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령은 상대가 동학의 일원인지 몰래 숨어있던 관군의 끄나풀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살아있는 사람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울 지경이었다. “나 살아 있소!” 김학령은 목을 놓아 소리쳤다. 너무도 힘찬 외침이기에 상대방은 다시 한번 놀라서 주춤거렸다. “동학이면 거 조용히 하시오.” 상대방은 손에 든 무기를 땅에 내려놓고 다가왔다. “주위에 아직 관군이나 왜놈이 있을지 모르오.” 김학령은 마침내 으스름 달빛에 비친 상대방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몹시도 얽은 얼굴에 비쩍 마르면서도 키가 큰 사내가 김학령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다쳤소?” 김학령은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난 보령 사는 강시우요.” “김학령이오.” “뭐 좀 먹겠소?” 강시우는 품속에서 비상식량으로 지닌 떡 한 조각을 꺼내어 김학령에게 내밀었다. 떡은 딱딱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마른 입안에서도 굴려 먹을 수 있었다. “해가 뜨면 다시 관군이 올지 모르오. 게다가 사방이 시체니 일단 이 자리를 뜹시다. 움직일 수 있소?” 김학령은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서 보았다. 오랫동안 누워 있었기에 온 몸이 굳어 있었지만 그런대로 쩔룩거리면서 걸을 수는 있었다. 강시우는 김학령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어깨 위로 올리고서 부축해 갔다. “어디로 가는게요?” 김학령은 다리의 고통을 참으며 강시우에게 물었다. “나도 모르겠소. 허나 어딜 가도 여기보다는 나을 게 아니오?” 멀리서 들개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누워 있었다면 들개들이 시체를 뜯어먹는 못 볼 광경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학령은 구역질이 났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난 거요?” 강시우의 물음에 김학령은 자신을 살려준 이름 모를 병사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거 천운이구만 천운! 하긴 관군이고 왜놈이고 간에 이런 끔찍한 마당을 보고 기분이 좋을 리 있겠소. 허허허.” “그런데 연배가 어떻게 되시오?” 김학령의 물음에 강시우가 그를 힐끗 쳐다본 후 대답했다. “이제 이십하고도 여덟이오.” “암만 봐도 나보다 위엣 연배로 보이기에 한 소리였소. 내 형님이라 부를 테니 말씀 놓으시오.” “허, 그랬군, 아우.” “예, 형님.” 김학령과 강시우는 한동안 말없이 얕은 산기슭을 올라가 넘기 후 잠시 쉬어갔다. “형님은 어떻게 살아 남으시었수?” “나?” 강시우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죽은 사람들 속에 숨어 있다보니 그냥 지나치더군.” 김학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시우의 몸을 살펴보았다. 강시우는 피와 흙이 묻은 더러운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별다른 상처를 입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거 참 그 와중에 상처하나 없다니.’ 김학령은 조금 의문이 들긴 했지만 더 이상은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우금치 고개를 향해 빗발치는 총탄 사이로 달려 들어갈 때 누군들 겁이 안 났으랴.’ 그 혼란의 와중에서 엎드려 숨을 곳부터 찾았다고 해도 그것은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인간의 본능일 뿐이라고 김학령은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해 자꾸 캐묻는 것은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김학령은 여겼다. “자, 아우 어서 가지. 아직 그곳에서 멀리 가지 못한 듯 하이.” 강시우는 왠지 모르게 우금치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김학령은 아픈 다리와 피곤한 몸으로 인해 아무 곳에서나 쉬고 싶었지만 강시우의 부축을 받으며 억지로 일어 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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