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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을 평생토록 괴롭히는 질병은 '창병(瘡病)'과 '각기병'이었다. 창병은 풍속이 문란했던 당나라에서 비롯된 병이라 하여 당창(唐瘡)이라고도 불리는 화류병이다.

현대 병리학적으로 말하면 임질, 매독과 같은 성병으로서 전염성이 강해 여자를 밝히는 사람들에게 복병처럼 뒤따라 다니는 질병이다. 606호나 페니실린 한방이면 끝. 소리가 나는 세균성 질병이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특효약이 없었다.

각기병(脚氣病)은 현대인들과 맥을 같이한다. 영양부족에서 오는 질병성 각기병과 류머티스성 관절염을 구분하지 못한 옛 사람들이 통틀어 각기병이라 불렀지만, 임금은 후자 쪽에 가깝다. 다리를 쓰지 않아서 생기는 병이다. 현대인들이 걷지 않아서 하체가 부실하듯이 옛날 군주는 걸을 일이 별로 없었다.

어의(御醫)의 극진한 치료를 받았지만 다리가 부실한 태종은 '통진현 사람, 전 내부소윤(內府少尹) 이방선이 각기병을 잘 고쳐 그가 지은 약 한 냥쭝만 먹으면 곧 낫습니다'고 아뢰는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신이 추천하는 약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각기병에는 많이 걷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터득한 태종이 이숙번을 불렀다.

"의정부(政府)에서 인주(仁州)·안산(安山)·부평(富平)·광주(廣州) 등지를 강무(講武)하는 장소로 삼도록 청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토질이 진흙이며 산과 골이 험하고 막혀서 달리고 쫓는 데 불편하고 또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어려움이 있으나 땅이 평탄하여 달리고 쫓기에 편리함이 철원만 못하다."

"광주가 좋습니다." 이숙번이 광주를 추천하자 우대언(右代言) 윤사수를 불렀다.

"네가 일찍이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으니 기내(畿內)의 주(州)·현(縣)을 모조리 다 순행하였을 것이다. 인주(仁州)의 부평(富平)이 광주(廣州)의 경안(慶安) 수곡(水谷)과의 거리가 몇 리(里)나 되느냐?"
"모두 하루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이번 행사가 백성들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지금의 거둥은 예전과 같지 아니합니다. 백성들이 이바지하는 것은 다만 꼴(芻藁)뿐이니 다른 폐는 없습니다. 다만 감사와 수령이 거둥하는 향방을 미리 알지 못하면 공억(供億)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가는 곳을 일찍이 정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금년에는 풍년이 들었으니 꼴을 준비하는데 철원 백성들이 괴로워하지 아니할 것이다. 나의 이번 행차를 도당(都堂)과 대간에서는 모두 옳지 못하다고 하나 옛 제왕들은 사냥하는데 일정한 장소가 있었으니 어찌 도성 가까운 곳에 원유(苑囿)를 설치하였겠는가? 반드시 백성들이 살지 아니하고 비어 있는 먼 땅을 골라서 만들었을 것이다. 강무를 파한 뒤에 철원에 사냥하고자 하니 미리 관리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라."

강무(講武) 장소가 결정되었다. 호군(護軍) 이자화를 보내 임강(臨江)·장단(長湍)·우봉(牛峰)·토산(兎山) 철원의 야산 산림(山林)을 불태워 강무를 준비했다.

사냥을 하려거든 사냥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군사를 동원한 강무 즉, 군사훈련 뒤에는 사냥의 여흥시간이 있었다. 이 시간을 활용하여 운동하겠다는 복안이다. 장단과 철원 봉성(鳳城) 벌에서 강무(講武)가 펼쳐졌다. 정례적인 군사훈련이다. 한양과 경기도 일원의 수많은 병사가 동원된 군사훈련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사냥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비록 평탄하다 하지만 돌멩이가 소와 양처럼 풀밭에 묻혀 있는 곳이 매우 많습니다. 말을 모실 때에 뜻하지 않은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전하께서는 종묘사직을 위하여 자중하시고 바른길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이계공과 김위민이 행악(行幄)으로 나아가서 아뢰었다.

"내가 이곳이 험한 줄 알고 있으니 어찌 함부로 말을 달리겠는가?"
"전하께서 이미 사냥터로 들어오셨는데 풀밭 사이에서 새가 날아올라 화살을 쏘려고 할 때 졸지에 말고삐를 놓치는 변이라도 생기면 후회하신들 무엇하겠습니까?"

"사냥을 하려면 사냥감을 보고 뒤쫓아야지 평탄한 길만 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중축(中軸)을 따라가며 사졸(士卒)들의 용감함과 겁내는 것을 볼 뿐이다. 그대들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 뒤를 따르면서 보라."

연 사흘에 걸친 사냥이 끝났다. 노루와 고라니 꿩 등 다수의 금수(禽獸)를 사냥했다. 태종이 지신사(知申事) 김여지에게 사냥개(田犬)와 화살을 내려주며 명했다.

"전일에 천신한 것은 상살(上殺)이 아니니 젖(醢)을 담아서 하향 대제(夏享大祭)에 사용하도록 하고 오늘 상살(上殺)한 금수를 종묘에 급히 천신하라."

군주가 사냥터에서 사냥감을 사냥하면 좋은 것을 골라 조상에게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짐승의 왼쪽 표(膘) 즉, 어깨 뒤 넓적다리 앞 살을 쏘아 오른쪽 우(腢), 어깻죽지 앞의 살로 관통하는 것을 상살(上殺)이라고 말했으며 이것을 건두(乾豆)로 만들어 종묘에 천신하였다.

오른쪽 귀 부근을 관통한 것을 중살(中殺)이라 하여 빈객(賓客)을 대접하는 데 썼으며 왼쪽 비(脾), 즉 넓적다리뼈에서 오른쪽 연(腢), 어깨뼈로 관통한 것을 하살(下殺)이라 하여 포주(庖廚)에 충당하였다.

▲ 살곶이다리
ⓒ 이정근
사냥을 끝낸 임금일행이 녹양평에서 일박 후, 환궁 길에 살곶이(箭串) 냇가에서 술자리가 베풀어졌다. 세자 양녕대군을 비롯한 왕자와 종친 그리고 대소신료가 연회에 참석했다. 산해진미가 마련되고 풍악이 연주되는 풍성한 자리였다.

"이 과일이 무엇이냐?"
"감귤(柑橘)이옵니다."

지신사 김여지가 대답했다.

"보기도 좋고 맛이 좋구나. 어디에서 나는 토산품이냐?"
"구주의 토산품이오나 제주에 이식하여 생육한 과실입니다."
"백성들을 풍족하게 먹이려면 육지에 심는 것이 좋겠구나."

이후, 상림원별감(上林園別監) 김용을 제주에 보내 감귤나무 수백 주(株)를 순천, 고흥 등지의 바닷가에 위치한 고을에 옮겨 심게 하였다. 감귤 나무의 최초 육지 상륙이다. 그뿐만 아니라 종묘에 천신하는 시물(時物)에 감귤을 포함하도록 명했다. 감귤이 임금님의 제사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진정한 신하다

여흥이 무르익고 임금이 술에 취하자 칠성군(漆城君) 윤저에게 춤을 추게 했다. 갑작스러운 하명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윤저가 어쭙잖은 춤사위를 선보이고 자리에 앉자 술잔을 내려주며 물었다

"경은 마땅히 나의 과실을 바른 대로 말하라."

"전하가 신민(臣民)의 위에 계시어 모든 하시는 일이 반드시 바른 대로 하시는데 주상의 하는 일이 만일 그르다면 신이 어찌 감히 따르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빈잉(嬪媵)이 이미 족하니 반드시 많이 둘 것이 아닙니다.”

윤저가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곡을 찌르는 바른 말이다. 후궁들이 많은데 화산군(花山君) 장사길의 기생첩 복덕(福德)의 딸 장씨를 후궁으로 들여와 순혜옹주(順惠翁主)로 삼은 것을 꼬집는 말이다. 모든 신하들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수군대기만 했지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지 못한 사안이었다.

"무릇 인신(人臣)의 도리는 먼저 인군(人君)의 사심(邪心)을 공격하는 것이 가하다. 윤저가 비록 배우지 않았으나 학문의 도(道)가 어찌 여기에 더할 것이 있겠느냐?" - <태종실록>

도리에 어긋난 임금의 잘못을 지적해주어 고맙다는 뜻이다. 지신사 김여지를 돌아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태종이 세자 양녕을 돌아보며 말했다.

"칠성군은 태조를 따르면서부터 오늘에 이르렀고 또 내 잠저(潛邸) 때에 서로 보호한 사람이다. 질박 정직하고 의를 좋아하는 것이 누가 이러한 사람이 있겠느냐? 너는 나이 어리니 마땅히 독실하게 믿고 공경하여 무겁게 여겨야 한다."
"신이 이미 늙었으니 다만 주상의 은덕을 입을 뿐입니다. 어떻게 세자 때까지 보겠습니까?"

윤저가 감격하여 울면서 말했다. 이에 감동한 태종이 윤저에게 타던 안마(鞍馬)를 주었다. 임금이 타던 말을 내려준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현대적 의미로 풀이하면 대통령이 타던 승용차를 아랫사람에게 내려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윤저가 사양하니 태종이 말했다.

"경이 사양하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주는 것이니 오늘 받았다가 명일에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가하다."

윤저는 황송한 심정으로 말(馬)을 받았다.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말이 어떤 말인가. 장식이 화려한 어마(御馬)는 뭇 백성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말이지 않은가. 태종이 타던 말을 하사받은 윤저가 그 말을 타고 다녔는지 가보(家寶)로 모셔 두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이방원#윤저#안마#창병#각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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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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