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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동냥하기는 했지만 떠도는 풍문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소림은 절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의 역모를 막는데 일조를 할 것이오. 다만 명확히 밝혀지기 전까지 풍문을 믿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겠소.”
애써 귀를 막고자 함일까? 그들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면 그 증거를 대라는 투다. 이 자리에서 그런 증거를 댈 사람은 없다. 더구나 역모의 증거라는 것이 심증 외에 뚜렷한 물증이 어디 있을까? 물증이 나온다면 이미 역모의 성패가 결정지어진 후일 것이다.
“지금 선사께서는 수행자답지 않게 감정에 너무 치우쳐 있으신 것 같소. 어떤 꼬투리라도 잡아 반드시 본인에게 한 수 보여 주시겠다는 생각만 하시고 계신 듯 하오.”
좌등은 술에 취한 사람답지 않게 예리하게 각원선사의 가슴을 헤집듯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이런 식으로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도는 예의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말은 어떤 면에서는 나이 든 고승을 훈계하는 듯한 모욕적인 것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렇소... 시주의 지적이 맞소.... 허나 지금 노납으로서는 도저히 이대로 물러날 수가 없구려.”
인정함이 옳다. 각원선사 역시 지금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안다. 지금 선사의 목적은 그 결과야 어찌 되든 좌등과의 승부.... 오직 하나다. 오전에 스스로 자진한 광나한의 모습이 늙은 육신과 영혼을 지배하고 있어 감정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이미 인관(忍關)을 통과한 것이 삼십여 년 전인데 불같이 치솟는 이 노화를 참을 수 없음은 그 동안의 수행을 게을리 한 탓일까? 진즉 욕(慾)과 세속의 염(念)을 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소림의 기둥이 되리라 생각했던 제자를 잃자 그 업(業)과 연(緣)은 끈질기게 마음속에서 버려야 할 온갖 악성(惡性)만이 자제력을 잃게 만들고 있다.
지금은 단지 그에 대한 한풀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늙은 육신을 지배할 뿐. 아마 이 지경까지 된 소림의 몰락이 더욱 선사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지 몰랐다.
“꼭 가르침을 주시겠다는 것이외까?”
“가르침이라니.... 당치 않은 말씀.... 좌시주의 무위에 어찌 썩어빠진 영혼과 육신을 가진 노납이 당할 수 있으리오? 지금 이 순간은 그저 한 늙은이의 노망이라 생각해주시오.”
선사의 음성은 피를 토하는 듯했다. 지금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되돌리지 않고 있음에 대한 지독한 자책이었다. 그러면서도 말과 함께 각원선사는 가사를 떨쳤다. 이미 내친걸음이라. 말로 그냥 물러나지 않을 것이란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너는 물러서 있거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네가 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각원선사는 지광을 돌아다보며 엄한 목소리로 일렀다. 어떤 불행한 일이 이 자리에서 벌어진다 해도 지광마저 잃으면 안 된다.
“사부님....!”
사부의 뜻을 왜 모르랴. 썩은 소림을 향해 가끔 뼈있는 말로 방장을 비롯한 장로들을 당황하게 만들던 사부였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자신 역시 다를 바 없다고 자탄하던 사부.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리고...... 아니다.”
말과 함께 뭔가 소매 속에서 꺼내려다 말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든 것은 부처의 뜻. 살고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설사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닥쳐 마지막 전할 말을 끝내 하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나가시겠소?”
좌등의 물음에 각원선사는 고개를 끄떡였다.
“아미타불.....”
자하진인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떠올랐다. 좌등이 이 방을 나가는 것은 문제다. 마치 맹수를 들판에 풀어놓는 것과 다름없다. 좌등이 다른 생각으로 훌쩍 도망가 버릴 우려가 있다.
“선사.... 그것은....”
“그럼 이곳에서는 진인께서 나서 주시겠소? 노납은 밖에서 이 안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겠소.”
이미 각원선사 역시 자하진인에 대해 감정이 좋을 리 없다. 모든 잇속은 혼자 차리려고 하는 그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이미 각원선사의 어조에 노기가 잔뜩 서려있음을 안 자하진인은 예의 비굴하면서도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어찌 선사를 두고 본 진인이 나서겠소이까? 이 안은 비좁기도 하나 나갑시다.”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이었지만 본래 그런 사람이니 어찌할 것인가? 문 앞을 막고 있던 궁단령 일행과 창월이 일단 밖으로 나서며 길을 터주자 좌등과 진운청이 먼저 문밖을 나섰다. 그 뒤를 각원선사보다 먼저 자하진인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나섰고, 화산사검 역시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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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어른께서 오셨습니다.”
시비인 미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중의가 모습을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다른 때와 달리 약간 초조한 기색도 보이고 있었다.
“허... 자네가 갑자기 웬일인가?”
술잔을 입에 대었던 보주가 급하게 들어오는 중의를 보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와 상의할 일이 있어왔네.”
“허.... 이 친구하고는...? 조금 전 폭발음 말인가? 상관하지 말게.... 일단 앉게나...”
보주는 여전히 웃음을 띠운 채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중의는 의자에 앉으며 다섯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분분히 일어서 예를 취하는 그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고는 고개를 보주에게 돌렸다.
“자네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
심각한 어조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제자들을 물려달라는 의미다. 보주가 들고 있던 잔을 훌쩍 마셔버렸다. 미려가 잔과 수저 등을 가져다가 중의의 앞에 놓았다.
“네가 따르거라. 이 친구에게도 술 한 잔 올리고....”
보주의 얼굴은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갔는지 약간 불콰한 빛을 띠우고 있었다. 사실 미려란 시비에게 술을 따르게 한 것은 주인을 모신지 팔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려는 보주의 말에 잠시 당황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도대체 주인은 무슨 연유로 갑작스럽게 이러는 것일까?
쪼르르---
술을 따르는 그녀의 손은 매우 길고 가늘었다. 보주의 잔을 채우고 다시 중의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는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를 띠우고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중의와 보주가 잔을 서로에게 들어올리며 단숨에 들이켰다.
“나는......”
중의가 잔을 탁자 위에 놓으며 거북스러운 듯 다섯 제자들을 슬며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헌데 그 때였다. 밖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중의까지 와 있다고.... 이거 나만 빼놓고....”
성곤의 목소리 같았다. 곧 이어 미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곤어른께서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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