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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와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지상세계 중생들의 심오한 불심을 바탕으로 석가모니가 열반하는 배치구조를 지닌 바오딩산의 석가열반성적도.
ⓒ 모종혁

중국 충칭(重慶)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80여㎞ 떨어진 다주(大足)현. 다주는 2005년 현재 총면적 1392㎢, 인구 93만여 명, 24개 진향(鎭鄕), 지역총생산 73.3억 위안(한화 약 8800억원) 등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에서 그리 크지 않은 현 소재지다.

충칭의 타 구현에 비해서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한 다주에는 다른 지역이 없는 특별난 문화유산이 있다. 지난 1999년 12월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명록에 등록된 '다주석각'(大足石刻, Dazu Rock Carvings)이 바로 그것. 다주석각은 중국 각지에 무수히 널린 불교 석각·석굴 유적 가운데 간쑤(甘肅)성 둔황(敦煌)시의 막고굴(莫高窟), 쓰촨(四川)성 러산(樂山)시의 러산대불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중요 문화재다.

오랫동안 쓰촨성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던 청두에서도 269㎞나 떨어진 다주현에는 무려 75곳에 석각이 조성돼 있다. 다주에는 중국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바오딩(寶頂)산·베이(北)산·난(南)산·스하오(石籇)산·스먼(石門)산 등 5곳과 충칭시문화재로 지정된 4곳, 현급 문화재로 보호받는 기타 등을 통틀어 10만여 존의 석각이 있다. 현 전역에 골고루 분포한 석각은 다주를 '석각의 고향'(石刻之鄕)으로 불리게 했다.

중생과 불교의 조형물이 공유하는 땅, 다주에 처음 석각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758년 당나라 때. 베이산 일대의 사찰을 중심으로 깊은 불심을 석각으로 표현했던 다주 주민들은 오대·송·원·명·청 등 1200여년을 이어오면서 다주에 중국 남방불교예술의 정화를 꽃피웠다.

▲ 높이 2.9m, 넓이 2.8m, 깊이 0.9m에 달하는 바오딩산의 천수관음상은 중국 내 천수관음상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다. 천수관음상의 손은 각기 다른 세상만물상을 표현하고 있다.
ⓒ 모종혁

▲ 석벽에 칠한 벽화가 많이 떨어져나간 대방편불보은경변상.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인생사를 유교적 관점에서 묘사한 석각이 석가모니 주변에 조성되었다.
ⓒ 모종혁

둔황 막고굴에 버금가는 불교예술의 정화, 다주석각

다주석각은 승려와 일반 불자가 자발적으로 나서 돌을 쪼개 만들었다. 이는 황실에서 후원한 윈강(雲崗)·룽먼(龍門)석굴, 변방지역의 귀족과 토호, 장군이 조성을 주도한 막고굴과 다른 점이다. 예술의 극치인 벽화와 희귀한 문헌자료 면에서는 그것이 쏟아져 나온 막고굴에 비하지 못하나, 다주석각에는 불교 뿐만 아니라 유교·도교를 주제로 한, 심지어 유·불·선 3교 합일을 형상화한 석각까지 존재한다. 이 때문에 '북에는 둔황 막고굴이 남에는 다주석각이 있다'(北有敦煌, 南有大足)는 말이 유행할 정도다.

다주석각 가운데 예술적 가치가 가장 뛰어난 바오딩산·베이산·스하오산의 석각은 천여 년 동안의 중국 사회·경제·문화·종교·철학의 발전과 변화를 보여주는 예술품이다. 특히 다주현청 동북쪽에서 15㎞ 지점에 있는 바오딩산석각은 남송시대 밀종(密宗)대사인 조지봉(趙智鳳)이 밀종의 대도량으로 불사를 건립하면서 만들어졌다.

바오딩산석각은 다포완(大佛灣)을 중심으로 좌우 2㎞에 걸쳐 1179년부터 1249년까지, 7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조성됐다. 성수사 아래 자리 잡은 석각은 웅대한 규모와 정교한 조각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입구부터 500여m나 이어지는 배치 구조는 한 폭의 입체 그림과 같고, 배수·채광·역학·방충 등의 시설이 주도면밀하게 건설됐다.

중국에서도 몇 개 남지 않은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을 비롯해 석가열반성적도(釋迦涅槃聖迹圖)·부모은중경변상(父母恩重經變像)·대방변불보은경변상(大方便佛報恩經變相) 등 다포완 계곡을 수놓은 석각 한 존 한 존은 옛 조각가의 심오한 불심과 강인한 예술혼에 의해 정교히 표현됐다. 다주현 내 다른 석각이 그렇듯 바오딩산석각은 석가모니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유교 경전의 내용, 도교의 사상 및 철학 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다주석각의 조형적 특징은 토착화한 중국불교, 민간종교로 자리 잡은 불교신앙을 대변한다.

▲ 지금도 베이산 기슭에 있는 집에 살면서 다주석각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궈샹잉 전 다주석각예술박물관 관장.
ⓒ < CCTV >

▲ 궈샹잉이 10년의 세월을 바쳐가며 손수 그린 다주석각의 당안도. 이 당안도는 다주석각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자료다.
ⓒ < CCTV >

세계유산 등재의 숨은 공로자는 전문학교 출신 궈샹잉

지난 6월 18일 충칭시는 직할시 승격 10주년을 기념해 128명의 '직할시건설공신'을 발표했다. 그 중 8명의 문화선전, 학술이론 공신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이가 있었다. 궈샹잉(郭相潁·69) 전 다주석각예술박물관 관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1973년 중국이 문화대혁명 광풍의 소용돌이에 빠져있을 때 30대 중반에 접어든 궈샹잉은 충칭시에서 다주현의 말단 공무원으로 부임해온다. 당시 중국에서는 사구(구사상·구문화·구관습·구습관)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홍위병의 난동 속에 전통문화재의 관리와 보존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궈샹잉은 실권파와 연계된 불순 관리가 아니냐는 주민들의 의심 속에서도 다주에서 일생을 매달리게 한, 방치된 다주석각의 존재를 발견한다.

문혁 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전문학교(中專)를 졸업한 궈샹잉은 역사나 불교예술에 대한 전문지식은 없었지만 예술과 회화를 좋아했다. 궈샹잉은 평일 퇴근 후와 주말에 다주현 곳곳에 산재된 석각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직접 그림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본래 다주현 문화국 내에는 1952년 설립된 문물보관소가 있었지만, 다주석각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나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도록이나 사진집 하나 없고 교통도 불편했지만 궈샹잉은 홀로 걸어 다니면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힘든 작업을 10년 동안 지속했다.

1978년 이래 중국정부의 개혁개방정책은 전통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되살렸고 다주현 정부는 1984년 다주석각예술박물관을 설립했다. 홀로 외로운 작업을 해왔던 궈샹잉은 이때 현 정부 고위층에게 인정받아, 박물관의 초대 관장으로 임명됐다. 궈샹잉이 작은 노트에 손수 그려서 남긴 바오딩산·베이산·난산 등 10여 곳의 당안도는 무려 20여m에 달했는데, 이는 다주석각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자료였다.

▲ 세계 최대의 불교 석각인 러산대불. 바오딩산석각을 만들기 시작한 조지봉 대사는 러산 출신으로 러산대불을 통해 연구한 석각 조형술을 다주에 이식했다.
ⓒ 모종혁

▲ 공작을 타고 하늘을 나는 석가모니의 형상을 조각한 공작명왕상. 베이산의 공작명왕암은 천 개의 석불상을 배경으로 조각된 중국 남방불교예술의 극치다.
ⓒ 모종혁

버려졌던 지방문화재, 각고의 노력 끝에 세계유산으로 탈바꿈

6월 20일 <충칭천바오>(重慶晨報)는 "궈샹잉은 다주석각 관련 40여개의 중요문물 보호 사업을 주도하여 석각이 성공적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궈샹잉은 향토문물연구자로, 오랫동안 다주석각예술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 현·진향·촌 각급 행정단위의 문물보호네트워크를 구성했다"면서 "궈샹잉이 쓰고 편집한 <다주석각명문록>은 다주석각에 대한 전면적이고 과학적인 최초의 사료"라고 평가했다.

중국 관영 < CCTV >도 "비바람을 맞으면서 다주석각의 보호와 관리에 힘썼던 궈샹잉은 조지봉에 의한 바오딩산석각 조성 비밀, 러산대불과 다주석각의 연관성, 불교의 남부 지역 전파 과정, 남방불교예술의 발전과 성쇠 등을 밝힌 인물"이라고 격찬했다. < CCTV >는 "궈샹잉의 당안도와 연구자료는 대주석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됐다"며 "궈샹잉이 관장으로 재직한 10여 년 동안 다주석각은 체계적인 학술연구와 과학적인 보호가 이뤄져 중국을 대표하는 불교예술로 자리 잡게 됐다"고 보도했다.

1998년 4월 다주를 직접 찾은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다주석굴은 예술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보존과 각고의 관리가 이뤄져 교육기지의 역할도 크다"고 말했다. 그 뒤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지방정부는 석각 주변의 민가를 이사토록 하고 토지를 매입하여 녹지공간과 주변 환경정비에 힘썼다. 궈샹잉의 집념어린 노력은 결국 1999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꽃을 피웠다.

최근 들어 중국도 대학 졸업자가 양산되면서 고학력자가 대접받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한낱 지방문화재로 남을 뻔한 다주석각을 보호하고 연구해 세계문화유산으로 탈바꿈시킨 이는 전문학교 출신의 말단 공무원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목표와 이상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사람,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의미 있는 작업에 몰두하는 사람, 학벌과 인맥보다 노력과 실력으로 자신의 분야를 개척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더 많이 대우받고 인정받아야 중국의 발전이 지속되지 않을까.

#다주석각#궈샹잉#둔황 막고굴#문화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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