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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이어지는 열대야에 뒤척이며 어린 시절의 여름다움을 잃어버린 여름이 안타깝다. 어린 시절에는 아무리 뜨거운 여름이라도 절기상으로 입추가 되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중복이나 말복에도 새벽에는 선선한 바람에 이불자락을 끌어당기곤 했었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그 여름이 남아 있을 것이다. 여전히 남아 있을 그 여름, 그러나 WTO, IMF, 한미FTA가 휩쓸고 간 농촌은 마치 제초제에 뿌리가 말라가는 강아지풀처럼 힘겹기만 하다. 여전히 그들에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여름 들판, 도시건 시골이건 가리지 않고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옛날 구황식물이기도 했던 강아지풀이다. 예쁘지도 않은 것이 한낮의 태양빛을 받아 빛나기라도 할라치면 그런대로 볼 만하고, 강아지꼬리처럼 흔들거리는 품새는 귀엽기까지 하다.
나는 그를 '똥개풀'이라고 부른다.
똥개들은 자기의 속내를 감추지 못한다.
그 놈의 꼬리 때문이다.
그게 어때서? 귀엽기만 한데.
- 자작시 '똥개풀'
요즘이야 일부러 토담집을 짓는 경우도 많지만 예전에는 연례행사이다시피한 흙벽메우기의 수고를 덜고자 시멘트를 개어 얇게 흙벽에 바르곤 했다. 아마도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였을 것이다. 초가 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싸리담장은 조립식 시멘트 담장이 대신했으며 흙벽은 얇은 시멘트로 마감을 했다. 곡선과 부드러움 대신에 직선과 날카로움과 단단함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번듯해 보였다. 그러나 그 속내는 번듯해 보이는 만큼 알차지 못했다. 서서히 무너져가는 농촌의 아픔을 가리는 그런 겉치레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 이후 다시 지어지는 집들은 흙벽돌이나 황토흙보다는 구멍이 숭숭 뚤린 커다란 블럭이나 시멘트 블럭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조금 여유가 있는 집은 붉은 벽돌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건축재료의 변화였다. 이제 더 이상 주변에 있는 것들을 이용해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같은 재료로 비슷한 집들을 짓게 된 것이다.
강원도 횡성의 어느 국도를 따라가다 잠시 쉬는 길, 옛날에 방앗간이었던 곳에 눈길이 갔다. 얇게 바른 시멘트가 떨어져 나갔고, 나무기둥과 수숫대와 속 안에 남아 있는 황토흙은 그가 그 곳에 있었던 세월의 깊이를 말하고 있었다. 슬펐다. 무너져가는 농촌의 현실과 닮은꼴이라 슬펐다.
담벼락에는 장작으로 쓸 요량으로 모아둔 나무들이 말라가고 있었다. 목가적인 풍경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암울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무너져 가는 담벼락과 말라가는 나무와 우리네 농촌 현실은 닮았다. 그래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
농사를 짓고 산다는 것, 조금 덜 배웠다는 것은 이 시대에서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이다. 오죽하면 자식 새끼들만큼은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고, 소를 팔아서라도 공부를 시키려고 했는지 이 시대가 이야기하고 있다. 아주 간혹 능력을 인정 받아 장영실 같이 신분 상승한 경우도 있지만 오늘날 학벌사회에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오늘 이 시대에 장영실 같은 이가 있었다면 조선시대만큼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
흉년이 들면 강아지풀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내 풍년이 들면 똥개 취급, 요즘처럼 주식이 쌀이 아닌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잡초로 취급되어 제초제에 뿌리까지 말라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천에 피어나는 것이 강아지풀인 것을 어찌할 것인가?
나는 여기서 희망을 본다. 무너져가는 흙벽에 위로를 하듯 기대어 피어난 한 무더기의 강아지풀, 둘이 어우러져 작은 소품을 만들어 낸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함께 있다.
이 세상 어떤 곳이라도 희망없는 곳이 있을까? 희망이라는 단어 속에는 절망이 들어있지만 그들이 빛나는 것은 어둠이 깊을 수록 더욱 밝게 빛나는 빛같은 것이리라.
나는 꿈을 꾼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 더욱이 삶의 무게로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이 흔히 피어나는 강아지풀처럼 살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