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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랜드 노조 조합원들의 농성에 대한 경찰의 강제해산이 시작된 지난 7월 20일 오전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매장에 경찰들이 진입해 점거 농성을 펼친 노조원들을 연행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겨울이었다. 거리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사회부 기자로 경찰청을 드나들던 나는 집회 소식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됐다. '경찰청 고용직'이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더구나 두 차례에 걸쳐 1000여명이 집단적으로 해고됐다니. 고용직이 뭐 하는 사람들인지, 그리고 왜 집단해고를 당해야 했는지 궁금했다.

단식농성 장소인 민주노동당사를 찾아갔다. 40여명이 있었는데, 모두 여자였다. 김은미씨는 삭발 상태였다. 당시 28살이었던 그는 "쓸쓸한 낯이 옛날처럼 늙어" 보였다. 바리캉이 지나간 지 한달 정도 되어 보이는 머리엔 "생존권 사수"라는 붉은 머리띠가 둘러져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 대신 머리띠를 흔들고 지나갔다.

김씨는 파출소 사환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고3 겨울방학 때인 1994년 1월이었다. "봉급이 20만원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공무원 아니냐. 일용직하고는 달라. 곧 기능직이 될 수 있을 거야. 열심히만 하면 좋은 세월 올 거다." 파출소 경찰관들이 하는 말을 믿고 열심히 일했다. 식비를 절약하려고 직접 밥을 지었고, "타일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화장실을 닦았다. 경찰서로 옮기고 나서는 관내 파출소에서 올라오는 일일 업무보고, 범죄 발생 및 검거 현황, 범죄분석시스템 통계 등의 업무를 보며 모든 직원의 비서 노릇을 했다.

2003년 경찰은 고용직을 없애는 대신 정규직을 늘리기로 결정했다. 10년 동안 열심히 일한 대가는 '해고' 통지였다. "명색이 공무원인데…." 전국에서 모인 김은미들은 기능직 전환을 요구하며 투쟁을 시작했다. 고공시위도 불사했다. 여의도에 있는 42미터짜리 교통관제탑에서 올라갔을 때는 경찰의 강제 진압에 맞서 바닥(에어백이 깔려있었지만)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대답이 없었다. 2년 가까운 싸움 끝에 300명이 넘던 '동지'는 41명으로 줄었다.

"그때 같이 뛰어내린 언니는 정말 죽은 줄 알았어요. 에어백 틈으로 잘 못 떨어져서 갈비뼈 네 대가 나갔죠. 그런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더라고요."

인터뷰를 하고 난 뒤 나는 그를 잊었다. 부서가 바뀌었고,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노조위원장이 되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로소 그를 떠올린 것은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을 뉴스로 접한 순간이었다.

그의 행방을 찾아, 당시 맏언니로 불리던 노조 부위원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매우 당황해하며 지금 통화할 상황이 아니라며 전화를 끊었다. 다른 루트로 수소문한 끝에, 경기도의 한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그를 찾았다. 막판까지 버티던 32명에게 시험을 보게 해서 그중 23명을 합격시켜 기능직으로 전환시켜 줬다고 했다. 어정쩡한 타협이었다. 사정을 알고 나니 맏언니의 행동을 이해할 만했다(그는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김씨 역시 죄책감 같은 걸 가지고 있다. 아마도 다 뽑아주면 경찰청 체면이 안 선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고 혼자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대신 복직한 사람들이 한달에 30만원씩을 모아 1년 동안 미복직자들의 생활비를 지원했다.

"지금이 더 힘들어요. 끝까지 함께 했는데 (복직이) 안 된 분들이 있잖아요. 근무하면서도 늘 떨떠름해요. 잠이 잘 안 와요."

그런데, 왜 모두 여성일까? 비정규 노동자 투쟁의 원조 격인 '밥·꽃·양', 케티엑스, 그리고 홈에버와 뉴코아, 경찰청 고용직까지 모두가 여성들이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다는 뉴스의 이면을 보는 듯하다. 더구나 사회는(정부, 기업, 그리고 우리는) 이들의 노동을 경시한다.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싼 값에 부릴 수 있는 것으로 본다.

"100만원도 안되는 월급 받고 살았는데, 그것도 못하게 하니 억울해서 싸웠던 거죠. 제 동생들이나 후배들은 완전히 비정규직 인생을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게 안타까워요."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휴~"하고 한숨부터 쉬었다. 이어 "법안 자체를 만든 게 문제가 있다"고 간신히 말했다.

그의 말이 옳다. 비정규직 문제를 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순진하다 못해 아둔한 것이다. 비정규직의 양산을 막겠다고, 보호법(기간제및단시간노동자보호를위한법률)을 만들었지만 보호는커녕 거리로 내모는 빌미가 되고 있다.

법은 '2년 이상 계약직으로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간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기업들은 정규직화를 피하기 위해 2년이 되기 전에 해고하거나 파견직으로 돌리려고 한다. 이랜드 사태가 정확히 여기에 해당한다. 법과 제도는 완전무결하지 않다. 법 위에 편법이 있고, 편법 위에 사람이 있다.

경기고속이라는 대형 운수회사가 있다. 계열사를 포함해 직원이 7천명이나 되는데, 비정규직이 한 명도 없다. 버스 운전기사는 물론이고 정비사, 청소 담당까지 모두 정규직이다.

이 회사 허상준 사장은 "내가 직접 버스 청소를 해봤는데, 도저히 아주머니들을 따라잡지 못하겠더라"며 "버스 기사들도 신분이 안정되니까 사고가 줄어 회사에는 오히려 이득이 됐다"고 말했다. 사장도 항상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할 정도로 구내식당의 질도 높다. 전형적인 직원 만족 기업인 셈이다.

경기교통의 사례는 이례적이다. 모든 기업들에게 따라하라고 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게 장기적으로 비용을 줄이는 방법인지 한 번 따져볼 필요는 있을 듯싶다.

기업이 비정규직을 선호하는 이유는 비용이 절감되고, 노조를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용이 불안한 노동자로 가득한 기업은 고객을 만족시키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일이 불안한 노동자로 가득한 나라는 선진국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정부 스스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해고를 일삼는 나라는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사회적 대타협을 일궈내든, 법을 없애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열쇠는 정부가 갖고 있다. 정부부터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재성 기자는 인권연대 운영위원과 <한겨레신문> 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경찰#경기고속#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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