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버라이어티쇼의 시대다. 개그와 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개그맨과 MC의 경계가 헷갈리는 시대가 왔다. 좋게 말하면 멀티 플레이어요, 나쁘게 말하자면 소속되지 않은 경계인들이 판치는 시대가 왔다는 뜻이다.
나 또한 TV 마니아로 버라이어티쇼의 오래된 팬이다. 버라이어티쇼가 시대적 흐름을 타고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연기와 이야기를 중요시하는, 즉 꽁트를 위주로 웃음을 주는 기존의 개그 스타일은 버라이어티쇼에 바통을 넘겨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버라이어티쇼는 방송계 쇼프로그램의 주류다.
그러나 나는 현재 버라이어티쇼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버라이어티쇼는 기발한 상상력과 새로운 내용을 필요로 한다. <개그콘서트>나 <웃찻사>와 같이 틀이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매번 다른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프로그램을 짜야 하는 것이 버라이어티쇼다.
버라이어티쇼에 있어서 작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진행자와 패널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버라이어티쇼를 보고 있자면 진행자와 패널로 인해서 화가 날 때가 많다.소재나 내용면에서도 그렇다.
<무한도전> <라인업>... 막나가는 쇼프로들가까운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방송인들에 처절한 리얼 휴먼 서바이벌'이라는 간판을 내밀고 리얼버라이어티쇼를 표방하는 이경규·김용만의 SBS <라인업>을 들겠다.
지난 6일 방영되었던 라인업에서는 '상처받을 수 있어'라는 제목을 내걸고 사인 경매를 했었다. 연예인의 사인을 받아 명동 한복판에서 사인을 팔고 값을 매겨서 패널들끼리 서로 경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각각의 패널들이 자신의 사인가격에 목숨을 걸었다. 그러면서 더 비싸게 팔린 사인값이 나온 패널들이 자신을 사인값과 동급으로 여기며 과시하기 시작했다. 옆에 동료 연예인을 깔보는 모습이 나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가까운 선후배 관계로 알려진 김구라, 김경민이 서로 말다툼을 하는 장면이 시시각각 비춰졌다.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김구라가 "저 형은 뭐 볼 거 없어요. 싼 값에 깔구 가겠네. 패륜개그네" 등의 단어를 써대며 선배를 인신공격했다. 그러면 김경민은 "넌 인터넷으로나 돌아가. 내가 이제 이런 찌그리들(후배 개그맨들)한테까지 밀려야 돼"하면서 막말을 쏟아놓았다.
버라이어티쇼에서 이런한 말다툼은 자주 나온다. 평소 친구끼리도 하지 않는 상대방을 무시하고 깔보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고간다. 서로 반말을 하는 모습도 부지기수다. <라인업>에 나온 패널들이 자신 사인 가격에 목숨을 거는 모습은 꼴불견이다.
버라이어티, 꼭 불쾌하게 만들어야 할까
사실 이러한 버라이어티쇼의 인권침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현재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무한도전>에서도 인권유린이 드러난다. <무한도전> 멤버들이 바나나 하나를 먹기 위해서 서로를 때리고 쫓거나 땅에 떨어지는 것을 주워먹는 장면이라든지 대갈 장군, 단신, 돌아이 등의 캐릭터를 형상화한 단어들도 이면에서 생각해보면 인간적으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별명들이다. 특히 박명수의 호통개그는 포장이 잘 되어 있는 비속한 말일 뿐이다.
<해피 선데이>의 '1박 2일'도 마찬가지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린다는 취지 아래 이곳저곳을 보여주는 이 프로그램에도 패널들과 MC에 대한 인권유린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특히 그들이 하룻밤을 어디서 묵을지 정하고 나서 이긴 멤버들은 집에서 자고 진 멤버들은 노숙을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꼭 저렇게까지 해야하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또 이들이 1박 2일의 여행을 다니면서 행하는 가학적인 놀이들도 문제다. 차가운 물속을 아무 안전 장비 없이 건너는가 하면, 멤버들 서로서로 음식을 가지고 놀리기도 하고 한 패널에게 매운 마늘쌈을 입속에 막 우겨 넣기도 한다.
<일요일이 좋다>의 옛날TV를 본 사람이라면 유재석과 패널들이 어떤 벌칙을 받는지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그들은 100리터가 넘는 물을 고스란히 맞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기 위해서 서로 성공하지 못하게 방해를 하고 한 사람이 희생될 수 있도록 힘을 모으기도 한다. 이제는 초등학생 아이들도 안 하는 행동을 TV에서 어른들이 하니, 아이들이 보면 아마 코웃음을 칠 것이다.
시청률만 좇지 말고, '인권'을 생각하라
인권유린이나 인권침해. 말은 거창하지만 인간다운 대접을 못 받으면 그것이 바로 인권침해이고, 인권유린이다. 버라이어티쇼를 살리기 위해서 이런 가학적인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면 언젠가 또 다시 누군가가 죽는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각성의 시간이 돌아올 것이다.
요즘 버라이어티는 모두 '리얼', '휴먼'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며 가학적인 행동을 묵인하고 있다. 시청률만 좋으면 이러한 일들이 모두 용서가 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반복되는 인권유린과 가학성은 점점 시청자들의 발길을 떨어뜨리는 지름길이 되고 있다.
버라이어티쇼는 <무한도전>을 기점으로 '리얼'의 이름을 쓰게 되었다. '리얼'이라는 말이 서로 인간대접 안 하는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 '리얼'은 좀 더 건강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연예인도 일반 사람처럼 서로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을까?
서로를 뭉개는 식의 개그가 주류를 이루어서는 안 되고, 서로를 높여주면서 그 속에서 건강한 개그를 찾는 고민을 해야 한다. 이는 방송계내에서도 이루어져야겠지만 현재 버라이어티쇼에 참가하고 있는 MC들과 패널들도 함께 찾아야 할 일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 다음 블로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