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7월 21일은 내 삶에서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 같다. 필리핀 마닐라 행 비행기를 타고 경상남도 중등 영어교사 국외 어학체험연수를 떠나던 그날 밤, 누적된 피로와 비행기 멀미로 몸은 힘들어도 또 다른 나의 변신을 머릿속에 그려 보는 달콤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서 40명의 선생님들이 한 달 동안 공부하며 머물렀던 곳은 라구나(Laguna) 지역에 위치한 필리핀국립대학 라스바뇨스 캠퍼스(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Los Banos, 이하 UPLB)였다. 그곳은 필리핀국립대학(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이하 UP)의 6개 캠퍼스 가운데 하나로 농업과학(agricultural sciences) 분야에서 이름난 대학교라고 들었다.
필리핀은 1565년부터 333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스페인의 통치를 받은 나라다.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에서 64km 남쪽으로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라스바뇨스(Los Banos)도 스페인어에서 따온 지명이다. 영어로는 'bath(목욕)'라는 뜻인데, 그 부근에 리조트나 스파 들이 많은 것과 무관하지 않는 듯했다.
한 번 타는데 140원, 어디든 가는 '지프니'
주말을 이용하여 마닐라, 팍상한 폭포(Pagsanjan Falls), 따알 화산(Taal Volcano)이 있는 따가이따이(Tagaytay), 보라카이 섬(Boracay Island) 등으로 부지런히 여행을 다니긴 했지만 한 달 동안의 필리핀 생활 근거지가 UPLB이다 보니 그 캠퍼스에서 지냈던 일들이 가장 정겨운 추억으로 기억에 남는다.
20명의 필리핀 선생님들과의 일대일 수업 시간이 되면 으레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바로 필리핀의 첫 인상에 관한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지프니(Jeepney)'라고 답했다.
도색이 요란스럽고 화려해서 예쁜 장난감 자동차를 연상하게 하는 지프니는 오토바이 오른쪽에 사이드카를 단 삼륜 자동차인 트라이시클(Tricycle)과 함께 필리핀의 명물이라 할 수 있다. 지프니는 미군이 쓰던 지프를 개조하거나 중고차 엔진을 달아서 똑딱똑딱 앙증맞게 만든 버스로 마주 보게 양쪽으로 길게 놓인 의자에 15명 정도 앉을 수 있는 크기이고 지붕도 낮다.
UP 캠퍼스 안으로도 지프니가 자주 다녀서 생필품이나 열대 과일 등 먹을거리를 사러UPLB 근처에 있는 Robinsons Town Mall이나 재래시장에 갈 때면 선생님들이 쉽게 이용을 했다. 거기까지 차비가 7페소(peso), 우리 돈으로 140원 정도이니까 엄청 싸다.
운전석 가까이에 앉은 사람이 뒤에 타는 사람의 차비를 받아 운전사에게 건네주게 되는데 요즘 우리나라 버스에서 보기 힘든 따뜻한 풍경이라 인상 깊었다. 그러나 지프니에서 배출되는 매연은 꽤 심각하다.
지프니 대부분이 창문과 출입문이 달려 있지 않아 손바닥이나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지 않으면 매연으로 인해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필리핀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어 한편으로 미안한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 당황스럽기도 했다.
UPLB에서 수탉 로빈후드를 만나다
UPLB에서도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곳은 연초록 풀밭의 드넓은 운동장이었다. 아침이나 저녁에 운동장에 나가면 개를 데리고 조깅을 하거나 산책 나온 사람들, 여럿이 어울려 축구를 하는 학생들, 레인 트리(Rain tree)라고 부르기도 하는 아카시아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그리고 화사한 도냐 루스(Dona Luz)를 바라보며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대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운동장에 나갔다가 재미있는 일을 겪기도 했다. '로빈후드'란 이름을 가진 수탉을 데리고 산책 나온 아저씨를 만난 일이다. 그 아저씨의 나지막한 호령 소리가 떨어질 때마다 다섯 살 먹은 로빈후드는 "꼬끼오~"하고 우렁차게 울어대는 거다. 아침마다 수탉 로빈후드를 훈련시키는 즐거움으로 산책을 나서는 아저씨에게서 삶의 여유를 배울 수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에는 개를 키우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레 그곳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어쩌다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게 되면 한가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들어 좋았다. 필리핀 사람들의 느긋한 성격에다 UPLB에 수의학대학이 있어서 그런지 캠퍼스 안에서도 종종 개들이 자유롭게 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한번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여학생들을 만난 적도 있었다. 'South Hill School Inc.'에 다니는 여학생들로 내가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니 모두들 멋진 포즈로 선뜻 응해 주었다. 필리핀에서는 초등학생 때부터 여학생들도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축구를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같은 조 선생님들과 UPLB 근처에 있는 LB 스퀘어(LB Suare)에서 필리핀의 '산 미구엘(San Miguel)' 맥주를 마신 적이 있었다. LB 스퀘어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10개가 훨씬 넘어 보이는 노천 술집들이 모여 있다.
거기서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며 이야기를 한참 나눈 뒤 마침 지프니가 한 대 오길래 아무 생각 없이 탔다. 그런데 UP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지프니였다. 할 수 없이 우리는 UP 게이트(UP Gate)에서 내려 숙소까지 걸어가야 했다.
키 큰 야자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교교히 내리비추던 밤이었다. 높이 떠 있는 달을 올려다보니 문득 우리 집이 그리웠다. 한 달 동안이나 집을 떠나 있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 필리핀으로 떠나기까지 사실 용기도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다른 색깔과 형태의 삶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은근한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영어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필리핀에서의 하루하루를 오히려 색다른 경험으로 받아들이며 유익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즐거운 마음 덕분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어 팍상한 폭포, 따가이따이, 보라카이 여행기 등을 쓸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