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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D연합회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PD연합회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 김철관

 

"정부가 기자실 통폐합하겠다는 이유가 뭐야?"

 

두달 전 우연히 만난 대학 선배가 물었다. 내가 답한 내용은 이렇다.

 

"보수 언론은 물론이고 진보 언론도 현 정부를 공격해대니 이게 대통령 눈에는 보혁 가릴 것 없이 기자들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노무현 조지기 담합'을 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지. 비판 내용은 보수와 진보가 다르잖아. 그러나 그들 눈에는 이게 안보여. 자신들은 정작 이라크 파병부터 시작해 한미 FTA까지 스스로 조중동과 담합해놓고는 말이야."

 

짐작으로 했던 말인데 최근 노무현 대통령 말을 들어보니 얼추 맞았던 것 같다.

 

지난달 31일, 노 대통령은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옛날에는 편을 갈라서 싸우던 언론이 나한테 대해서는 전체가 다 적이 돼 버렸다"며 "나를 그래도 편들어 주던 소위 진보적 언론이라고 하는 언론도 일색으로 저를 조진다. 그리고 그게 지금 이게 이 싸움"이라고 말했다.

 

대통령 말대로 이전에는 조중동이니 한경대니 갈라져 싸우던 언론들이 지금은 현 정부 비판에는 일치한다. 그러나 비판의 내용은 다르다.

 

조중동의 비판 레퍼토리야 김대중 정부 때부터 비슷하다. 그러나 진보언론들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북송금특검·수용소 발언·주한미군기지 이전·대추리 사태·전략적 유연성·황우석 박사 사태·한미 FTA 등의 사건을 거치며 비판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에서 노 대통령은 조중동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인터넷 어디선가 "노무현은 조중동과 임기 내내 싸웠다, 그러면서 나중에는 항상 조중동이 원하는 대로 했다"는 댓글이 있던데 틀린 말 별로 없다.

 

아파트 값 폭등·비정규직 증가·소득격차 확대 등 서민 생활의 모습은 뻔한데 '지표는 대단히 좋다'는 노비어천가를 진보언론이 불러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일은 이른바 '노빠 사이트'에서 충분히 하고 있다.

 

조중동을 비판하는 논리 가운데 하나가 한나라당 세력이 하면 원래 보수의 기준에서 봤을 때도 틀렸음에도 옹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시작전권 환수는 과거 정권 때는 보수언론들도 환영했던 것인데, 노무현 정부가 하니까 갖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이것이야말로 당파적이다. 진보언론이 진보의 기준에 맞지 않아 노 정권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노빠짓'하는 게 진보 언론의 본분은 아니지않은가?

 

도대체 노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최근 2차 남북정상회담이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의혹에 대한 진보·보수 언론사이의 보도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청와대 말대로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기자들이 담합하고 있다면 왜 이렇게 태도가 다른지 설명하기 힘들다. 

 

말로는 진보니 자주니 하면서 실제로는 정반대로 했으니 진보 언론이 비판하고 그의 지지자들이 떠났다. 노 대통령의 논리대로라면 한 때 노빠였던 사람들이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도 한나라당과 담합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정작 자신은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하자고 주장해놓고는 말이다.

 

현 정부가 큰 업적으로 내세웠던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는 가짜로 밝혀졌다. PD가 만드는 MBC PD수첩이 한 일이다.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를 끝까지 옹호했던 자들은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었고, 현 정부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MBC PD 수첩이 본래의 언론으로서의 자세를 견지하지 않았다면 황우석 박사 사건은 영원히 묻힐 뻔했다. 그런 PD들 앞에 가서 이제 진보 언론도 나를 조진다고 하소연 하는 대통령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과거 학생운동권이나 언론사 출신으로 현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지인들과 어쩌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논쟁으로 번지기가 일쑤다. 자신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조중동이야 그렇다쳐도 왜 진보언론들이 받쳐주지 않느냐고 격렬하게 항의한다. 말 그대로 정말 격렬하게 항의한다.

 

이라크 파병·미군기지 이전 문제·한미FTA 등을 꺼내면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현실적 실용주의다, 진보 언론도 이제 과거의 좌파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훈계한다. "우리는 언제나 옳다"는 신념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논쟁 도중에 그들로부터 꼭 듣게되는 게 "참여정부의 성과는 역사가 기억할 것"이라는 말이다. 현 정부에 참여중인 사람들은 그들의 있는 자리에 상관없이 똑같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정말 신기하다. 마치 기독교 신자들이 주기도문 외우는 것 같다.

 

국어사전에서 '역사'를 찾아보면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기자가 중학교 다닐 때던가? 국사 선생님이 "여러분들 역사를 왜 배우죠?"라고 질문을 던진 뒤 "무엇보다 과거를 배움으로써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이다, 과거의 잘잘못을 판단함으로써 미래에는 어떤 일은 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할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학술적 논쟁이 있지만, 이 설명이 가장 기본인 것 같다.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데 참여정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현실을 도외시하고 올지 안올지도 모르는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부적'같다. 좀 과장하면 노무현 정부판 역사왜곡이다.

 

기자실 개혁은 문턱 낮추기 부터

 

정부의 이른바 취재지원선진화방안에 대해 보수 언론은 물론이고 <한겨레>나 <경향>같은 진보 쪽 언론들도 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대 입장이다. 인터넷 언론들은 기존 언론과 청와대의 싸움에서 중간적인 입장이지만, 기본적으로 현재와 같은 취재지원선진화방안은 탐탁치않게 생각한다.

 

지난달 30일 언론노조·인터넷신문협회·프로듀서연합회·인터넷기자협회의 공동명의의 성명은 "취재지원 기준안에 분명 우려할 만한 요소가 있다. 여론을 충분히 파악한 후 구체적 실행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정부의 조급함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면서 "동시에 언론도 취재지원방안에 대한 반대가 특권 고수로 비춰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과 대권 주자들이 이 문제를 더 이상 정략적으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다.

 

이런 내용도 있다.

 

"특히 취재지원 기준안 내용 중 공직자들이 홍보관리실과 협의 뒤 취재에 응하게 하는 취재지원 기준안 제11조와 대면 취재 장소 제약 등 일부 불합리한 조항은 삭제되어야 한다. 또한 기사송고실과 브리핑룸 통폐합이 관건적 요소가 아니며 취재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 최근 논란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노 대통령이 직접 PD연합회에 가서 축사를 하고 예정된 15분을 넘겨 45분동안 얘기한 것은 아마 '유일한 우군'은 PD라고 생각했던 탓인 것 같다. PD는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있지 않으니까. 그러나 방금 인용한 성명 참가 단체에는 PD연합회도 들어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초기인 2003년 기자실 개방을 단행했다. 진보 쪽 언론 특히 인터넷 이나 신생 매체는 이를 환영했다. 이제 신생 언론들도 정보의 핵심 지대인 정부 부처에 대한 접근 기회가 신장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4년간 청와대와 국회를 빼고는 다른 부처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정부는 과거의 관행을 그대로 방치했다. 기자도 개인적으로 몇 번 문제제기를 했는데 정부 쪽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4년만에 취재지원선진화방안을 들고 나왔다.

 

지금이라도 하는 것은 다행 아닌가 하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 방향이 잘못됐다는 것은 앞서 인용한 성명서에 잘 나와 있다.

 

기자가 생각할 때 진짜 정부가 기자실을 개혁하려고 했다면, 현재와 같은 각 부처 기자실은 그대로 두되 대신 공간을 늘려 신생매체나 인터넷 언론의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기자실 문턱을 낮춰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기존 오프라인 언론 중심으로 형성됐던 기자실 권력은 상당히 약화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는 엉뚱하게 기자들을 외교부 청사 한 곳에 몰아넣고는 사실상 공무원들과의 대면 취재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진단이 틀리니 해법도 엉뚱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취재지원선진화방안#노무현#청와대#기자#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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