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원독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화산사검과 황용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왠지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살기를 피어올리고 있었지만 화산의 인물들은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원한다면 모두 달려들어도 상관하지 않겠다.”
어디서 갑자기 저런 자신감이 솟아난 것일까? 설중행은 입술만 약간 달싹이며 나직하게 음성을 발했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만드는 차가운 음성이었다. 그 말에 섬뜩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화산사검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황용이 황급히 둘째인 탁매검(倬梅劍) 장유(張喩)의 소매를 잡았다. 능효봉에게 탈골당한 왼쪽 팔을 가까스로 맞추어 놓았지만 아직도 완전치 못한 상태라서 말린 것은 아니었다. 장문인의 뜻이 무언지 깨우쳐 주려는 동작이었다.
더구나 신검합일의 경지에 오른 장문인도 놀랍지만 그런 경지에 오른 자하진인을 몇 십초 만에, 아니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피곤죽을 만들어 놓은 저 인물에게 덤벼든다 한들 승산이 있을까? 물론 지금 지쳐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분한 마음은 그저 마음뿐이었고, 자존심이란 것도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 허나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그 뒤에 나온 설중행의 말은 그들로 하여금 그냥 물러나지 못하게 했다.
“화산의 잘못은 단지 저 늙은 원숭이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두 책임을 져야지. 너희들 모두 오른팔 하나씩을 스스로 자른다면 보내줄 수 있다.”
어찌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점점 더 화산의 인물들에게 물러설 자리를 주지 않고 몰아치고 있었다. 허나 이것은 돌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설중행이 손을 쓰기로 작정할 때부터 마음먹은 일이었다. 자하진인에게 처음에는 수세를 보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쓰러뜨린 것은 그러한 목적이 있었다.
본래 혈룡장이 내력을 심하게 소진시키는 무공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저들에게 감히 대들 수 없다는 절망감을 심어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저들을 핍박함으로써 이 운중보에 있는 동안만큼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능효봉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놈---! 아무리---!”
화산칠검 중 셋째인 구봉검(究峯劍) 조환(曹煥)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을 뽑음과 동시에 쾌속하게 설중행을 향해 몸을 날리며 날카로운 검기를 뿌렸다. 조환은 몸이 빠른 자였다. 또한 화산칠검 중 가장 빠른 쾌검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파파파팍---!
어둠을 뚫고 희뿌연 백광이 설중행의 전신을 난자할 듯이 파고들었다. 설중행도 지쳐있는 몸으로 방심할 수 없었던지 몸을 옆으로 비키며 팔을 휘둘렀다.
까강---깡---
날카로운 조환의 검이 설중행의 팔목을 스칠 때마다 금속성이 연이어 들렸다. 설중행의 소매 안에 감추어진 두 개의 비도와 마주쳐 나는 소리일 것이다. 허나 그것도 잠시, 조환의 공세가 더욱 위험스럽게 변하고 있었지만 설중행은 더 이상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조환의 검세를 파고들었다.
“이 정도인가....?”
설중행의 입술 사이로 다시 음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의 입가에는 기이한 살기가 떠오르고 있었는데 그 순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둘째 장유가 소리쳤다.
“조심해라...!”
허나 이미 두 사람의 신형은 허공에서 뒤엉킨 상태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한줄기 백광이 번쩍 했다가 사라진 것 같았다. 그것은 비스듬히 설중행이 오른손을 앞으로 뻗는 순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 어둠 속이 아니라면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컥----!”
단발마의 비명이 울리고 허공에 떠있던 조환의 몸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널브러진 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검을 놓지 않은 것을 보면 천성적으로 타고난 검수였던 모양이었다. 급히 달려간 장유가 조환의 상세를 살피는 순간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며 갑자기 털퍼덕 주저앉았다.
“심인....검....!”
두려움에 가득 찬 음성이었다. 조환의 미간에 나있는 손 한마디 정도의 상흔. 거기에서 살짝 배어나온 핏줄기가 콧등에 위험스럽게 맺혀있었다. 분명히 운중보주의 심인검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조환의 눈에는 깊고 어두운 절망의 그림자가 뒤덮고 있었다.
그는 설중행을 쳐다보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그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모두 덤볐더라도 죽는 것은 자신들이었을 것이다. 그는 조환의 시신을 안았다. 그러고는 일행에게로 돌아가 내려놓고는 조환의 손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지금 이 수모는...언젠가 돌려줄 날이 있으리라.....!”
장유는 자신의 오른팔을 어깨아래에서 잘라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바로 옆의 사제들이나 황용에게 죽음보다 더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나머지 두 사람도 자신의 오른팔을 잘라냈다. 잘라진 상처에서 나오는 피보다 눈에서 흘러내리는 피눈물이 그들을 더욱 절망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러한 수모는.... 이 치욕은.... 그리고 이렇게 처절한 아픔은 한번으로 족하다. 다시는 이런 욕됨을 겪지 않으리라. 상처는 지혈을 하면 되지만 피눈물은 그치지 않는다.
“황사저의 팔까지 요구하는 것인가?”
가까스로 마음을 안정시키며 장유가 물었다. 비록 지금 어쩔 수 없이 수모를 겪지만 그래도 의연한 자세를 버리면 안 된다. 대개 여자에게 팔을 자르라고 강요하는 적은 거의 없다. 더구나 장유는 사정조였다.
“물론....! 예외는 없다. 네놈들 역시 회운사태께 더 몹쓸 짓을 하지 않았는가?”
단호했다. 황용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장유가 들고 있는 검을 빼앗듯 가져가더니 순식간에 자신의 팔을 잘라냈다.
“목숨을 살려주어서 고맙군. 하지만 너는 언젠가 후회할 날이 있을 거야....”
황용은 잠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지혈을 하고는 독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독에 가득 찬 음성이었다. 그럼에도 설중행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이제 돌아가도 좋다.”
마치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판관(判官)과도 같은 오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적어도 구룡의 후예라면 이러해야 한다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소림과 화산이 다시 무너지고 있었다. 구룡의 발현이 과거 존재했던 구파일방의 독선과 아집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만큼 구룡과 구파일방 간에는 영원히 양립할 수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었다.
구파일방 중 삼파가 무너지고 육파일방이 남아 절치부심 노력을 해왔지만 결국 소림과 화산은 재기하기 힘든 지경에 빠졌다. 그것이 또한 냉정한 결과로 이어진다. 허나 삶이나 문파의 흥망성쇠는 언제나 원을 그리듯 돌고 돌기 마련이다. 한번의 결과가 영원한 결과가 될 수는 없다.
다만 준비하는 자가.... 철저하게 준비하는 자가 웃을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