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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불혹을 넘겼지만 나는 아직 '집'이 없다.

일주일 사이에 '억!' '억!'하면서 집값이 오른 때가 있었다. 그 때 난 아내와 아이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언제부터 집값이 '억' '억' 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부 인사들이 안식처의 공간인 집을 돈벌이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린 이 시대, 집을 팔아 치우고 여행을 떠난 김형경이 부럽다.

▲ 김형경의 <사람풍경>
ⓒ 예담 출판사
집 팔아 떠난 여행이었기에 공간적인 풍경을 본 것이 아니라 사람 풍경을 보았으리라. 원래 여행이란 눈으로 보는 재미, 입으로 먹는 재미가 제일이다. 돈이 좀 있다면 사는 재미를 더 할 수 있다.

김형경은 이런 여행의 재미를 넘어 '사람'을 보고 왔다. 아니 '사람의 심리'를 보고 왔다. 사람을 보는 것도 어려운데 인간 내면의 정신과 마음을 읽고 보았다는 것에 존경을 발할 뿐이다. 국외여행을 떠나는 수많은 우리 인간 군상들이 그곳 사람들을 한 번만이라도 진지하게 보고 왔으면 좋겠다.

프로이드와 융을 잘 모른다는 김형경이 인간 군상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그들이 간직한 무의식·사랑·대상 선택·분노·우울·불안·친절·자기애·공포·의존 따위를 정확히 보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니 어쩌면 피부색과 음식 종류, 문화적 경험은 다를지라도 김형경은 그곳에서 자신을 보았는지 모른다. 머리로 이해한 지식으로는 이런 세밀한 글 솜씨를 발휘할 수 없다. 정말 부럽다.

여행에서 인간의 심리를 본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 것일까? <사람 풍경>을 읽어가면서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이다. 물론 여행지에서 글쓰기를 한 것이 아니라 돌아온 후 쓴 글이지만 그는 분명 우리네와 다른 여행을 경험 것이 분명해 보인다. 풍경 관찰과 사진 찍기, 음식 맛보기에 바쁜 우리네와 다른 여행길을 다녀왔음에 부러울 뿐이다. 사진으로 담은 풍경을 우리는 숱하게 보았고, 각 나라의 음식을 대한민국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심리를 만날 수 없다. 직접 대면하지 않고는.

1994년부터 1996년까지 3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진주와 수원을 오가는 기차 여행을 했다. 기차 안에서 본 차창 박 한 주의 풍경은 똑같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면 풍경은 다르다. 시간의 간격이 공간을 변화시켰다. 기차 안 풍경은 어떨까?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에 따른 옷차림의 변화,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서울, 전라도 사람들의 언어와 생활 방식의 차이, 여자와 남자,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다. 끝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같은 이, 같은 풍습, 같은 옷, 같은 생김새가 없다. 하지만 마음을 읽지 못했다.

그렇다. 그 때는 자연의 변화와 사람살이의 변화를 눈으로만 읽고 보았지만 그들 내면의 변화를 읽는 눈이 부족했다. 어떤 이는 불안감, 어떤 이는 공포, 어떤 이는 중독, 어떤 이는 질투, 어떤 이는 회피, 어떤 이는 시기심, 어떤 이는 자기애, 어떤 이는 친절, 어떤 이는 우울이라는 심리 상황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을 것인데, 나는 읽지 못하였다. 다들 다른 얼굴이라면 다른 심리로 살아가는 이들인데 말이다.

10년 전의 일이라 지금 그들을 읽고, 보고,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풍경>은 다시 나에게 기차 여행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들을 겉보기만 아니라 실제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게 만들었다. 저 사람은 우울증에 걸렸을까? 왜 혼자 여행을 떠날까? 아이가 울고 있을 때, 과연 아이와 엄마의 현재적 관계는 앞으로 10년 후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저 사람은 자기 어미와 어떤 관계를 통하여 성장하였을까? 저 아이는 지금 엄마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앞으로 자라서 공포·질투·시기심·불안·회피·자기애·친절·공감·용기·의존 중 무엇이 저 아이를 지배할 수 있을까? '자연풍경'과 함께 '사람풍경'의 여행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김형경의 엄마는 어떤 존재였을까? <사람풍경>에는 아빠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심리학의 모든 분야, 그가 만난 이들의 심리적 상태를 보는 눈을 거의 '엄마'로부터 찾고자 하였다. 어떤 경우는 '엄마'라는 단어에 강박관념이 있을 정도이다. 열 달 뱃속에서 살다가 구로(劬勞)하여 나은 엄마의 희생과 은혜가 인간들을 평생 엄마와 연결시키는 것일까?

나와 엄마를 한 마디로 말하면 '집착적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순전히 나의 평가이다. 나의 엄마는 아들을 향한 사랑을 넘어 집착하였다. 이것이 아직 나를 부담스럽게 한다. 엄마는 내가 자기의 전부였다. 아들의 태어남은 자기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확신을 가졌다. 의존을 "심리적 안정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대상"이라 말했는데 엄마는 의존을 넘어 집착이었다. 심리적 안정이 아니라 강박이라 할 수 있을까? 아직 엄마와 나 사이의 관계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와 나 사이의 관계를 통하여 김형경이 왜 '엄마'를 그토록 <사람풍경>에서 말하고자 했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김형경은 말한다. "내 여행은 회피 방어의식의 발로"였다고.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정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일까? 어릴 때 엄마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성인이 되어서 드러난다는 말일까? 현실이 우리를 옥죄이고 있다. 자기 방어를 위하여 회피한다는 말인가? 결국 자기로부터의 도피이다. 도피처 없는 우리네 인생살이가 가장 불행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하지만 가진 것 없는 우리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간은 과연 가치 있는 존재인가? 행복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생각. 사실 나는 '행복한'이라는 말보다는 '건강한'이라는 말이 더 좋다. 행복은 물질과 연관될 소지가 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자기를 존중한다지만 행복하지 않기에 스스로 목숨을 놓을 수 있다. 스스로 목숨을 놓는 이들의 다양한 이유가 있다. 스스로의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는 나의 시각은 나를 우리네 인생살이가 몸과 정신과 마음이 건강함으로 거듭나면 좋겠다.

페기, 유치, 이탈리아 로마의 보르게 공원의 운동복 차림의 남자. 로마행 기차 안의 역무원, 밀라노 지하철 역의 소매치기 소년, 카라바조, 미켈란젤로 등. 김형경이 만난 이들은 자신들을 보고 <사람풍경>을 썼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엇이라 말할까? 당신이 나를 보고 심리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요, 당신은 나를 잘못 보았군요.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김형경이 본 인간군상들, 일본 사람, 대만 사람, 뉴질랜드 사람, 이탈리아 사람, 중국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으로 객관화시킬 때 김형경의 글은 사실이다. 우리 모두의 불안·공포· 무의식·공포·시기심·질투·회피·자기 존중·콤플렉스이기 때문이다. 살아온 삶의 자리가 다르지만, 김형경이 말하는 엄마에 대한 경험이 다르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함께 공유하고 사는 인생들이다. <사람풍경> 진짜 사람을 만났다.

덧붙이는 글 | 예스24 저의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여행 에세이, 개정판

김형경 지음, 사람풍경(2012)


#김형경#사람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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