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레이트짐바브웨 호텔 식당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허기를 견디지 못할 정도로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돈을 아끼려고 가장 싼 음식을 주문했다. 소시지와 감자튀김, 계란 프라이와 커피 한 잔이 나오는 이른바 컨티넨탈식 아침식사다. 이런 식사마저도 이틀 반 만에 하는 것이다. 허겁지겁 식사를 해치웠다. 호텔 식당도 ‘짐바브웨’라는 이름답게 돌로 내부를 장식해 놓았다.
직원이 가져오는 계산서를 보고 나는 놀라 자빠질 뻔 했다. 계산서에는 “총액 450만 짐바브웨달러”라고 되어 있었다. 환전한 짐바브웨달러가 많지 않아 미국 달러로 계산하겠다고 하자 45달러를 내란다. 미국 돈 1달러=10만 짐바브웨달러라는 공식 환율로 계산하는 것이다. 나는 비자카드를 갖고 있었으나 카드로 계산해도 공식 환율로 받기 때문에 10배 이상의 손해를 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소시지 한 조각과 커피 한잔에 미국 돈 45달러를 내야하다니 어안이 벙벙할 노릇이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 이런 정도의 간단한 아침식사는 미국 돈 4~5달러면 충분했다. 짐바브웨달러가 없으니 꼼짝없이 미국 돈 45달러를 줘야 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짐바브웨를 떠나기로 다짐했다.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은 한 마디로 미쳤고, 어처구니없는 공식 환율은 여행객을 고통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 안의 매점에서 산 작은 생수 한통이 무려 20만 짐바브웨달러이고, 코카콜라 한 병도 20만 짐바브웨달러였다. 내가 전날 짐바브웨에 도착해 하루 동안 경험했던 물가이다.
“신문 가격 15만 짐바브웨달러, 짧은 거리 시내 택시요금 220만 달러, 시 외곽 택시요금 500만 달러, 시내 미니버스 요금 15만 달러, 5시간 장거리 버스 요금 100만 달러, 아침 계란프라이 450만 달러, 3등석 열차 요금 84만 달러….” 짐바브웨 물가는 하늘 높을 줄 모른다. 누가 높은지 푸른 하늘과 매일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에 비례해 짐바브웨달러는 휴지조각이 된다. 미국 돈 1달러에 대한 공식 환율이 실제 가치보다 10배나 적으니, 배낭 여행객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다른 아프리카 나라에 비해 모든 물가가 10배 이상 높은 셈이다. 다른 나라는 시내 택시요금이 2달러면 되는데, 짐바브웨에서는 20달러를 지불해야 하는 것과 같다.
돈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니 버스요금을 내기 위해서도 가방에 가득 돈을 넣고 타야 한다. 하라레에서 마스빙고 가는 버스에 탄 현지승객들도 지폐를 무더기로 들고 다녔다. 아예 10만 달러짜리 고액지폐가 나올 정도이다. 하라레에서 마스빙고 행 요금 100만 달러는 1만 달러짜리 지폐로 계산하면 100장을 내야 한다. 버스요금으로 지폐 100장을 내야한다고 상상해봐라. 아예 돈을 넣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지갑으로는 짐바브웨달러를 감당할 수 없다.
실제로 버스를 타면 돈을 손가방에서 한 움큼 쥐어 꺼내거나 주머니에서 뭉텅이로 꺼내 요금을 계산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짐바브웨에서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에티오피아나 르완다, 말라위 등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스카프에 말아서 싸거나 여자 브래지어에 감추어 다니는 것을 짐바브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모든 것은 국민 탓인 짐바브웨의 어용신문
전날 마스빙고로 오는데 내 옆 자리에 앉은 남자 승객도 “물가가 매일매일 오른다”고 걱정을 했다. 마스빙고에서 자전거 수리점을 한다는 30대의 중반의 남자는 하라레에서 자전거용 타이어를 여러 개 사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에게도 인플레이션에 대해 물어 “여행객에게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은 악마와도 같다”고 하자 웃는다. 나의 말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얘기이다.
내가 만난 모든 짐바브웨 국민들이 “인플레이션”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짐바브웨 국민들은 “인플레이션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 하라레의 힐사이드 롯지의 젊은 백인과 택시운전사가 말한 “여기는 짐바브웨다”라는 말이 모든 것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매일이 아니라 한 시간마다 물가가 오르고, 환율이 분마다 춤추는 현실을 “여기는 짐바브웨다”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전 세계에서 짐바브웨 말고는 이런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전날 마스빙고로 오는 버스 안에서 산 영자신문 <더 헤럴드>지의 2006년 7월 27일자 머리기사도 인플레이션과 환율 관련 기사였다. 짐바브웨 달러가 지하시장에 은닉되어 인플레이션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 내용이다. “수조원의 짐바브웨 화폐가 장롱 속에서 나오지 않고 전체 화폐의 15%만이 제도권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짐바브웨의 전체 화폐 43조 달러 중에서 15%만이 제도권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다. 나머지 화폐는 가정집이나 사무실, 짐바브웨가 아닌 주변국가에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 이것은 경제가 비제도권 시장에 의해 왜곡되고 있고, 암시장과 같은 불법거래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필요한 돈보다 유통되는 화폐가 적게 되면 경제를 질식시키면서 위기를 불러온다….”그런데 이 신문의 사설이 가관이다. “두개의 전선으로부터 경제회복을 꾀하라”라는 제목인데, 짐바브웨 경제위기의 첫 번째 원인으로는 외부적인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2005년의 가뭄과 같은 천재지변, 그리고 국제금융기관의 짐바브웨에 대한 대출금지 등 불법적 제재를 들었다. 두 번째로는 내부요인을 들면서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의 6차 의회 개회 오찬 기념사를 인용한다. “모든 사람의 이익, 즉 공동선을 위해 함께 일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이기적 이익만을 쫓으려는 사례가 짐바브웨에는 너무 많다”고.
어용신문의 사설을 읽는 것 같아 씁쓸했다. 어디에도 무가베 정권의 경제정책 실패와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에 대한 것은 없고 경제실패의 책임이 외부세계와 짐바브웨 국민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내용뿐이다. 한마디로 엉터리고, 신문의 기본사명이 건전한 비판이라는 기본적 책무를 저버리고 있다.1891년에 창간된 짐바브웨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이 이렇다.
무가베 정권은 이미 독립적 시각의 <더 데일리 뉴스>(The Daily News) 신문을 지난 2003년 폐간하는 등 언론을 완전 통제하고 있다. 어용신문과 어용방송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외국 언론의 특파원들도 내쫓았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강제 언론통폐합과 양심적 언론인 추방, 보도지침을 통한 모든 신문과 방송 등 ‘전 언론의 어용화’가 20여년 뒤 짐바브웨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짐바브웨 신문에서 진실을 전하는 것은 ‘날씨란’밖에 없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기사와 사설 등이 모두 무가베 정권의 홍보로 가득하다. 어용신문에서도 가끔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더 헤럴드> 신문의 기사를 읽다보니 “2006년 6월 현재 인플레이션이 지난해 비해 무려 1184%”라는 내용이 나온다. 외국의 금융전문가들은 실제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은 이보다 훨씬 높은 3000~5000%라고 진단하지만, 짐바브웨 정부의 공식 발표 인플레이션만으로도 1184%라는 놀라운 수치이다.
언론의 자유 없이 민주주의 발전과 진정한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다. 나는 더 이상 짐바브웨에서 신문을 사지 않았다. 여행객을 내쫓는 두 가지 요인은 치안과 인플레이션(환율) 문제이다. 케냐의 나이로비와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는 치안불안이 여행객을 내몰고 있었고, 짐바브웨는 인플레이션이 여행객을 떠나도록 하고 있었다.
배낭 메고 은행 뛰어다니는 상상에 웃음이 절로...인플레이션 문제만 없다면 짐바브웨는 여행하기 더없이 좋은 나라다. 넓은 도로와 깨끗한 건물, 친절한 사람들, 자카란다 등 거리의 가로수와 다양한 열대 꽃들, 빅토리아 폭포와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 어디가나 야생동물들을 볼 수 있는 국립공원, 고원지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이러한 모든 짐바브웨의 장점도 인플레이션에서 오는 단점을 막을 수 없다. 여행은 그 자체가 신경이 쓰이는 일인데, 인플레이션까지 겹치면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인플레이션은 여행객을 늘 불안하게 만들고 초조하게 몰아간다. 불안하면 떠나는 것이 여행객이다.
인플레이션을 잡지 않는 한 짐바브웨 관광산업의 발전은 불가능하고 경제회생도 어렵다. 실제로 짐바브웨의 관광산업은 금과 담배에 이은 세 번째 외화 소득원이었으나 지금은 외국 여행객이 40%이상 줄어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내가 일찍 짐바브웨를 떠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것이 며칠 후 확인되었다. 정확히 1주일 후다. 짐바브웨를 떠나 잠비아의 빅토리아 폭포를 구경한 뒤 보츠와나에 도착해서 나는 <보츠와나 가디언>(Botswana Guardian)이라는 영자신문을 샀다. <보츠와나 가디언> 2006년 8월 4일자 국제면 머리기사에는 “짐바브웨가 국경 출입국사무소에 민병대를 배치하다”라는 제목의 내용이 실렸다.
짐바브웨 지폐의 밀반출을 감시하기 위해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민병대를 국경에 배치한 것이 새로운 논란이 되고 있다는 기사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민병대의 국경배치 논란보다 짐바브웨가 8월 3일자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는 뉴스였다. 짐바브웨는 기존 화폐의 액면 금액에서 세자리 숫자를 떼어내고, 공식 환율을 미국 돈 1달러=10만 짐바브웨달러에서 1달러=25만 짐바브웨달러(화폐개혁에 의해 250 짐바브웨달러)로 조정했다는 것이다.
내가 모잠비크에서 짐바브웨 국경을 넘을 때 중앙은행에서 환전한 지 1주일 만에 공식 환율 자체가 2.5배 높아졌으니 그 사이에 얼마나 인플레이션이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1달러=10만 짐바브웨달러도 몇 개월 전 조정된 환율이었다고 하니 공식 환율도 몇 달마다 바뀔 정도로 불안하다. 계속 짐바브웨에 머물렀다면 전격적인 화폐개혁으로 배낭을 메고 옛 화폐를 새 화폐로 바꾸기 위해 짐바브웨 은행을 뛰어다녔을 내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기사에는 수천 명의 짐바브웨 여성들이 부족한 생필품을 사기 위해 남아공과 보츠와나 등 인접국가로 몰려들고 있으며, 암시장에서 외화를 사기 위해 커다란 금액의 짐바브웨달러를 밀반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제파탄과 생필품 부족, 정치적 탄압으로 짐바브웨 전체 인구 1200만 명의 1/4인 300만 명 정도가 조국을 떠나 남아공이나 보츠와나 등 인근국가에서 살거나 일하고 있다.
옛 소련의 해체와 짐바브웨 경제의 붕괴 장면
나의 짐바브웨 탈출 작전은 신속하게 실천에 옮겨졌다. 그레이트짐바브웨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한 뒤 바로 배낭을 메고 용수철처럼 일어나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뛰어놀던 개코 원숭이만이 경보하듯 서둘러 걸어가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본다. 마스빙고를 거쳐 불라와요로 가서 오늘 중으로 짐바브웨를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마스빙고에서 불라와요까지는 버스를 이용하고, 불라와요에서 잠비아의 빅토리아 폭포까지는 기차를 이용해야 한다.
봉고버스를 타고 마스빙고에 도착한 뒤 바로 나는 불라와요 가는 봉고버스로 갈아탔다. 불라와요 행 버스를 타기 전 근처 영국계 바클리 은행의 현금자동인출기(ATM)에서 돈을 뽑으러 갔으나 이미 현지인들이 20m나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현금인출기 앞에 그렇게 줄을 길게 서 있는 것은 짐바브웨가 아니면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옛 소련이 해체될 무렵 모스크바 시내 슈퍼마켓에서 식량을 사려고 길게 늘어선 장면이 떠올랐다. 소련의 해체와 짐바브웨 경제의 붕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는 결국 현금인출을 포기했다. 나의 유일한 목표는 빨리 짐바브웨를 벗어나야한다는 것. 불라와요로 가는 버스를 타고 마스빙고를 벗어나자 철길이 지나고 소떼들을 방목하는 목장들이 즐비하다. 소떼가 지나가니 조심하라는 “소떼 주의(Cow Crossing)”라는 팻말이 길거리에 세워져 있다. 내가 탄 버스도 중간에 소떼들과 염소들이 도로를 가로질러가자 속도를 줄이거나 멈춰서야 했다. 짐바브웨에서는 집단으로 방목하는 농장들이 많다. 옛날 백인들이 운영하던 농장을 토지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회수한 것들이다.
길가의 나무 밑에는 옥수수를 구워 파는 행상들이 있다. 1시간 정도 지나 경찰의 검문이 있으나 그대로 통과시킨다. 다른 나라에 비해 도로의 경찰 검문소가 적고, 엄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면광산을 지나다오후 3시 20분 즈비샤바네(Zvishavane)라는 도시의 정류장에 도착해 30분가량 머물렀다. 짐바브웨 중부지역에 있는 즈비샤바네 지역은 한 마디로 광산도시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면 산지일 뿐 아니라 주변에서는 플라티나(백금), 금, 다이아몬드 등도 생산된다. 식민지 시절 이 광물을 실어 나르기 위해 이미 1928년 남아공 케이프 식민지로 연결되는 철도가 놓일 정도였다.
버스가 머무는 동안 잠시 차에서 내려 맨손체조로 몸을 풀고 있는데, 젊은 남자가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주소를 적어 달라”고 한다. 짐바브웨 젊은이들은 특별한 인연이 없는데도, 주소를 적어달라는 요구를 자주 한다. 전화번호도 아니고, 주소를 적어달라고 하니 당혹스럽다.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게 강요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외국인과의 교류를 원하는 것 같다. 짐바브웨만의 독특한 모습이다.
짐바브웨의 도로는 제대로 된 2차선으로 폭이 넓어 오가는 차량이 서로 갓길로 피하지 않고 제 속도로 달릴 수 있다. 버스 안에는 '넓은 포장도로 시속 80km, 나머지 도로 시속 60km'라는 속도 제한 스티커가 붙어 있다. 정류장에서 버스가 다시 출발하자마자 오른쪽에 '월드비전(World Vision)'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국제 구호단체 월드비전이 지원하는 마을이다.
조금 지나다보면 왼쪽으로 하얀 돌가루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광산이 보인다. 그 유명한 석면 광산이다. 건축자재와 방화재 등에 사용되는 석면은 최근 폐질환 등 인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는 광물이다. 석면은 세계 생산량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짐바브웨의 주요 수출품이다.
은제주 리버(Nzeju River) 다리를 건너는데, 폭은 넓지 않은데 푸른 물이 제법 많이 흐른다. 모잠비크 테테 지역의 잠베지 강을 제외하고는 물이 많은 강이다. 근처에 토마토 농사를 많이 짓는지 길가에서 토마토를 파는 행상들이 마을입구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다.
버스 운전사와 차장도 10여개가 든 토마토를 한 봉지씩 사서 운전석 앞 유리창에 넣고 달린다. 운전사는 노래를 좋아 하는지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흥에 겨워한다. 불라와요 가까이 다가오니 언덕길에는 트럭 등 느린 차량이 다니도록 3차선 길이 별도로 만들어져 있었다. 불라와요 근교는 아예 도로 자체가 3차선으로 넓다.
살인적 인플레의 장면을 보여주는 기차역 매표소버스가 불라와요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 45분. 불라와요 시내에는 어둠이 이미 몰려와 거리도 잘 보이지 않는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저녁 7시 빅토리아 폭포로 가는 열차를 타고 짐바브웨를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택시운전사에게 “미국 달러밖에 없으니 달러로 요금이 얼마냐”고 물었다. 미국 돈 5달러를 내란다. 일반적인 거리로 치면 2배 이상 비싼 요금이지만, 하라레 운전사와 달리 미국 돈을 받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짐바브웨에서는 환율 때문에 택시 타는 것은 두려운 그 자체이다.
가까스로 저녁 7시쯤 기차역에 도착했다. 기차역에는 표를 사려는 승객들이 길게 줄 지어 있었다. 기차역 안의 매표소에서부터 역 밖으로 60여m나 된다. 마치 뱀처럼 구불구불 서 있다. 내 예상대로 저녁 7시에 출발하는 빅토리아 폭포 행 열차는 1시간 저녁 8시에 출발한다. 아프리카 열차는 보통 몇 시간씩 지연되기 때문에 늦었다고 포기하지 말고 일단 역으로 가보는 것이 좋다.
매표원에게 물으니 1,2등석은 모두 팔렸고, 3등석 밖에 없단다. 마침 금요일 주말이라 승객들이 많다. 나는 긴 줄의 맨 끝에 섰다. 3등석 요금은 84만 짐바브웨달러. 기차 매표소 앞에는 2006년 7월 4일자로 열차 요금이 인상됐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바로 24일 전에 요금이 올랐다. 2등석 요금은 130만 짐바브웨달러였다.
내가 가지고 있던 6개월 전의 여행 정보에 따르면 2006년 1월 현재 불라와요에서 빅토리아 폭포까지의 2등석 요금이 47만 짐바브웨달러였다. 2등석 요금기준으로 볼 때 6개월 사이에 열차 요금이 거의 3배나 올랐다. 예측 불가능한 짐바브웨의 물가는 서민들의 발인 기차 요금에서도 알 수 있다.
매표소 여직원 옆에는 승객들로부터 받은 요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잔돈으로 요금을 내는 승객은 여직원에게 표를 사기 전에 옆에 있는, 돈 세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남자직원에게 계산을 해야 한다. 남자직원은 은행에서 사용하는 자동 지폐 계산기를 갖다 놓고 돈 뭉치를 세고 있었다. 짐바브웨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현장을 보려면 기차역의 매표소에 가라. 매표소 직원이 돈 뭉치에 깔려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산더미 같은 돈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불라와요는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의 주요 무대빅토리아 폭포로 가는 승객들로 붐비는 불라와요 기차역은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이집트 카이로까지 아프리카 종단열차를 건설하려는 야심에 찾던 세실 로즈의 작품이다. 이미 1897년 남아공 케이프식민지에서 올라오는 불라와요 철도는 완공되었고, 이어 빅토리아 폭포까지 가는 철길은 1905년에 이르러 완성된다.
불라와요(Bulawayo)는 짐바브웨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나도 인플레이션에 쫓기지만 않았다면 불라와요에 며칠 머물며 비운의 은데벨레족 왕국의 궁전인 로벤굴라 크랄(Kraal)과 철도 박물관을 구경하고, 근처의 마토보 국립공원 등도 찾아볼 참이었다.
영국의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의 무덤도 바로 불라와요에서 남쪽으로 33km 떨어진 마토보 국립공원의 산 정상에 묻혀 있다. 세실 로즈가 죽어서도 짐바브웨에 묻히고 싶어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세실 로즈의 제국주의 꿈을 완성시킬 주요 무대였기 때문이다.
남아공 케이프식민지에서 다이아몬드와 금광사업으로 돈을 번 세실 로즈는 1888년 짐바브웨를 손에 넣은 다음 같은 해 잠비아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등 중앙아프리카 지역까지 손길을 뻗치기 시작한다. 남아공과 짐바브웨, 잠비아, 보츠와나, 말라위까지 포함하는 ‘남아프리카 연방’이라는 세실 로즈의 대식민지 구상의 중심에 짐바브웨가 있었다.
짐바브웨 2대 부족인 은데벨레족(또는 마타벨레족)은 불라와요를 수도로 마타벨렐란드라는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세실 로즈는 ‘영국의 남아프리카 회사’를 내세워 마타벨레란드의 왕 로벤굴라로부터 광업권을 빼앗은 뒤 결국 로벤굴라를 유배시키고 죽게 만든다. 로벤굴라는 단순히 금광 채굴권만을 넘긴 것으로 생각했으나 뒤늦게 땅에 대한 소유권을 사실상 넘긴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분개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세실 로즈는 아프리카에서 항상 이런 식으로 식민지를 넓혀 갔다. 일단 광업권을 얻은 뒤 그 지역을 식민지하는 방식으로.
불라와요라는 말은 ‘학살의 장소’라는 뜻이다.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부족 간의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하라레가 최대 부족인 쇼나족(또는 마쇼나)의 도시라면, 불라와요는 은데벨레족의 도시이다. 옛 마쇼날란드의 중심도시였던 하라레에는 쇼나족이 많이 살고, 불라와요에는 은데벨레족이 많이 살기 때문이다.
짐바브웨는 동쪽의 쇼나족의 마쇼날란드와 서쪽의 은데벨레족의 마타벨렐란드로 나뉘어 부족 간 갈등이 있었다. 1970년대 쇼나족의 무가베와 은데벨레족의 조슈아 은코모가 각각 자기 부족을 배경으로 영국에 대한 별도의 독립투쟁 조직을 이끌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백인이 짐바브웨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짐바브웨는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의 실험장이었다. 세실 로즈(1853~1902)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했던 말이다.
“우리는 나날이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 그들이 공장이나 광산에서 생산하는 상품을 팔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영 제국의 4000만 인구가 피비린내 나는 내란을 겪어야 할 것이다.”세실 로즈의 이 말은 제국주의에 대한 백과사전이다. 이미 아프리카 대륙에서 주인으로 살고 있던 아프리카인은 영국의 이익을 위해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영국이 아메리카의 인디언과 스페인이 남아메리카의 원주민에게 했던 것과 똑같지만, 그나마 아프리카는 주인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흑인의 나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태양 주위를 도는 화성과 목성 등 행성과 밤하늘을 떠도는 유성조차도 지구의 식민지로 만들지 못한 것을 세실 로즈는 평소 슬퍼했을 정도이다. “유성들이 저렇게 똑똑히 보이는데도, 너무 멀리 있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고 아쉬워했다. 세실 로즈의 제국주의적 팽창욕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세실 로즈의 시신은 죽은 뒤 유언대로 남아공 케이프식민지에서 옮겨져 그가 평소 아름다운 광경에 취해 아예 지명 자체를 ‘세계의 풍경(World's View)’이라고 이름 붙인 마토보 언덕의 정상에 묻혔다. 마토보 언덕은 1897년 은데벨레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세실 로즈가 비무장으로 은데벨레족의 요새를 찾아가 담판을 지어 전쟁을 종식시킨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실 로즈가 묻힌 마토보 정상은 은데벨레족이 ‘신령이 사는 곳’으로 신성시하는 곳이어서 죽어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짐바브웨는 영국인에게 남아공과 함께 백인국가를 만들기 위해 매력적인 나라였다. 금과 다이아몬드 등 광물자원과 대규모 농장을 통합 플랜테이션, 고원지대의 시원한 기후 등이 백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로디지아-니아살란드 연방’에서 지난 1964년 북로디지아는 잠비아로, 니아살란드는 말라위로 독립시키면서도 짐바브웨에 대해서는 소수 백인들이 로디지아라는 이름으로 1980년까지 백인정권을 유지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프리카 열차 3등 칸에 오르다
저녁 8시가 되자 열차는 불라와요를 출발했다. 정상적으로 운행되면 다음날 오전 9시 30분에 빅토리아 폭포 역에 도착한다. 보통 13시간 30분 걸리는 거리이다. 열차에 오르니 이미 이코노미석이라는 3등석은 모든 객차가 현지인들로 꽉 차고 입석도 만원이어서 발 디딜 틈이 없다. 3등 칸에는 외국인이라고는 나 혼자이다. 현지인들도 정말 돈 없는 서민들만 타는 곳이 아프리카 열차의 3등 칸이다. 그만큼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배낭을 메고 13시간이나 서서 갈 수도 없고, 열차 선반도 현지인들의 짐으로 꽉 차 공간이 없어 배낭을 올려놓을 수도 없고 난감하다. 역시 비어 있는 장소는 화장실 옆 밖에 없다. 냄새가 나니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배낭을 가랑이 사이에 내려놓은 나는 객차와 객차를 잇는 화장실 근처 복도에 서서 가기로 했다.
아프리카 3등 열차의 선반은 사람 뿐 아니라 짐도 순식간에 만원이다. 현지인들이 보통 2~3개의 짐 보따리를 들고 타니 늦게 오르면 꼼짝없이 짐도 복도 바닥에 내려놓고 가야 한다. 보따리 장사들도 많고 일반 승객도 도시에서 각종 생필품을 한꺼번에 많이 사오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열차의 3등 칸은 정말 타보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북새통이요, 술을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난장판이고, 시끄러운 시장터이다. 열차에 올라타자마자 아프리카 열차의 3등 칸은 진면목을 보여줬다. 열차 칸을 이동하려는 승객이 비좁은 통로를 통해 다른 객차로 가려니 어깨와 엉덩이가 부딪치고 으깨진다.
열차가 움직이자 통로에 서 있던 승객들은 이리 쏠렸다가 저리 쏠렸다 하면서 파도타기를 한다. 나라고 예외가 아니다. 화장실 통로 옆에서 몸을 이리저리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프리카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외국 여행객이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열차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화장실 바로 앞자리의 현지인이 나에게 같이 앉자고 권한다. 60대 후반의 노부부와 어린 손녀이다. 노부부는 좌석 한 줄에 5살 정도 된 손녀와 함께 앉았는데, 할머니가 손녀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나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내가 미안해 “괜찮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우리는 2시간 정도 가면 내릴 것”이라며 다시 권했다. 나는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여행할 때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젊은이보다는 나이 드신 어른들이다. 아마 객지 떠난 자식 같은 애틋한 생각도 들겠지만, 인생을 통해 남에 대한 배려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손녀가 무릎 위에서 자는 바람에 할머니는 손녀를 끌어안고 가야하는 고통을 당했다.
2시간 정도 되어 열차 역에서 할아버지가 여전히 자고 있는 손녀를 업고서 내렸다. 내가 “고맙다”고 인사하자 노부부는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인생은 그 자체가 여행이다”는 말이 생각났다. 손녀를 안고 열차에서 내리는 아프리카 노부부를 보면서 왜 이런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을까.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뜻하지 않은 호의를 받는다는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아프리카 노부부를 보면서 나도 저런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혹시 가수 이상은이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라고 읊조렸던 것처럼 인생도 먼 훗날 ‘언젠가’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아프리카 노부부가 열차에서 내린 뒤 내 귓가에는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노래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세월이 흘러감에 흰머리가 늘어가네. 모두 다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 물론 이 노래는 애초 블루스 기타리스트인 김목경이 처음 부른 노래지만. 주름진 얼굴의 아프리카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와 함께 흰머리의 할머니 손을 잡고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라고 부르지만, 할머니의 손은 점점 멀어져 갔다.
북극을 달리는 아프리카 열차의 3등 칸어두운 밤인데도 기차역에는 차창을 통해 물건을 팔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행상들은 손으로 야채를 높이 들어 기차안의 승객들에게 보여준다. 내 바로 앞의 30대 중반 여자는 창문을 통해 파 한 묶음과 다른 채소 두 묶음을 샀는데, 열차가 출발하자 지갑에서 10만 짐바브웨달러 지폐를 꺼내 창문을 통해 던져서 준다. 사실 열차 안에 탄 승객 입장에서는 물건을 받았으니 돈을 주지 않거나 적게 줄 수도 있겠지만, 신의성실의 원칙은 아프리카 3등 칸에서 잘 지켜지고 있었다.
밤 12시가 되자 열차 안은 아예 야시장으로 변했다. 여기저기 승객들이 열차 바닥에 주저앉아 술을 꺼내 마시기 시작한다. 열차를 타면서 몰래 가져온 술과 안주다. 순식간에 열차 안은 포장마차로 바뀌었다. 바구니에 빵과 음료수, 비스킷, 과일 등을 담은 행상이 복도를 오가며 물건을 사라고 큰소리로 외친다.
잠시 뒤에는 한 중년의 승객이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며 열차 안을 배회하고, 젊은이 5명은 한 무리를 지어 군가를 부르듯 합창을 하며 객차사이를 행군하고, 어떤 승객은 뭐가 기분 나쁜지 화장실 문을 발로 차고 지나가고, 또 다른 승객은 심사가 뒤틀렸는지 애꿎은 열차 선반에 대고 욕을 하고 지나가고, 열차 표를 검사하는 차장도 검사에는 관심이 없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 중얼거리며 떠벌린다.
복도에 앉아 술을 마시던 승객 2명은 무엇이 어긋났는지 삿대질을 하며 싸우는데 멱살 잡기 일보직전이다. 급기야는 한명이 구토하기 시작한다. 술과 먹은 음식이 함께 뒤범벅이 된 내용물을 게우니 역한 냄새가 진동한다. 다른 객차도 모두 꽉 차 옮길 수도 없다. 여행책자에도 여행객들은 가능한 3등석을 타지 말도록 권고하고 있다. 아프리카 열차 3등 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이다.
열차 출입문도 오래되어 내가 탄 3등 칸의 왼쪽 문은 아예 떨어져 나갔다. 이 문을 통해 새벽의 차가운 초겨울 바람이 통째로 들어온다. 달리는 열차와 새벽바람이 만나니 가속도가 붙어 시베리아의 겨울 강풍이 된다. 살에 박히는 차가운 바람은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꽂히는 듯하다. 아프리카 열차가 아니라 한 겨울 빙하지대를 달리는 시베리아 열차이다.
시끄럽고 역한 냄새가 나는데다 시베리아의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열차 안은 북극이다. 잠이 올 리 없다. 아니, 잘 수가 없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의 기숙사식 건물에 이어 이틀 밤을 추위에 떨어야 했다. 내 옆의 40대 아주머니도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아기를 안고 탔는데, 찬바람이 들어오자 아이 눈만 남긴 채 이불로 겹겹이 싸고도 안절부절 못한다.
새벽 2시가 되었는데도 기차역에 정차할 때마다 승객들은 내리고 타기를 반복한다. 신기한 것은 안내방송도 없는데, 어두운 밤에도 자신이 내릴 기차역을 승객들은 정확히 알고 있다. 아프리카 야간열차는 정차했다 출발할 때 “뿌~웅”하는 기적소리를 한번 낼 뿐 어떤 안내방송도 하지 않는다. 승객들이 알아서 미리 미리 내릴 역을 준비해야한다.
빅토리아 폭포 기차에서 맛보는 열차 사파리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 6시가 되자 열차는 황게(Hwange)라는 이름의 기차역에 정차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면서 열차는 조용한 평상으로 돌아왔다. 많은 승객들이 내리고 종착역인 빅토리아 폭포 역에 가는 승객만 남았다. 도떼기시장 같던 열차 안도 어느새 빈자리가 여기저기 생기면서 조용해졌다.
차가운 바람과 역겨운 냄새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우리 칸의 승객들은 하나둘 일어나 옆 칸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나도 배낭을 메고 앞 객차로 자리를 옮겼다. 한결 살 것 같다. 냄새도 없고, 차가운 바람도 정면으로 쐬지 않으니 몸도 따뜻해졌다.
차창 밖의 풍경이 달라졌다. 사바나 초원이다. 나무들은 대부분 누렇게 단풍이 들었고, 조그만 연못 같은 개울물에는 20여 마리의 원숭이 떼들이 몰려들어 새벽 물을 마시고 있었다. 탄자니아의 타자라 열차에서 보지 못했던 열차 사파리를 빅토리아 폭포 열차에서 경험한다. 지금 열차가 달리는 곳은 코끼리가 많기로 유명한 황게 국립공원이다. 열차를 타고 가면서 야생동물을 볼 때 정말 아프리카를 달리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밤새 움츠렸던 몸이 황게 국립공원의 사바나 초원 위에 떠오르는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활기를 되찾았다. 원숭이들도 여기저기 나타나서 나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따가운 햇살을 받자 열차의 속도도 빨라지는 느낌이다. 나도 그렇고, 열차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생기를 되찾을 무렵 기차는 잠비아 국경의 빅토리아 폭포 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기차가 멈추자 시계는 오전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 13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참, 독특한 아프리카 열차의 3등 칸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