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혈전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그 이전에 죽었다던 잠룡이 아직도 살아있다니?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풍철한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살아 계신다네.”
이윽고 귀산노인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우슬이 말을 꺼낸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추태감과 상만천이 이끄는 인물들이 코 앞 지척까지 다가온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료에게 불신을 심어주는 일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정말 소문은 믿을 것이 못되는군.”
풍철한이 투덜거렸다.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문은 사실과 별로 다르지 않네. 동정오우와 회 쪽에서는 가장 위험한 인물로 잠룡 그 분을 꼽았지. 그리고 제일 먼저 제거하기로 결정했다네.”
잠룡의 혼원잠에 극성이 되는 독약을 중의가 만들어 내고 치밀한 계획 하에 잠룡의 제거를 시도했던 일을 설명했다. 귀산노인의 노안에 그어진 세월의 흔적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계획은 완벽했고 그 분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지. 헌데 결정적인 순간 다른 사람의 희생이 있었네. 그 분 대신 내 혈육이 죽었으니까. ”
“...”
귀산노인은 갑자기 숙연해진 사람들을 보며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분은 그때의 중상과 충격으로 인하여 거의 칠년 동안 죽지도, 그렇다고 살았다고 할 수도 없는 상태로 숨만 이어갔지.”
그러나 마침내 회복했다. 완전한 몸을 되찾았다. 그러나 자신들의 형제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동정호의 군산혈전에 대한 내용도 모두 들었다. 은둔을 한 다른 형제들도 있다고 들었으니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형제들을 찾는 일이었다. 허나 아무리 찾아도 만날 수 없었다.
“결국 그 분은 운중보로 발길을 돌렸지. 천룡께서 하신 약속에 대해 몰랐던 것은 아니네. 허나 참을 수 없었던 게지.”
“그럼 보주와?”
“만났지. 두 사람이 이 생사림에서 만났다네. 그 뒤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두 사람만이 알겠지. 여하튼 보주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분은 뜻밖에도 내가 만약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바로 이 지하석실로 들어갔네.”
운중이 운중보에 있는 한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어쩌면 그것은 대형인 천룡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소녀가 이 운중보에 들어오는 날 아버님께서 사부님에게 데려갔지요. 사부님께서는 약속을 지켜 주어서 고맙다고 하셨고, 아버님께서는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죠.”
아마 보주는 잠룡의 맥을 잇기 위한 자질을 가진 아이를 찾기 시작했을 것이다. 특이한 체질을 가진 아이가 아니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찾아낸 아이가 바로 우슬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일이 진행되어 왔는지 짐작이 갔다.
“귀산어르신께서는 구룡과 어떤 관계였습니까?”
잠자코 있었던 함곡이 불쑥 물었다. 그 질문에 귀산노인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렇군. 천룡 그 분의 가정(家丁-종복)이라고 하면 맞겠군.”
아마 자기비하일 것이다.
“그 분은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분이셨네. 위세를 떨고 거들먹거리는 자들은 추호도 용서치 않으시면서 아무리 하찮은 아랫사람이라 할지라도 야단치시는 법이 없으셨네. 노부에게 기관(機關)이나 토목지학(土木之學)에 대한 자질이 있는 것을 보고 많은 서적을 구해다가 주셨지.”
나이 차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나름대로 귀산노인도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아이였던 것. 천룡을 만나면서 자신이 모셔야할 주공(主公)이 그임을 알았고, 종복이라도 되기를 간청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천룡은 그를 아꼈다. 귀산을 조금만 다듬으면 신산귀계(神算鬼計)의 모사(謀士)가 되리라 생각했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구룡이 동정오우에게 패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동정오우의 배후에 있는 회의 존재를 몰랐던 노부의 탓도 있었어. 동정오우는 심한 피해를 입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살아났지. 또한 구룡 그 분들은 인정이 너무 많았지. 설사 적이라 해도 인재(人材)라면 기회를 주고자 모질게 하지 못했어.”
“진정한 호걸들이었군.”
풍철한이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왜 구룡의 위명이 녹슬지 않고 존경을 받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권력의 정점에서 물러난 인물이 그 후로도 존경을 받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 듣고 싶나?”
귀산노인은 이제 할 말을 다했다는 듯 함곡과 풍철한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사실 더 이상 구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듯 했다. 이미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다.
“이제 더 말씀하실 시간도 없겠군요. 나머지 말씀은 나중에 듣기로 하겠습니다.”
함곡이 이제 지척에 다가온 추태감과 상만천의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귀산노인의 얼굴에도 서서히 긴장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구룡 그 분들과 버금갈 수 있는 인물이 보주이지. 물론 색깔은 다르지만 말이야.”
한 마디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허나 다른 사람들이 그 의미를 곱씹어 보기 전에 이미 안개는 거의 다 걷혔다. 달빛이 내려앉는 가운데 수십 인물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모두 주위로 흩어져 몸을 숨기고 계시오.”
함곡이 나직하지만 다급하게 말했다. 아직 능효봉과 설중행, 백도가 도착하지 않았고, 합류했을 것이라 생각했던 창월 일행도 오지 않고 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인원만으로 저들을 상대하기 어렵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계획이고 자신의 몫이다.
“어쩌려고?”
풍철한이 되묻자 함곡은 안심하라는 듯 웃음을 지었다.
“내가 당할 것 같으면 도와주면 되지 않나? 일단 피해주게.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함곡의 생각을 모를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함곡에게는 너무나 위험한 발상이었다. 지금 함곡이 상대에게 잡히거나 죽음을 당하면 일이 너무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함곡은 손짓과 눈길로 어서 움직일 것을 재촉하고 있다.
과거 제갈량이 혼자서 성문을 활짝 열어두고 망루에 올라 금(琴)을 타면서 대군을 맞이하였다는 고사(古事)라도 흉내를 내려는 것일까? 선화와 풍철한의 시선이 마주쳤다. 선화가 고개를 끄떡였다.
“...”
풍철한의 시선이 자신의 형제들을 거쳐 무화에게까지 이르렀다. 무화 역시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들에게 있어 함곡에 대한 믿음은 거의 절대적이다. 귀산노인의 입술꼬리가 또 다시 씰룩거렸다.
“좋아! 움직입시다.”
풍철한의 말에 주위 사람들이 주위로 퍼져 몸을 숨기는 데는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십여 장 밖에서 모습을 드러낸 용추의 음성이 고막을 울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