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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선언의 참여주체를 3자로 할 것인가 4자로 할 것인가를 두고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들이 벌써부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강대국들의 논리에 쉽게 휩쓸려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강대국들이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종전선언과 그 이후의 국면을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라는 대의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종전선언에 누구누구를 참여시킬 것인가와 관련하여 ‘가급적 2개 이상의 강대국이 개입해야만 한반도에서 균형 상태를 이룰 수 있다’는 일부의 인식에 대해서는 그 위험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전혀 일리 없는 생각은 아니지만, 이것은 역사적 경험으로 보나 과학적 추론으로 보나 결코 한민족에게 이로운 발상이 아닐 것이다. 

외세를 많이 끌어들일수록 좋을 것이라는 발상의 소유자 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인물이 바로 조선 고종이다. 그가 1882년 이래 취한 대외정책은 청나라·미국·러시아·일본·독일·영국 등을 끌어들여 국제적 세력균형을 창출함으로써 조선의 국권을 지키겠다는 기조를 띠었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이 잘 증명하듯이, 조선은 바로 그러한 고종의 세력균형정책 등에 기인해서 멸망하고 말았다. 처음 얼마간은 여러 개의 외세가 고종의 의중대로 움직이는 듯했으나, 나중에는 이 외세들의 힘이 너무 강해져서 자기들끼리 전쟁(예컨대 청일전쟁)을 벌이면서 경쟁자의 수를 줄여나가다가 결국에는 한 나라만이 남아서 조선을 삼키고 말았다.

고종은 자신이 여러 개의 외세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겠지만, 이 외세들은 얼마 안 있어 고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기들만의 리그를 벌이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외세의 수가 줄어들었지만, 이것 역시 고종의 통제 밖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고종의 기본 발상은, 여러 개의 외세를 끌어들이면 외세 상호 간의 경쟁 때문에 개별 외세의 힘이 약화되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맞는 생각이다. 청나라도 끌어들이고 미국도 끌어들이고 러시아도 끌어들이고 일본도 끌어들이면, 결국 청나라·미국·러시아·일본의 힘이 조금씩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조선은 외세의 각축 속에서 망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고종이 품었던 발상이 성공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성취되어야 한다. 첫째 조건은 조선의 역량(A)이 개별 외세(b1나 b2)의 역량보다 커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A는 b1보다도 커야 하고 b2보다도 커야 한다. 둘째 조건은 조선의 역량(A)이 전체 외세의 역량의 합계(b1+b2=B)보다 커야 한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A가 b1이나 b2뿐만 아니라 b1+b2=B보다 커야만 외세 간의 세력균형을 통한 국권유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가 밑바탕이 되었다면, 외세가 아무리 많이 들어온다 해도 그것이 조선의 안보에 커다란 지장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조건이 있었다면, 외세가 많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조선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A가 B보다 작은 상태에서 A보다 강한 b들을 계속 끌어들였기 때문에, A가 새로운 b에게까지 시달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A와 B의 격차도 계속해서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b3이 들어오면 기존의 b1이나 b2가 A에 대해 갖고 있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 땅에는 A보다 강한 b1·b2·b3 외에도 <b1+b2+b3=B>가 생기기 때문에 A의 힘은 상대적으로 더 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역학구도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판세의 주도권은 조선이 아닌 외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조선은 자기 땅에서 남들이 한바탕 경쟁을 벌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한마디로, 남들의 축제를 위한 마당만 마련해준 셈이 되는 것이다.

고종의 세력균형정책이 실패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와 같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자국보다 강한 나라들을 단수가 아닌 복수로 끌어들임으로써 결국 주도권을 상실하고 만 것이 주요 요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번 종전선언 문제의 경우도 유사하다. 현재 한반도 주변의 4강들은 모두 다 남한이나 북한보다 강한 나라들이다. 어느 한 나라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남한(a1)과 북한(a2)이 협력하면 주변 4강 중 어느 한 나라의 국력을 능가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남북 협력으로 두 나라를 동시에 능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분단 상태에서 남북 협력으로 확실히 능가할 수 있는 상대는 한 나라 정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전선언 형성과정에서 두 개 이상의 외세를 끌어들여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면, a1+a2의 역량보다 b1+b2의 역량이 더 커지게 될 공산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설령 b1과 b2가 서로 경쟁한다 해도,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한민족의 판도가 아닌 외세의 판도로 바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경우에 따라서는 남과 북이 향후 한반도 역학구도에서 뒤로 밀려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상태에서는 종전선언에 하나의 외세만 끌어들이는 것이 한민족에게 이익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a1+a2>b1 혹은 A>B의 역학구도가 조성되어 남북 협력으로 외세의 힘을 견제할 수 있고 또 한반도 문제를 한민족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이 종전선언에 여러 개의 외세를 끌어들이는 방안은 언뜻 보면 그럴싸하지만 훗날 한민족이 주도권을 상실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보다 강한 나라들을 끌어들여서 국제적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발상은 고종의 예에서 나타났듯이 종국적으로 실패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만약 한민족이 두 개 이상의 외세를 한 번에 능가할 만한 역량이 있다면 문제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현재의 역학구도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상태에서는 현재의 수준에 맞는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전선언에 하나의 외세만 끌어들이면 그 외세가 한반도를 독점하려 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남과 북이 향후 분열하지만 않는다면, 그 하나의 외세는 한민족에 의해 계속 견제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10월 4일 이후의 국제정세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3자 또는 4자”를 참여시킬 수 있다는 선언을 남북 협력으로 만들어내자, 주변 강대국들이 공동선언을 비웃는 게 아니라 이 선언을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면서 종전선언이라는 마당에 참여하려 애쓰고 있다. 남+북의 역량이 우습게 보였다면, 그들은 이번 공동선언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이 문제를 이끌어가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남과 북이 함께 만드는 한마당에 강대국들이 참여하려고 한다는 것은 남북 협력이 동북아 역학구도를 바꿀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한민족이 남북 협력만 잘 유지하면 동북아 내에서 입지를 보다 더 강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북 협력의 기조만 유지한다면 종전선언 무대에서 특정 외세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외세를 전혀 끌어들이지 않고 한민족끼리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선의 방안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에서는 강대국을 끌어들여 한국전쟁의 종결을 선언해야만 한반도의 평화 및 통일에 관한 국제적 공감대를 이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향후 제3국의 훼방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한민족이 안고 있는 한계이자 숙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세를 가급적 적게 끌어들이면서도 한반도의 평화 및 통일에 관한 국제적 공감대와 내부적 여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이에 관한 민족적 논의가 충분히 그리고 계속해서 진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종전선언#외세#10.4공동선언#통일#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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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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