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에는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한때 천불천탑(석불과 석상이 각각 1천 개)이 있었다는 운주사(www.unjusa.org)가 있다.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70여 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운주사 주변에 남아 있는 채석장을 볼 때에 이곳에서 석불·석탑이 대량 제작된 적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8월 22일 오후, 화순·담양·광주 일대를 방문하는 어느 답사팀의 일원으로 화순군 천불산(영귀산) 다탑봉에 있는 운주사를 들러보았다. 운주사는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 힘입어 일약 미륵신앙의 성지로 떠오른 곳이기도 하다.
‘왜 운주사(雲住寺)라 했을까?’라 했더니, 운주사 정문의 좌우 현판에 그 답이 적혀 있었다. “천불이 모여들어 구름(雲) 속에 거(住)하고, 천탑이 솟아나와 온 산에 두루 퍼지다.”
이 현판에 따르면, 천 명의 부처가 구름 속에서 거하는 곳이라 하여 운주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실제로, 이 부근 지역에서는 날씨 때문인지 산꼭대기가 옅은 구름에 가려 있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운주사에서 가장 유명한 석불은 산마루에 드러누워 있는 두 ‘와불님’이다. 정문에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왼쪽 산으로 올라가면 바닥에 누워 있는 거대한 와불을 볼 수 있다. 운주사에 있는 다른 석불들은 모두 일어선 자세로 있는 데 비해, 이 두 와불만 유독 드러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운주사에 있는 천불천탑 중에서 마지막인 일천 번째 석불이라는 두 와불은 한쪽은 몸집이 크고 다른 쪽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큰 와불을 기준으로 하면, 길이 12미터에 너비 10미터인 거대한 불상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 거대한 와불이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도 하고 ‘태평성대’가 시작된다고도 한다. 새로운 세상이나 태평성대는 같은 말일 것이다.
처음부터 누워 있는 형태의 와불을 만들려 한 것인지 아니면 완성된 석불을 일으켜 세우지 못해서 그대로 와불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로부터 사람들은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그런 기적이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와불이 누워 있는 바닥을 잠시 살펴보면, 와불이 일어나거나 혹은 와불을 일으키는 것이 매우 곤란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돌 뿌리가 깊은 거대한 바위의 윗면에 와불을 조각한 것이어서, 바위 전체를 들어내지 않고는 와불을 일으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와불이 일어서야 태평성대가 온다는데, 웬만한 기술로는 그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거대한 바위 윗면에 조각된 이 와불이 일어나기만 하면 태평성대가 올 것이라는 말이 전해지는 걸 보면, 옛날 사람들도 태평성대 즉 평화의 도래가 그만큼 힘들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가 보다. 오늘날처럼 옛날에도 평화는 그만큼 요원한 이상이었을 것이다.
‘과거는 오늘날보다 더 평화로웠을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 요·순 임금 시대의 평화나 조선 전기 ‘태평성대’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그런 인식을 갖게 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에, 아직까지 인류에게는 태평성대가 한 번도 안 찾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역사 속에서 접하는 평화라는 것은 최강국의 무력 지배 하에서의 평화였기 때문이다. 팍스 로마나, 팍스 시니카 등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조선 전기 200년간의 태평성대도 조선이 명나라 주도의 대테러전쟁(여진족 토벌전)에 순응하고 협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큰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지만, 그 시기에는 여진족을 상대로 한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이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 와중에서 조·명 두 나라의 백성들은 말도 못할 고난을 당했으며 또 대테러전쟁의 대상인 여진족에게는 그 시기가 결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단지 큰 전쟁이 없었다고 하여 태평성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결코 진정한 의미의 평화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평화의 구성요건을 결여한 것이었다.
진정한 평화란 각 개체의 개성이 존중되는 가운데에 자율적 참여를 전제로 화합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 나타난 평화라는 것은 특정 최강국의 패권과 억압을 전제로 한, 그저 ‘전쟁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쟁이 없다고 하여 곧바로 평화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이란 것은 국가권력 대 국가권력의 문제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국가권력 간의 문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 내에는 무수한 집단·계층·개인이 갈등과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 사이에는 전쟁 외의 또 다른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단순히 국가권력 간의 전쟁이 없다고 하여 그들 사이에도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팍스 아메리카나 하에서 지난 50여 년간 전쟁을 겪지는 않았지만 노사 대립 같은 사회적 갈등이 끊임없이 계속된 한국의 예를 생각해 보면, 단지 전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진정한 평화가 왔다고 할 수 없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권력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권력 이외의 집단과 개인 차원에까지 전쟁 혹은 대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조화 및 화합이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특정 세력의 타율적 강제가 아닌, 여러 개체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념적으로는 쉬울지 모르지만, 위와 같은 의미의 진정한 평화는 현존 세계질서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 같은 최강국의 ‘사리사욕’을 억누르고 인류의 공익을 우선시할 ‘초인격적 초월자’나 ‘세계정부’가 출현하지 않는 한 진정한 평화는 그저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지금 단계에서 그나마 현실적인 것은, 특정 강대국의 패권 하에서 전쟁이나 발발하지 않도록 하는 ‘진정성 없는 평화’ 혹은 ‘저급 평화’를 추구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현존 세계 챔피언인 미국은 아직 그 정도의 평화도 이룩하지 못한 채 쩔쩔매고 있다.
운주사 와불님이 오랜 세월 동안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직 태평성대도 아닌데 괜히 잘못 일어났다가는 부처님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류가 협조를 안 해주니, 천불산 숲속에 누워 선선한 바람을 쐬며 낮잠이나 즐기는 편이 와불님에게는 더 속 편한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