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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떨어지고 왠지 마음이 우울해지는 계절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갑자기 허무함이 밀려올 때 우연히 만난 연상의 여인.... 그것도 겉으로 보기에는 겨우 서너 살 정도 위로 보이는 여인을 우연히 만난 것은 가끔 심술궂은 운명의 장난이라 해도 좋을 터였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그저 비영조의 하기 싫은 과업(?)이란 것을 마치고 난 다음에 복귀할 때까지 주어지는 휴식의 시간 동안 공연히 우울한 마음에 돌아가는 동료들과 헤어져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만난 것이니 굳이 상대를 알고자 할 필요도 없었다.

노류장화(路柳墻花)면 어떻고... 여염집 유부녀면 어떠랴 싶었다. 부상을 당한 여인을 인적이 드문 산길에 홀로 버려두는 것이 인간이 할 도리가 아니라는 의무감 때문도 아니었다. 여인은 절색이었고, 귀품이 흐르는 가운데 묘한 염기(艶氣)가 그의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 탓이었다.

여인 쪽에서는 춘약이라도 복용한 듯 싶었다. 얼굴은 도화빛이었고, 달짝지근한 입김을 불어내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호젓한 산길에서 부상당한 낯선 여인과의 만남은 그가 사내임을 입증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늦가을이라 나무꾼이나 짐승을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포수들이 임시로 만든 초막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행히 아무도 없는 초막을 찾아 들어섰을 때 여인에게 있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부상을 치료해주는 의원이 아니라 건장한 사내의 몸이었다.

여인의 부상은 그리 심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누군가 복용시켰을 것 같은 춘약이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던 듯 싶었다. 발목의 골절이나 예리한 병기에 베인 듯한 상처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고, 이미 그녀 스스로 지혈을 하고 금창약까지 바른 것 같았다.

그녀가 무림인이란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또한 그녀가 누구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완전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겨우 사흘뿐이었지만, 두 남녀는 그곳에서 열흘을 채우고야 헤어졌다.

그것뿐이었다.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았고, 그녀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고, 사실 그 열흘 동안 그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기껏 몇 마디뿐이었다.

가끔 그녀의 따스한 가슴이 생각난 것도 사실이었다. 여인을 안으며, 또한 여인의 품에서 따스한 평안함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그 뒤에도 가끔 알지 못할 그리움이 불쑥 솟구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는 애써 그 기억을 지우려했다. 그리고 우연하게 동창의 서류를 뒤적이다가 그녀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천궁문(天宮門)의 문주가 된 지 채 이년이 지나지 않은 해였고, 그녀가 천궁문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 반기를 든 자들에 의해 기습을 당한 그 시기에 자신과 만났다는 사실까지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가 삼합회의 회주가 되기 훨씬 전의 일이었고, 자신과는 열세 살이나 연상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저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한편으로는 막연하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천궁문의 여인이고 더구나 문주라는 사실에 그러한 마음을 떨쳐버렸다. 이제 얼굴에 잔주름이 그늘지기 시작한 그녀를 그 뒤로 다시 찾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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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모른 척 하려해도 자신이 모습을 보인 이후로 그녀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까?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저 낯익은 사람이라고 기억을 떠올리고자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모른 체 했다. 모르는 것이 차라리 나았고, 그녀 역시 자신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만의 바람이었고, 착각이었다. 생사림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의 고막을 파고드는 그녀의 전음에 멈칫해야 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참으로 얄궂군요.’

그녀의 목소리도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기억하고 있었소?’

‘더구나 천룡의 후예라니..... 정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사람 일이로군요.’

‘..............!’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순간의 사랑이.... 아니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은 무슨 사랑...? 그저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헤어질 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어요. 한 번 다시 만나면 꼭 그 말을 해주고 싶었죠.’

‘나 역시 고맙다고 말을 하지 못했소. 철들고 나서 처음으로 편안한 시간이었소. 그 열흘이...’

어떤 감정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었고, 과거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불쑥 솟아나온 기억에 목을 매다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고마웠어요.’

‘나 역시 고마웠소.’

전음이 이것으로 끊겼다. 이미 보이기 시작한 생사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할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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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는 놀랐다. 아니 용추만 놀란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일행이 놀랐다. 이제 생사림의 진은 거의 다 해체했고, 몇 군데 만 더 손을 보면 이제 생사림에 설치된 진은 완전히 사라질 터였다.

“저들이.....왜.....?”

그들의 눈에 비친 광경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괴상한 광경이었다. 도대체가 얼마 지나지 않는 순간에 저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무에 걸려있는 사람은 지공과 손번이었다.

나무등걸에 붙어 기댄 채 목 뒤의 옷가지가 부러진 나뭇가지에 걸려 매달려 있었는데 그들은 늘어진 가지의 나뭇잎을 질겅질겅 씹어 먹고 있었다. 동공은 완전히 풀려있었고, 침을 질질 흘리며 나뭇잎을 씹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라 할만했다.

“자네 왜 이러는 것인가?”

천과(天荂)가 제일 먼저 달려들며 지공을 붙잡고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라는 행동이었지만 지공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니 동공이 이미 풀려있고,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어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천과는 지공과 손번을 나뭇가지에서 내려놓고는 나무등걸에 기대어 놓고는 갑자기 지공의 뺨을 세차게 갈겼다. 헌데 웬일일까? 전혀 반응이 없었다. 아픈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미친 것 같지도 않았다.

‘도대체 지하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들의 정신이 나갔단 말인가?’

천과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알지 못할 불안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운무소축의 잔해사이로 드러난 지하통로로 들어간 지 겨우 한 시진 반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 짧은 시각 동안에 이들이 이렇게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 영혼을 빼앗긴 것과 같은 이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주기 충분했다. 인간에게 있어 두려움이란 그 원인을 알지 못할 때 더욱 증폭되는 법이다.


#천지#추리무협#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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