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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미 기선을 빼앗긴 흑룡은 계속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보기에도 파괴력이 극강한 반효의 묵직한 권이 뻗어 나갈 때마다 바닥의 흙먼지와 주위의 나뭇잎들은 회오리바람에 휩쓸리듯 요동을 치고 있었다.

빠박  빠빠박!

반효의 권과 흑룡의 각(脚)이 한 순간에 다섯 번이나 부닥치면서 몽둥이가 부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기세와 기세의 정면충돌이었는데 흑룡은 자신의 다리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권과 각이 부닥치면 일단 힘의 우세는 각 쪽이다. 헌데도 힘에서 밀리는 느낌이었다.

흑룡은 일단 수비에 치중하면서 기회를 노리기로 작정했다. 반효의 권공이 예상외로 탄탄한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놈도 괴물이로군!’

흑룡과 마찬가지로 내심 놀라기는 백룡도 마찬가지였다. 함곡을 채가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생사판 종문천이 유연한 몸놀림을 보이며 파고들었다. 문제는 종문천의 양손가락 사이에 끼인 동전 네 개였다.

저 동전은 종문천의 암기이자 유일한 병기. 접전을 벌이는 와중에 발출되는 동전을 피하기란 매우 어려울 터였다. 백룡은 쌍첨검을 빠르게 긋고 종문천에게 달려들 거리를 주지 않으며 신중하게 진기를 끌어올려 검에 주입했다.

끼이 끼이이.

백룡이 쌍첨검에 진기를 주입하자 검첨(劍尖)에서는 고막을 긁는 듯한 괴이한 바람소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사람의 신경을 혼란케 하는 효용이 있는지 사람들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허나 생사판의 몸놀림은 여전히 가볍고 표홀했다. 빽빽한 검막이 허공을 뒤엎고 있음에도 순간순간 조그만 빈틈을 찾아 파고드는 그의 권각(拳脚) 공격에 백룡은 더욱 경각심을 높이고 신중한 자세를 유지했다.

허나 우세를 점하고 있음에도 반효와 종문천은 결정적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상만천과 추태감의 얼굴에는 약간은 실망스럽다는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중원사괴라고 하지만 흑백쌍용은 상만천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인물들이 아닌가? 용추의 얼굴에도 고민스런 표정이 나타났다.

의외로 중원사괴의 무공수위가 소문 이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기껏 중원사괴의 맏이인 풍철한 정도만이 흑백쌍용과 일대일로 맞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상황은 예상을 여지없이 빗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허나 그들과는 달리 육파일방의 인물들 눈에는 은은히 경탄의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흑백쌍용은 상만천이 믿고 있는 만큼 대단한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과 대등한, 아니 오히려 우세를 점하고 있는 중원사괴의 반효와 종문천에 대해 새삼스럽게 다시 평가해야 했다.

모두 이미 일류고수를 능가하는 상승의 무학을 가지고 있고, 미세한 부분의 움직임이나 유연한 모습 역시 경탄을 자아낼 정도였으며 실전 경험도 풍부한 인물들이었다.

“...”

흑백쌍용과 중원사괴 중 두 명이 벌이는 혈전이 점점 치열하게 변해갈 즈음 추산관 태감의 시선이 천과에게로 향했고, 천과가 미세하나마 고개를 끄떡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천과에게 저 싸움판에 끼어들라는 것이지, 아니면 다른 뜻이었는지 모르지만 천과의 입가에 묘한 기색이 스친 것은 그때였다.

파파팟팟.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두들 네 인물의 혈전에 정신이 팔려있는 그 순간에 갑작스럽게 함곡 옆으로 불쑥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땅속에서 솟구쳤는가? 아니면 나무 등걸 아래에서 솟구친 것일까?

어두운 가운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어서 처음에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곳에 시커먼 그림자가 은신하고 있었는지 전혀 감조차 잡지 못했다. 그만큼 그곳에 숨어있던 자의 은신술이 놀라웠다는 말도 되겠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에 함곡의 뒤에서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헛!”
“앗!”

그 시커먼 흑영은 곧 바로 함곡의 허리를 채갔고, 함곡은 어찌해 볼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제압당하며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시커먼 그림자에 휩싸인 함곡이 혼자서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것 같은 형상이었다.

그 순간 함곡의 뒤로 두 개의 크고 작은 신형이 빛살처럼 뻗어 나왔다. 그것은 추태감 일행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준비했던 듯 천과와 감번(坎幡), 그리고 곤번(坤幡)이 장내로 뛰쳐나가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어딜 감히!”

풍철한의 노기 서린 음성이 장내에 섬뜩한 느낌을 주며 울렸다. 장난스럽게 말을 하던 풍철한의 입에서 이런 음성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만큼 그가 진정으로 화가 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번쩍

츄파팟!

시퍼런 섬광이 어둠을 대낮처럼 밝혔다. 마치 풍철한의 전신에서 시퍼런 섬광이 맹렬하게 뿜어나오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허나 그것은 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풍철한의 손에 들린 한 자루 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갑자기 나타난 시커먼 그림자의 형상이 보였는데 흑무가 주위를 감싸고 있어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구척장신의 시커먼 인물이 함곡의 허리를 낚아채 허공을 가르며 추태감과 상만천 일행 쪽으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헉!”

허나 흑영의 움직임이 잠시 비칠거리는 것과 동시에 신음성이 터지는 것을 보니 분명 풍철한의 검에 어딘가를 맞은 모양이었다. 핏줄기로 보이는 검붉은 액체가 허공을 가르며 뿜어졌다.

허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타난 또 하나의 신형은 함곡의 누이동생 선화였는데 그녀는 어느새 흑영을 따라잡을 듯 달려들었고, 그녀가 어지럽게 손을 휘두른다고 느끼는 순간 어둠 속에서 눈부실 정도로 하얀 손 그림자가 허공에 수십 개나 나타나며 흑영을 덮쳐들었다. 섬뜩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차라리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빠박 빡 따당!

백색 수영(手影)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함곡을 채가는 흑영을 파고들었다. 마른 장작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금속성이 울렸다. 그녀가 펼친 것은 바로 마교(魔敎)의 독문무공이라는 백인장(白刃掌). 과거 마교의 소수마후란 여인이 하룻밤 사이에 무림인 수십 명을 모두 죽였다 해서 소수인장(素手刃掌)이라고도 불리는 그것이었다.

“어헉!”

잠시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이던 흑영의 입에서 또 다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움직임이 더욱 불안정해지며 함곡과 함께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럼에도 함곡의 허리를 감은 흑영의 팔은 풀리지 않았고 대신 입에서 토한 것으로 보이는 핏덩이가 주위를 적시고 있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그 순간 흑영을 감싸고 있던 흑무가 엷어지며 흑영의 모습이 보였는데 매우 기괴한 형상이었다. 온통 검은 빛이었는데 그것이 피부색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몸에 착 달라붙는 흑의를 입고 있었기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만 흑영은 매우 키가 큰 인물이었다. 구척장신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함곡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컸다. 그에 반해 마치 뼈에 거죽만 씌어 놓은 듯 매우 말라보였다.


#천지#추리무협#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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