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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입술을 부르르 떨며 온몸을 쥐어짜 소리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내 목숨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여기 있는 병사들을 사지(死地)로 밀어 넣을 수는 없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병사들을 구하러 가는 일인데 어찌 그렇게 말 할 수 있습니까?”

김숙흥은 다시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시려 했지만 입에 가져다 대기도 전에 조금을 수염에 흘리고 있었다.

“이미 난 척후를 보내어 싸움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네. 그러다가 거란군의 대군이 산을 겹겹이 휘감아 돌아 양장군의 병사들을 포위하는 것을 알게 되었네. 이를 알리려 했지만 이미 모든 건 늦었더군. 저 거란군의 대군은 거란의 왕이 직접 인솔하고 있다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어. 게다가 그 수만 해도 십만이 넘네. 저 포위를 뚫고 병사들을 구하려면 적어도 일만의 기병이 필요하네만 여기에는 고작 삼천의 보병밖에 없네.”

긴 말을 마친 김숙흥은 식은 차를 단숨에 마시고서는 이랑을 외면했다.

“장군께서 가지 않으시겠다면 제가 여기서 병사들을 몰고 나가겠나이다.”

“…….”

“보시오!”

이랑이 벌떡 일어나 사방에 서 있는 부장들과 병사들에게 외쳤다. 이랑의 피끓는 태도와는 달리 그들은 그저 멀뚱히 이랑을 볼 뿐이었다. 이랑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가슴에 두른 엄심갑을 벗고 이윽고 윗도리마저 훨훨 벗어버렸다.

“어허!”

“저런 저런!”

부장과 병사들은 놀라서 수군거렸고 김숙흥 역시 이랑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해 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보시오! 그리고 고려의 남자들이여! 부끄러워하시오!”

이랑은 그대로 말 위에 올라 진영을 빠져나가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거기 서거라!”

큰 목소리에 이랑이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긴 창을 든 김숙흥의 부장 하나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어찌 전장에서 아녀자가 대장부를 희롱하는가? 결코 이런 모욕을 참을 수가 없다! 내가 앞장서 거란군을 무찌르고 동지들을 구하겠노라!”

“나 역시 그러겠다!”

“나도!”

“여기도 있다!”

순식간에 이랑 주위에 병사들이 모여들자 김숙흥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가면 살아오지 못한다! 그래도 가겠느냐!”

“장군! 이대로 가지 않으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을 것입니다!”

“이대로 저희를 보내 주소서! 거란군을 앞에 두고 굴욕을 당하기는 싫습니다!”

김숙흥은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하늘을 보았다.

“그런가… 그렇단 말이지….”

김숙흥은 앞으로 서서히 나와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옷가지와 갑옷을 손에 들고서 말 위에 있는 이랑에게 쥐어주었다.

“난 부끄러운 행동을 한 것이 아닐세. 병사들을 다스리는 장수가 함부로 무모함을 내보이면 안 되는 법이네.”

김숙흥은 품에서 단도를 꺼내어 옷소매를 자른 뒤 붓을 들어 이름을 쓰고 자신의 수염을 잘라 곱게 싸서는 가장 나이 어린 병사 하나를 불렀다.

“넌 여기서 나가 이것을 내 가족들에게 전해 주어라.”

그것을 본 다른 부장과 병사들도 각자 수염내지 머리칼을 잘라 옷소매에 싸서는 병사에게 이를 맡겼다. 그 바람에 이를 맡아둘 병사 하나가 더 뽑히기까지 할 정도였다.

“너무 이러지들 마시오….”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이랑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코 죽지 않을 것이외다. 이 싸움에서 거란군을 물리치고 살아나가 나의 낭군과 함께 살아갈 것이오. 결코 죽기 위해 싸우지는 마시오….’

김숙흥이 선두에 서 칼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자! 속히 진군하라! 저곳에는 도움을 기다리는 고려의 용사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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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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