허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서양루 옆에 있는 해안당도 형체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었다. 하지만 차곡차곡 쌓인 잔해에서 풍기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질서 있는 파괴 같았다.
이처럼 원명원 동쪽 구역에서 서양식 건축물들이 대대적으로 파괴되었지만, 딱 한 군데만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한 가운데에 서양식 정자를 두고 있는 황화진이 바로 그곳이다. 198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이곳만 예외적으로 복원된 것 같다.
그런데 황화진은 좀 특이한 곳이다. 다섯 번째 사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황화진 입구에서 정자까지 곧바로 갈 수는 없다. 여러 개의 담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미궁인 셈이다.
그래서 방문객들은 정자까지 가기 위해 미로를 한참이나 헤매는 수고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똑같은 길을 몇 번씩이나 되밟다가 중간에 주저앉아 쉬기도 한다.
황화진 입구에 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해마다 8월 15일이 되면 황제가 이곳의 정자에서 연회를 열어, 미로 밖에서 황제가 있는 곳까지 가장 먼저 도착하는 궁녀에게 상을 하사했다고 한다. 연회에 앞서 입장하는 황제를 수행하는 내관이 길을 얼른 찾지 못했다면, 그의 등골에는 얼마나 많은 식은땀이 흘렀을까.
미로 속을 헤매다 지친 방문객 중에는 정도(正道)를 버리고 아예 월담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곱 번째 사진에 나오는 어린 여자가 바로 그런 경우다. 치마 길이가 길지 않은데도 그는 주변 시선에 아랑곳없이 월담을 강행하고 있다. 이런 '궁녀'는 아무리 빨리 도착해도 황제의 하사품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가운데에 있는 정자에 도착한 뒤에, 다시 서양루 옆에 있는 원명원 전람관에 들어가 보았다. 입구에 '무료'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많은 경우 유적지 내의 건물마다 돈을 따로 받는 중국에서, 이런 안내 문구를 보면 횡재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고 전람관 안에는 특별히 볼 만한 게 없는 것 같다. 돌로 만든 물고기 형상이 좀 인상적인 게 특징적이라고나 할까. 혹 이 물고기는 서양루 앞 연못에 살다가 1860년 그날의 파괴를 피해 뭍으로 올라 숲 속에 숨어 있다가 그냥 그대로 굳어버린 것은 아닐까.
위와 같이 중국인들이 원명원의 폐허 현장을 정리하지 않고 원칙상 그대로 놔두는 것은 물론 관광수입을 올리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국민들에게 서양제국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서양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침탈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그들은 간판만 약간 바꿔, 세계화를 무기로 동아시아 등을 압박하고 있다. 외양만 바뀌었을 뿐, 동아시아 등을 경제적·문화적으로 침탈하려는 그들의 의도는 19세기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범죄자가 반성은커녕 도리어 재범을 노리고 있는데도, 동아시아인들은 서양제국주의자들에게 아직까지 별다른 응징을 가하지 않고 있다. 아니, 못하고 있다. 고작해야 서양의 대리인인 일본을 상대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사정이 여의치 않다.
제국주의 침략으로 생긴 아픔과 상처가 아직도 동아시아에 잔존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문제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는 그 역량이 아직 미약하여 서양열강에게 사과나 배상을 요구하기는커녕 그들이 주도하는 세계화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서양의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다.
한편, 미국·영국 등 서양열강은 일본에게만 사과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들의 범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1945년 이후 전승국 행세를 하면서 세계의 재판관으로 군림하고 있을 따름이다.
만약 동아시아의 경제력·군사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했다면, 그들이 과연 자신들의 범죄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든 동아시아인들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이처럼 동아시아가 아직도 서양의 사과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원명원의 파괴 현장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범인을 잡아 현장검증을 할 때까지 범죄현장을 정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서양 혹은 그 대리인의 제국주의 침략을 당한 한국·중국·베트남 같은 동아시아 국가의 경우에, '마음속 원명원'은 범인을 잡는 그날까지 사건 당일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