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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화려한 휴가>. ⓒ 씨제이엔터테인먼트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에서는 불법적으로 권력을 탈취한 자들이 있었다. 그 거사가 위법적 폭동인데다가 헌정질서를 문란케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영락없는 ‘폭도’들이었다.

‘폭도’들이 점거한 당시의 대한민국 정부는 합법적 정부라 할 수 없었으며, 그들의 지휘 하에 1980년 5월 광주에 동원된 부대 역시 합법적인 정부군이라 할 수 없었다. 수준을 높여줄 경우, 그들은 ‘폭도’에서 한 단계 올라 반란군 정도는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장교 4727명, 사병 1만5590명 등 총 2만 명의 ‘폭도’들은 항공기 30대, 전차 7대, 장갑차 17대, 차량 282대를 동원하여 자신들을 ‘티 나게’ 반대하는 광주로 ‘침략’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에 돌입했다.

중무장한 ‘폭도’들이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다. 극장에서 제공하는 팸플릿의 일부를 스캔한 사진.
중무장한 ‘폭도’들이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다. 극장에서 제공하는 팸플릿의 일부를 스캔한 사진. ⓒ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이 같은 비상상태 하에서 자신들을 보호해줄 합법적 군대가 없었기에 광주시민들은 스스로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그 상황 하에서는 시민군만이 대한민국 광주시의 유일·합법 ‘정부군’이었다. 광주 시민군은 헌정질서 수호를 목표로 했으므로 그들은 사실상 비상 정부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비록 전투에서는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지만, 전쟁에서만큼은 시민군이 종국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데에 성공했다.

군인이 된 시민들. 80년 5월 광주에서는 이들이 유일한 합법 군대였다.
군인이 된 시민들. 80년 5월 광주에서는 이들이 유일한 합법 군대였다. ⓒ 씨제이엔터테인먼트

“나는 폭도가 아니다!”(죽기 직전 주인공 강민우의 절규)
“저들은 대한민국 군인이 아니다. 저들이야말로 바로 폭도다!”(시민군 대장 박흥수의 외침)

그렇게 80년 5월항쟁은 ‘광주시민이 합법이고 전두환 군부집단은 불법’이라는 점을 온 천하에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훗날 ‘폭도’들의 수괴인 전두환·노태우 등이 법률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전두환·노태우가 전직 대통령 예우를 못 받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 데에는 ‘광주’의 역할이 가장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 광주가 없었다면, 단지 12·12 쿠데타나 친인척의 권력형 부정비리만 갖고 전두환·노태우 심판을 위한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처럼 80년 광주에서 전두환·노태우의 이마에 ‘폭도’라는 낙인을 찍어둠으로써 이후 그 낙인을 근거로 ‘폭도’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은 분명 시민군 아니 ‘정부군’의 승리요 ‘폭도’들의 패배라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또한 5월항쟁은 전두환 군부집단이 정통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 방법으로는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역량이 없는 집단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8년 동안 국민을 억압한 박정희도 하지 못한 일. 그것은 자기 나라 국민들을 한 도시에 몰아넣고 탱크에 비행기까지 동원해서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이었다. 그런 만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름으로써, 전두환 집단은 박정희 집단보다도 한술 더 뜨는 ‘폭도’들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폭도’들이 광주를 ‘침략’하기 직전, 간호사 신애에게 ‘중학교 3학년’ 수준의 연애를 걸던 택시기사 민우. 민우는 80년 5월에 시민군이 되었다. 극장에서 제공하는 팸플릿의 일부를 스캔한 사진.
‘폭도’들이 광주를 ‘침략’하기 직전, 간호사 신애에게 ‘중학교 3학년’ 수준의 연애를 걸던 택시기사 민우. 민우는 80년 5월에 시민군이 되었다. 극장에서 제공하는 팸플릿의 일부를 스캔한 사진. ⓒ 씨제이엔터테인먼트

8월 21일 서울의 한 영화관에서 <화려한 휴가>를 뒤늦게 관람하면서, 영화 대사에 자주 나오는 ‘폭도’라는 단어를 그렇게 재해석해보았다. 폭도 개념의 역전이라고 할까. 오늘날 한국인들의 국민정서와 역사인식을 볼 때에, 그 정도의 해석은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택시기사를 하기엔 왠지 어색해 보이고 <살인의 추억>의 ‘서울 형사’ 이미지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강민우(김상경 분)와, 민우를 정말 사랑하는 걸까 라는 의심을 들게 할 정도로 표정이 차분하기만 한 간호사 박신애(이요원 분)의 “중학교 3학년”(‘연애선생’ 인봉의 극중 대사) 같은 풋풋한 사랑을 중심으로 80년 광주의 열흘간을 스케치한 <화려한 휴가>는, 당시 그 현장에서 누가 합법이고 누가 불법이었는가를 선명하고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전두환 집단에게 승리를 거두었는데, 아직까지도 전두환 집단을 강자로 묘사하고 시민군을 약자로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단지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라는 팸플릿 문구도 시민군을 약자로 묘사하는 것 같아서 아쉬운 감이 들었다.

무엇이 강자이고 무엇이 약자인가에 대한 명확한 가치정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의 우열을 기준으로 강약을 판단하는 것은 전두환 집단의 전형적인 사고다. 우리가 그들의 낡아빠진 사고를 따를 필요가 있을까.

새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좀 더 세련된 강약의 개념을 취할 필요가 있다. 정당성을 갖춘 쪽이 ‘강자’이고 그것이 없는 쪽이 ‘약자’이며, ‘강자’가 ‘약자’에게 물리적으로 밀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든지 역사적 해석을 통해서든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쪽은 결국 ‘강자’뿐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폭도’들을 정조준하고 있는 시민군 전사들. 왼쪽이 민우다. 극장에서 제공하는 팸플릿의 일부를 스캔한 사진.
‘폭도’들을 정조준하고 있는 시민군 전사들. 왼쪽이 민우다. 극장에서 제공하는 팸플릿의 일부를 스캔한 사진. ⓒ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영화가 끝나고 극장이 환해지자, 어느 아주머니가 눈물 고인 눈가를 닦지도 않은 채 그냥 일어서서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아주머니의 눈물에 왠지 가슴이 아리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렇게 눈물 흘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80년 5월을 계기로 그 ‘폭도’들은 결국 패배했고 이후 시민군이 정치적·역사적으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사실 군사적으로 보더라도 시민군이 그저 밀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시민군이 중무장 ‘폭도’들을 상대로 그만큼 버텼으면 잘 버틴 것이다. 항공기·전차·장갑차·차량까지 동원해서 광주를 짓밟은 ‘침략군’에 맞서, 게다가 민간인들이 정부를 대신해서 그 정도 싸웠으면 ‘선방’한 것이다. 어린이 축구팀이 국가대표팀에게 3-0으로 패했다면, 그건 사실상 어린이 팀의 승리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또 시민군의 최후를 비참하고 슬프게 묘사하는 것만이 다는 아닐 것이다. 자신들에게 닥칠 비참한 최후를 스스로 감내하고 싸움에 뛰어든 분들을 두고 그저 눈물만을 흘리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이다. 물론 슬픈 일이지만.

광주에서 희생된 분들 덕분에 그 후 우리가 ‘폭도’들을 응징할 수 있었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끼고, 또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그분들의 헌신을 칭송하고 기립박수를 보내는 편이 더욱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분들도 우리가 마냥 슬퍼하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것이다.

도청 청사 위에서 국기를 조기 형태로 바꾸고 있는 민우. 태극기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시민군은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거병’한 것이다.
도청 청사 위에서 국기를 조기 형태로 바꾸고 있는 민우. 태극기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시민군은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거병’한 것이다. ⓒ 씨제이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우리가 또 하나 해야 할 것이 있다.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80년 광주에서 합법정부를 대신해서 ‘침략군’을 물리친 시민군을 도리어 폭도라고 규정하는 한편 ‘광주 침략군’을 합법적 계엄군으로 인식하는 수구세력이 남아 있다. 역사인식에 관한 한 ‘꽝’인데다가 전두환 군부집단의 연장선상에 있는 그 수구세력은 지난 10여 년 간 아무 것도 반성하지 않은 채 그저 ‘화려한 복귀’만을 노리고 있다.

그들이 권좌를 회복하는 날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은 다시 불법이 될 것이고, ‘폭도’들은 다시 합법적 계엄군이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고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광주의 순국 영령들이 남긴 ‘전두환 집단은 폭도’라는 그 낙인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또 ‘폭도’의 계승자들이 두 번 다시 대한민국을 통치하는 끔찍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고 경계하는 것이, 이 나라 이 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책무가 아닐까.

80년 5월의 ‘폭도’들은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그래서 5월은 여전히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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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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