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북녘 땅에서 하루는 정해진 일과 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정신없이 바쁘다. 내금강까지 가려면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8시까지 다 모여 단체로 출발해야 한다. 혼자서 여행을 할 때는 이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경우가 더 많지만 스스로 움직이는 것과 타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천양지차다.

버스가 출발하자 비마저 오락가락하며 사람들 마음을 어지럽힌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곡식의 대부분은 옥수수와 콩이며, 간혹 양배추와 벼도 보인다. 갈비뼈가 앙상한 누런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하얀 염소가 산비탈에서 뛰어놀고 있다. 마을 입구마다 판초우의(천 중앙에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머리를 내어 입는 비옷)를 뒤집어쓴 군인들이 실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다.

버스 안에서 설명을 해주는 안내원이 너무나 열성적이다. 나도 답사 때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보았지만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해 저렇게 열심히 외우고 준비한 기억은 별로 없다.

나랑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지만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 속으로나마 찬사를 날린다. 이어서 여성 안내원의 노래가 나오는 사이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좁고 험한 길을 쉼 없이 달려간다. 미끈하게 빠진 소나무 숲을 지나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는 전나무 숲길이 나온다.

제법 심하게 내리던 비가 그쳐 안도를 하는 사이 표훈사 입구에 도착할 즈음 다시 빗방울이 세차게 흩날리고 있다. 여행이나 답사 때 비를 만나면 비옷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는 것에 짜증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맘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점이 짜증난다.

더군다나 오늘은 나와 같은 목적으로 이곳까지 찾은 수많은 인파들로 인해 갑갑한 마음은 더해간다. 간단히 표훈사를 돌아보고 노란 비옷을 입은 연우 손을 잡고 비탈길을 올라간다. 녀석은 발목 근육이 약해 걷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최대한 데리고 올라가 볼 요량이다.

계곡을 따라난 길을 올라가면서 계속 말을 건다. 식물에 대한 얕은 지식으로 몇몇 나무이름을 불러주고, 아는 만큼 풀이름도 말해준다. 바위에 퍼렇게 낀 것의 이름이 ‘이끼’라고 말하자 ‘이끼’를 몇 차례나 반복하면서 외운다. 이끼는 햇빛이 들지 않는 음지에 수분이 많이 있는 곳에서 자라고 밟으면 미끄럽다고 설명을 해준다.

저기 보이는 고사리도 이렇게 음지에서 물기가 많은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라고 하자 또 다른 것은 뭐가 있냐고 묻는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으니 집에서 책을 찾아보자고 달래고선 연우가 좋아하는 공룡 책에 커다란 고사리 같은 식물이 많이 나온다고 급히 얼버무린다. 아! 나의 한계여. 빗길에 미끄러지면 미운 이끼, 나쁜 이끼라고 노래를 해대는 모습이 한편으로 우습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다.

구름다리를 몇 개 지나고 보덕암이 있는 곳에 이르자 이 녀석이 지치기 시작한다. 내심 많이 걸었다 싶었는데 연우엄마는 계속해서 묘길상까지 가자고 한다. 힘들어하는 녀석 손을 잡고 올라가니 연우엄마는 기다리다 못해 혼자 올라가고 드디어 퍼져버린 아들과 함께 터덜터덜 다시 내려오기로 했다. 못 가면 어떠랴. 아들과 둘이서 손잡고 산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지라는 심정으로.

▲ 빗길 등산에 지쳐버린 연우
ⓒ 김성후
단 둘이 내려오다 보덕암을 바라보며 저곳에서 수행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본다. 저 높은 벼랑에 걸려있는 보덕암에 태연히 앉아서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믿음과 용기와 실천이 함께하는 사람임이 분명할 것이다.

선가(禪家)에서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라는 말이 있다. 백척이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서 한 걸음 더 내닫는 용기와 실천이 있어야 제대로 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오래 전에 상영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도 보면 벼랑 끝의 동굴에서 나오는 주인공에게 계곡으로 발을 내밀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이 계곡으로 발을 내미는 순간 빛의 굴절로 인해 보이지 않던 다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불교와 기독교라는 두 종교의 궁극적 진리는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 벼랑에 달려있는 보덕암 전경
ⓒ 김성후

서서히 비는 그치고 보덕암에서 표훈사까지 연우랑 쉬다 걷다 하면서 사진도 찍고 까불고 놀면서 내려왔다. 다리가 아프다는 녀석을 한 켠에 앉혀놓고 후다닥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으니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인가 뛰어 가보니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아빠는 어디 가서 안 보이냐고 툴툴댄다. 아빠는 저기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며 급히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볼 일을 보았다.

정양사와의 인연은 뒤로하고

그 사이 사람들은 정양사로 올라가버렸다. 정양사는 원래 개방하는 코스가 아닌데 이번에 함께한 '나의문화유산답사'라는 동호회 사람들과 이 여행을 주관한 '아이컴퍼니' 측의 배려로 이루어졌다. 함께 못 올라간 것이 아쉽지만 지금 나에게 소중한 것은 꼬마 연우와 함께 있는 것이고, 또 정양사와의 인연은 다음에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표훈사를 둘러본다.

▲ 내금강의 배꼽 정양사 전경
ⓒ 정표채

연우는 아빠 왜 절을 안 하냐고 묻는다. 이 얼치기 순례자는 아들이 무서워 손을 잡고 함께 들어가 반야보전(般若寶殿)으로 들어가 향을 사르고 삼배를 올린다. 그리곤 내가 궁금한 부분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안내원에게 “반야보전 외벽의 단청은 색깔이 다른데요”라고 하니 내벽의 단청은 1800년대 건물을 중건할 당시의 단청이나 외벽은 1980년대에 다시 입힌 것이라 한다.

불상도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이냐고 물으니 고려시대 작품이라 한다. 약간 숙인 고개, 둥글게 말린 어깨, 미타품인을 한 수인이 무릎 위에 있는 것으로 봐서 조선후기라는 내 직관은 어긋나고 말았다. 아니 다시 시절을 확인해야 할 숙제를 안고 돌아오는 것이겠지.

반야보전을 중심으로 정면으로는 7층 석탑과 능파루(凌波樓)라는 2층 누각이 연이어 있으며, 오른쪽 옆으로 영산전(靈山殿)이 있다. 영산전의 부처님은 작지만 당당한 자세로 미타품인을 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이 아닌들 어떠랴.

왼편에는 명부전이 있고, 반야보전과 명부전 사이로 뒤에는 칠성각이 자라잡고 있다. 능파루 쪽으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가면 어실각(御室閣)이 나오는데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전경이 잘 나올 것이라고 표훈사 스님께서 일러주신다.

▲ 어실각 앞에서 바라본 표훈사 전경
ⓒ 김성후

건물들의 사진을 찍고 연우랑 함께 꽃을 찾아다닌다. 빨간 찔레꽃이다. 내가 살던 곳에는 하얀 찔레꽃 밖에 없어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라는 노래가사가 어색했는데 이 노래를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이어서 하얀 찔레꽃 한 무리도 발견한다. 찔레꽃을 바라보면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찡해온다. 장사익의 노래 “하얀 꽃 찔레꽃 / 순박한 꽃 찔레꽃 / 별처럼 슬픈 찔레꽃 /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도 그렇고 이연실의 노래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도 그렇다.

▲ 빨간 찔레꽃
ⓒ 김성후

▲ 하얀 찔레꽃
ⓒ 김성후
옆으로 돌아서면 흰 도라지꽃도 있고 꽃잎이 길쭉한 하얀 꽃도 있다. 연우가 “아빠 이건 백합이지”라고 하는데 웃음이 피식 나왔다. 사실 백합은 꽃다발에 예쁘게 장식된 것만 봤기 때문에 저게 백합인가라고 스스로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사물이 제대로 보이는 것이 사실인가 보다.

#정양사#보덕암#표훈사#내금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