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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한-베 평화캠프'가 지난 7월 5일부터 12박 13일 동안 진행됐다. 이 평화캠프는 한국과 베트남 청년들이 베트남 중부의 시골 마을에 들어가 함께 일하고, 함께 자면서 양국의 어두웠던 과거를 돌아보며 진정한 평화를 향한 실천을 모색하는 자리다. <오마이뉴스>는 한-베 평화캠프에 동행해 이들의 활동을 담은 기획취재단 김효성 기자의 글을 2-3차례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주>
2007년 7월 5일 오후 2시. 부슬비가 내리는 호치민 떤썬녓 국제 공항에 햇살과 같은 한움큼의 희망이 도착했다.

'2007 한-베 평화캠프' 한국 참가자들이 베트남 땅에 첫 발을 디딘 것이다. 캠프에 참가하는 베트남 청년들도 모처럼 반가운 얼굴을 보기 위해 공항까지 마중 나왔다. 어색하지만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일단 짐을 풀기 위해 일행은 모두 호치민 시가지로 향했다. 한국에서 온 청년들 대부분은 이국의 풍경이 신기한지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사이에도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2007 한-베 평화캠프'는 올해로 벌써 6회째를 맞는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양국 청년들이 함께 평화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2002년부터 시작된 자그마한 행사다. 특히 한국과 베트남 청년들이 12박 13일 동안 베트남 중부의 시골 마을에 들어가 함께 일하고, 함께 자며, 함께 울고 웃는, 그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향한 실천이 담겨 있다.

2007년 현재까지 '한-베 평화캠프'는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의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어왔다. 한국에서는 소수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온 '나와우리'가,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사회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시민단체 '굳윌'(대표 레탄동)이 바로 그 두 단체이다.

설레는 만남과 어색함 극복하기

7월 4일 오후 2시. 평화캠프 한국 참가자들이 베트남 호치민에 도착했다.
7월 4일 오후 2시. 평화캠프 한국 참가자들이 베트남 호치민에 도착했다. ⓒ 레탄동
올해에는 14명의 한국 청년들과 18명의 베트남 청년들. 총 32명의 청년들이 캠프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들은 베트남 중부 꽝남성 유이탄 마을에서 주요 일정을 보내며 함께 평화를 위한 길을 모색하였다. 특히 꽝남성 유이탄 마을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지역으로 당시의 슬픈 일을 잊지 않기 위해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위령비가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양국 청년들은 모두 함께 힘을 모아 위령비로 가는 길 만들기, 고엽제 피해자 가족의 집 짓는 일 돕기, 지역 어린이를 위한 뜻깊은 시간 갖기 등 작지만 뜻깊은 노력들을 해 나가게 된다.

호치민 시가지에 도착한 한국 청년들은 작은 호텔에서 여정을 풀고 처음 맛보는 베트남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행복한 식사 시간이 끝나고 참가자를 태운 버스가 오토바이 숲을 헤치고 찾아간 곳은 호치민시 외곽에 있는 어느 저택. 호치민 전통 음악원 출신의 베트남 참가자들이 준비한 멋진 베트남 전통 음악 공연을 엿볼 수 있었다. 처음 베트남에 온 한국 친구들을 위한 환영회였다.

침대가 2개밖에 없는 숙소에서 3명이 겨우겨우 새우잠을 자고 부시시한 얼굴로 시작된 7월 6일 아침. 드디어 평화캠프의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첫 발걸음은 호치민시 중심가에 위치한 전쟁 박물관에서 시작되었다.

오랜시간 동안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위해서 노력해 오신 구수정 선생님이 한국 참가자들을 위해 직접 전시관 하나하나를 돌며 설명해주셨다. '전쟁 죄악 증거 전시실' 이라는 섬뜩한 이름의 전시관에 이르자, 구수정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전시실 가장 앞에 있는 전시물은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발췌한 내용입니다. 모두 다 알다시피 미국의 독립선언문에는 인간의 자유권, 행복 추구권이 침해되서는 안된다고 나와 있지요. 베트남 사람들은 이 전시실을 만들면서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발췌해서 베트남 전 때 자신들의 기본적인 권리들이 침해당했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또한 전시실 한켠에는 흔히 미라이 학살이라고 불리우는 선미학살의 끔찍한 사진과,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특히 고엽제 피해자와 그 자손들이 고통 받고 있는 사진들에서 양국 청년들은 안타까움을 느껴야 했다.

'분 짜'라는 맛있는 베트남국수를 점심으로 해결하고, 모든 참가자들은 버스에 올라탔다. 드디어 중부 지방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점심이 조금지나 출발하면 다음날 오전에 도착하는 20시간의 먼 여정이었다.

버스 안에서 어색하나마 32명의 참가자 모두가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친구는 호치민 인문사회대학교를 다니는 '리' 라는 친구예요."
"저 옆에 이 친구는 한국에서 온 홍현기라는 친구랍니다."

한국 참가자 한명, 베트남 참가자 한명. 이렇게 두 명씩 짝지어서 서로를 소개하는 모습에서 부끄러움이 묻어났다. 베트남 참가자들 대부분이 한국어학과 학생이었기 때문에 서로 대화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청년들이 새로이 만나는 데에서 오는 부끄러움이 언어 소통의 어려움보다 더한 난제였다. 하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서로를 알게되고 이해하게 되면서 양국 청년들은 어렵지 않게 친해질 수 있었다.

미라이 학살 현장...총알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나무

평화캠프 참가자들이 선미학살박물관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평화캠프 참가자들이 선미학살박물관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 레탄동
7월 7일 오전 10시, 드디어 꽝아이성에 위치한 선미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선미학살은 베트남전 당시 미군에 의한 최대의 민간인 학살이며, 대외적으로 '미라이 학살'이라고 잘 알려진 사건이다. 학살이 발생한 집터 바로 옆에 세워진 박물관이며, 생생하게 재현된 학살 현장에서 참가자들은 전쟁과 민간인 학살의 끔찍함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박물관 직원 낌충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동상에 형상화된 6명 중 5명은 모두 선미 학살 때 희생된 사람들입니다. 특히 어린 남자아이 둘은 형제인데, 당시 미군이 총을 쏘자 형이 어린 동생을 보호하려고 안고 엎드렸어요. 하지만 결국 둘다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학살의 아픔은 아직까지도 계속됨을 의미하는 것일까? 학살현장에 서 있는 나무에는 아직도 당시 미군이 발사한 총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시 북쪽으로 향하여 정오쯤 캠프팀은 꽝남성 빈즈엉 마을에 도착했다. 황량한 벌판위에 세워진 죄악증거비를 마주하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학살의 현장에 직접 서게 된 참가자들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2003년과 2005년 두차례에 걸쳐 평화캠프 팀에서 방문했던 곳이예요. 당시에 버려져 있던 무덤을 새로이 만들고, 길을 만드는 일을 했었어요. 이곳은 다른 곳과는 달리 죄악 증거비라고 이름 붙여져 있어요. 비석에는 '1969년 10월 3일에 남조선 군대가 74명의 민간인을 모아 살해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11일된 아기가 유일한 생존자라고 합니다."

김정우 나와우리 사무국장의 설명을 듣고, 양국 청년들은 묵묵히 차례대로 향을 사르고 참배를 하기 시작했다. 죄송스러운 마음과 부끄러움이 한국 친구들을 괴롭게 했다. 베트남 친구들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차 보였다. 게다가 사막처럼 황량한 이 벌판에서 우두커니 세워진 '죄악 증거비'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곳을 떠돌 영혼들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남 참가자 쩐 티 남 쩐(20, 다낭외국어대학교 한국어학과 1학년)이 말했다.

"한국 군인이 미국의 용병으로 이곳까지 와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아픔을 줬던 것을 보니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아파요."

참배를 마치고 사막같은 벌판을 30분정도 걸어나와 버스에 다시 올라탔다. 참가자 모두가 땀을 뻘뻘 흘렸다. 1시간 정도 이동하여 호이안시에 짐을 풀고 호이안 전통음식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20시간의 긴 버스 여행 때문인지 모두 단숨에 밥그릇을 비워냈다. 저녁에는 각자 준비한 공연연습으로 양국 참가자 모두가 쉴새없이 바빴다.

민간학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베트남과 한국 청년들

꽝남성 퐁니마을에 있는 위령비에 캠프 참가자들이 참배하고 있는 모습.
꽝남성 퐁니마을에 있는 위령비에 캠프 참가자들이 참배하고 있는 모습. ⓒ 레탄동
7월 8일 아침. 이 지역의 또 다른 위령비 2곳을 방문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퐁니마을과 하미마을이 그곳이었다. 먼저 도착한 곳은 퐁니마을이었다. 마을 어귀에는 어김없이 커다란 위령비가 세워져 있었다. 베트남을 관통하는 1번국도 옆에 위치한 퐁니마을은 당시 '안전마을'로 분류된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번 국도에서 부비트랩으로 동료를 잃은 한국군은 마을로 진입하여 무자비한 살상을 저질렀다고 한다.

또 다른 마을 하미마을은 2001년 한국군 참전 군인복지회라는 곳에서 돈을 내어 위령비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두 곳에서 학살된 희생자들 대부분이 여성, 노인, 아이였다는 데서 참가자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배를 마치고, 참가자들은 학살에서 살아남은 할머니 한분을 만나뵈러 갔다. 당시 수류탄으로 다리를 잃어 의족을 하고 계신 팜 티 호아 할머니셨다. 할머니는 참가자들을 친손주처럼 맞이해 주셨다.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

다리를 잃은 것으로도 부족해 아끼던 두 아들까지 잃고서도 오히려 자애로운 모습으로 한국 친구들을 아껴주시는 모습에 모두가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담소를 나누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할머니 댁을 나서는 중에서도 모든 사람들은 마음속에 깊은 감동과 죄송스러움이 동시에 일었다. 한국 참가자 김명진(18)씨는 할머니댁을 방문한 느낌을 이렇게 밝혔다.

"팜 티 호아 할머니가 우리 한국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 하시는 모습에서 깊이 감명 받았어요. 만약에 나라면 용서하지 못했을 텐데. 또 베트남 친구들이 우리 한국 사람들을 나쁘게 보지 않아줘서 정말 고마워요."

꽝남성 빈즈엉마을의 황량한 벌판에 세워진 죄악증거비에서 캠프 참가자들이 참배하고 있다.
꽝남성 빈즈엉마을의 황량한 벌판에 세워진 죄악증거비에서 캠프 참가자들이 참배하고 있다. ⓒ 레탄동
호이안 시에 다시 도착하여 평화라는 제목의 워크숍 1부를 진행했다. 좁은 방에 32명의 참가자들이 빽빽이 들어 앉아 <미친 시간> 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관람하였다. '이마리오'라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와 당시 한국군 참전자의 증언을 담은 내용이었다. 2시간여의 관람을 마치고 참가자들은 3개의 팀으로 나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베트남 친구들과 한국 친구들이 함께 민간인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두가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이 탄 남(20, 호치민 전통 음악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오늘 위령비를 보고 학살의 진실을 알게 되니 너무 마음이 아프고 또 화가 납니다. 저는 참전 군인들이 당시 저지른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생존자들이 지금은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선아(39, 나와우리)씨는 말을 이어나갔다.

"당시 전쟁으로 누가 이익을 보았느냐를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참전 군인들도 똑같은 피해자거든요. 또한 참전 군인이 베트남에서 민간인을 죽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뒤집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참전군인도 고엽제나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응우옌 낌 프억(24, 호치민 전통 음악원)씨가 말했다.

"미국전쟁(베트남전을 지칭)때 한국도 베트남도 모두 미국 정책의 피해자라고 생각해요. 전쟁의 죄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 사람들이 사죄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베트남사람으로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응우옌 응옥 뚜옌(24, 굳윌 운영위원)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각 나라 사람들마다 하나씩의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용서라는 자랑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살 현장에 우두커니 남아있는 위령비와 그 주위를 떠돌 슬픈 영혼들. 한국과 베트남 청년 모두가 슬픔과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전쟁의 피해자는 학살당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국가의 명령으로 살인을 저지른 군인들도 포함된다는 의견이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슬픈 역사를 반성하고 더 밝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야한다는 생각이 양국 청년들의 마음을 좀 더 밝게했다.

7월 9일부터는 꽝남성 유이탄 마을에 들어가서 5일동안 마을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캠프의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된다. 평화의 길을 모색하기 위한 베트남과 한국 친구들의 고민과 노력은 계속됐다.

2007 한베 평화캠프 참가자들의 희망찬 모습.
2007 한베 평화캠프 참가자들의 희망찬 모습. ⓒ 레탄동

#나와우리#베트남#평화캠프#민간인 학살#베트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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