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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군관은 양손에 칼을 들고서는 선창의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꺄악!”

 

비명소리에 놀란 배군관과 김억만, 박사길은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선창에는 모피가 가득 쌓여 있었고 열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한 군데 모여 서로 끌어안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 인근에 사는 왈가족 여인들인가 보군.”

 

배군관은 씩 웃음을 지으며 선창에 쌓여있는 모피를 쓰윽 돌아보았다.

 

“이것 때문에 불을 지르지 마라며 지랄하며 소리 지른 건가. 망할 놈의 되놈 같으니라고.”

 

김억만은 한군데 엉겨 모여 있는 왈가족 여인들의 뒤에서 혼자 파란 눈을 빛내며 앉아있는 여인에게 눈길이 갔다. 그 여인은 김억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 두 사람의 시선 사이에서 오고가고 있었다.

 

“이 여자들을 전부 배 밖으로 내어보내라.”

 

김억만은 여인들에게 자신을 따라 오라고 손짓했다. 그에 누구보다도 앞으로 나선 것은 파란 눈의 여인이었고 뒤를 이어 왈가족 여인들도 따라 나섰다.

 

“거 그 여인이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구먼.”

 

박사길이 선창 밖으로 나와 김억만을 보며 싱긋 웃으며 말하더니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지며 힘없이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김억만의 옆으로 바람소리가 나더니 왈가족 여자 하나가 비명소리를 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모두 몸을 낮춰라! 적이다!”

 

갑판위에 쓰러진 박사길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이미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총탄은 강변에서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모두 이쪽 배로 옮겨 타라!”

 

조선 포수들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기다시피 갑판 위를 가로질러 하나둘씩 배위로 옮겨 탔다. 왈가족 여인들까지 모두 옮겨 탄 후에 사구조다가 명을 내렸다.

 

“화전을 쏘아라! 적선을 불태워 버려라!”

“망할 자식 진작 그렇게 말하지! 그까짓 모피가 뭐라고! 망할 되놈들!”

 

배군관이 가까스로 업고 온 박사길의 시체를 내려놓고 피투성이가 된 옷을 훌훌 벗으며 연실 욕을 퍼부어 대었다. 나선인들의 반격으로 배위에 오른 조선포수와 청나라 병사들 중 상당수가 총탄에 맞아 죽거나 부상을 입고 있었다. 강변에 정박해 있던 나선의 함선들에 화전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배를 강가에 가까이 대어라!”

 

포수들은 몸을 낮춘 채 총탄을 장전하고 강변에서 여전히 총탄을 퍼부어 대는 나선인들을 노려보았다. 이미 배들이 모조리 불타버린 후라 그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배 난간을 엄폐물로 삼고 조선포수들은 강변에서 사격을 하는 나선인들을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쏴라!”

 

총탄소리가 콩 볶듯이 울려 퍼지자 나선인들이 한번에 우르르 쓰러지기 시작했다. 조선포수들이 두 번째 탄환을 장전하기도 전에 나선인들은 더 이상 저항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뒤를 강가에 상륙한 청나라 병사들이 칼과 창을 들고 뒤쫓기 시작했다.

 

전투가 끝난 후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 7명, 부상 25명이었다. 청나라 병사들의 피해는 더욱 컸지만 정확한 집계는 되지 않고 있었다. 반면 나선인들의 배는 7척이 불에 탔고 1척만이 겨우 도주해 나갔으며 총에 맞아 죽은 나선인들은 부지기수였다. 조선 포수들이 오기 전에는 나선에게 패전만 거듭했던 청군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대승이었다.

 

“진작 배를 불태워 버렸으면 죽을 사람도 없었어!”

 

승전에도 불구하고 배군관은 여전히 화를 내며 뱃머리에서 파란눈의 여인을 앞에 두고 무엇이라 중얼거리는 사구조다를 노려보았다. 김억만 역시 잔뜩 화가 난 눈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구조다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조선 군병들의 불만과 욕지거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파란 눈의 여인에게 마치 설득이라도 하듯 무엇인가 열심히 말을 걸고 있을 따름이었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나선#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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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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