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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운사태는 뜻밖의 질문에 잠시 설중행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정말 알고 싶은가 보구나…. 알 때도 되었지."
"……!"
설중행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회운사태는 옆에 있는 백도를 한 번 돌아다보고는 다시 설중행에게 그윽한 시선을 던졌다. 그렇다고 백도가 있어 말하기 거북하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이미 출가한 사람으로서 연(緣)을 따지는 것은 안 될 일이지만 속가(俗家)의 관계로 보면 본 사태는 너의 이모라 할 수 있다. 너는 언니가 낳은 아이이니까…."
어머니… 자신에게도 어머니가 있었던가? 그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없었다. 그저 피붙이라곤 아미의 화부를 한 아버지뿐….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기억 속에도 없는 어머니의 존재란 과연 무엇일까?
"어머니는…?"
"젊은 시절에는 영웅호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재색이 뛰어났지. 결국 당시 강호의 호걸 중의 호걸과 연을 맺게 되어 더욱 많은 젊은 남녀의 부러움을 샀지."
그럼 뭐하랴? 자식인 자신조차 돌보지 못한 것을….
"……………!"
문득 과거를 회상하다가 설중행의 얼굴에 불만스런 기색이 떠오른 것을 본 회운사태가 탄식처럼 말을 이었다.
"너를 낳고 나서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 지친 몸에 네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지."
부친…? 그러다 퍼뜩 그가 들은 또 다른 소문을 떠올렸다. 젊은 남녀의 부러움을 살 정도의 영웅이라면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부친이 아니다.
"그럼 저를 키워준 그 분은?"
"내가 부탁해 너를 맡겼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네게는 먼 숙부뻘 되는 사람이다."
아미의 화부였던 부친은 자신의 부친이 아니란다. 설중행은 분위기에 맞지 않게 느닷없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추운 겨울날 자신을 품속에 넣고 눈 속을 걷던 기억부터 언제나 술 냄새를 풍기는 입으로 자신을 안고 볼에 비벼대던 그 분이 자신의 부친이 아니란다.
"그럼 제 부친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아미타불……. 차라리 네가 평생토록 모르는 사는 것이 나을 수도 있는데… 허나 핏줄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 그래… 모두 말해주마. 네가 이렇게 훌륭히 성장한 이상 이제는 더 이상 감출 것도 없고 밝혀질까 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겠지."
회운사태는 설중행을 대견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언제나 안타깝게 바라만 보아야 했던 조카였다. 형제라고는 언니 하나뿐인 회운사태에게 남겨진 유일한 핏줄이었다. 뭔가 도움의 손길을 주려 해도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십육 년 전이던가…? 이십칠 년이 되었나? 그때 운중보주가 아이를 하나 데리고 아미에 왔었다. 당시 구룡의 신화를 종식시키고 중원을 한 바퀴 돌 때였지."
그 아이가 바로 조금 전 같이 있었던 천룡의 후예 능효봉이었다. 회운사태는 그 아이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겨진 언니의 핏줄 역시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험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보주뿐임을 알았다.
그녀는 모험을 감행했다. 아이를 지키기에는 자신의 힘이 너무나 미약했다. 보주에게 자신에게 맡겨진 갓난아이의 내력을 밝혔다. 제발 도와달라고… 당신이 거둔 저 아이도 천룡의 후예가 아니냐고….
보주는 두 번째 만남에서 순순히 승낙했다. 나중에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는 일이 있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했다. 언니가 죽으면서 남겨 준 형부의 비전(秘傳)을 보주에게 넘겼다. 부친의 무공을 완벽히 익힐 수 있는 비전이었다.
보주는 약속을 지켰다. 아이를 보호해 주었을 뿐 아니라 보주에게는 더욱 위험을 가중시킬 수 있는 위험도 감수했다. 언제나 든든한 천룡의 후예 곁으로 가게 해주었던 것. 이미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게 성장한 천룡의 후예는 친동생 이상으로 그 아이를 보호해 주었고, 이제 이렇게 성장했다.
"제 부친도… 구룡 중 한 분이셨습니까?"
설중행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회운사태는 고개를 끄떡였다.
"네 부친은 구룡 중 셋째인 혈룡이다. 가장 사내다운 멋진 분이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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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의 신화는 아직 종식되지 않았다. 천룡이 비상하자 소림의 비전절기를 익히고 있던 각원선사는 태풍에 휘말린 한 마리의 새처럼 날개가 꺾이고 방향을 잃어버렸다. 어떠한 도검으로도 흠집 하나 남지 않을 것이라던 백팔염주는 터져나가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고, 마지막 힘을 다해 버티며 지탱하려던 몸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우욱-----!"
입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핏줄기는 앞가슴을 적시고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가사는 깃털 뽑힌 새처럼 너덜거리고 여기저기 핏물이 배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부상과 내상까지 입은 것 같았다.
더구나 그의 왼쪽 가슴위에는 불에 그을린 듯 시커먼 자국과 함께 뚜렷하게 찍혀있는 용의 문양(紋樣). 바로 천룡인의 환생이었다.
얼굴색이 백지장처럼 변한 사람은 각원선사뿐이 아니었다. 다른 인물들도 경악과 두려움에 핼쑥하게 변했지만 화산의 자하진인의 얼굴은 정말 볼만 했다. 경악과 절망, 당황과 공포의 표정이 겹치고 있었다.
"다시… 또 다시… 재현되는가…?"
나직한 중얼거림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탄식이었다.
"쿨럭-----!"
억지로 가부좌를 틀어 앉으려 애쓰는 각원선사의 입에서 기침과 함께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핏물에 허연 조각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내장이 부스러진 것 같았다. 겉모습보다 더 치명적인 중상을 입어 회생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사부님----!"
도저히 생각하지도 않았던 결과에 망연자실하고 있던 지광이 황급히 옆으로 기울고 있는 각원선사의 상체를 부축했다. 만약 지광이 부축하지 않았다면 각원선사의 머리가 땅에 처박혔을 것이다.
"소…림이…여… 소…림이여……"
각원선사의 입에서 알아듣기 힘든 탄식이 흘렀다. 이미 생기를 잃은 눈빛은 암울하게 꺼져 있었고, 핏물에 젖은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경거… 망동… 하지…말…라…!"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말이 지광에게 하는 말인지 소림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알 수는 없었다.
"사부님…!"
지광의 옷도 피로 물들고 있었다. 각원선사가 오른팔을 움직이려 애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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