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는 어느새 무게가 담겨 있었다. 능효봉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능효봉이 매우 달라졌음을 느꼈다. 알지 못할 위압감과 진중함에서 비롯된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호오. 이제야 자신의 내력을 밝히는 것인가? 구룡과 관계가 있는 자가 아직 살아있었다니 정말 뜻밖이군.”
상만천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려 걸어 나오고 있는 능효봉을 바라보았다. 내력이 의심스러운 자였는데 역시 구룡과 관계있는 자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일어난 순간을 이용해 어느새 함곡은 천과의 손에 넘어가 있었고, 풍철한과 선화에게 당했던 흑영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풍철한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막상 마주서자 흑영의 키는 보통사람보다 큰 체구를 가진 풍철한보다 훨씬 컸다.
“재보께서는…잠시…물러나…주시겠소?”
보이지도 않는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정말 기괴했다. 마치 동굴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약간 울림이 있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마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는 고막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였다.
“…”
상만천의 얼굴에 미세하고 빠르게 약간 불쾌한 기색이 스쳐지나갔지만 더 이상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마 이곳에 있는 다른 인물들 중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상만천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또한 그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허나 상만천은 오히려 흑영에 대해 양보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굳이 버릇이 없다고 탓할 존재도 아니었고, 자신이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군.”
상만천은 말과 함께 흑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모든 사람들은 흑영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전신은 물개의 가죽과 같은 것으로 만들었는지 매우 질기고 매끄러워 보이는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고, 눈 아래로 면사와도 같은 것으로 얼굴을 대부분 가리고 있어 눈 부위만 보였는데 눈동자가 보이지 않은 채 움푹 파여 눈이 안 보였다.
“나는…저 년놈들을…용서하지…않겠소.”
어느새 지혈을 완벽히 한 것일까? 분명 풍철한의 검에 맞고 피를 흘렸던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배어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검에 베인 상처는 아무리 혈도를 눌러 지혈을 한다 해도 피가 조금씩은 배어나오기 마련이고 그래서 금창약으로 상처를 덮는 것이 보통.
적지 않은 검상을 입었음에도 그럴 시간도 없었는데도 피가 배어 나오지 않음은 이상한 일이었다. 더구나 선화의 소수인장에 당해 피를 뿜어냈다는 것은 심한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는데 목소리에는 전혀 내상을 입은 것 같지 않으니 웬일일까?
“저 괴물이 누군지 이제야 알겠군.”
귀산노인이 침음을 흘렸다. 노인의 얼굴은 매우 어두워져 있었다. 우슬 역시 그 말에 누군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끄떡였는데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도 그늘이 지고 있었다.
“흑교신(黑峧臣). 위충현 태감이 밟는 땅 아래에는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그자로군요.”
중원을 한 손에 틀어쥐고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른다는 위충현 태부에게는 모두 열다섯 명의 호위(護衛)가 있다. 위충현이 있는 곳이라면 침실마저도 떠나지 않는다는 이신사교구위(二臣四轎九衛)가 그들이었다.
이신은 위충현 태부의 보이지 않는 신발로 알려진 인물들. 그 중 하나가 바로 지금 모습을 보인 흑교신이었다. 사교는 위충현 태부의 교자를 메고 다니는 인물 넷을 가리키고 구위는 위충현 태부를 완벽히 보호하는 아홉 명의 위사들을 말함이다.
무엇보다 위충현 태부의 주위에는 반드시 암향부동(暗香浮動)의 매화향기가 감돌고 그가 걷는 땅 아래에는 반드시 흑교신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 절대 위충현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흑교신이 여기에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그렇다면 암향부동화(暗香浮動花) 매교신(梅峧臣)도 여기 어딘가에는 있겠군.”
위충현의 신발(峧)인 흑교신과 매교신은 거의 한 몸이라고 할 정도의 남녀. 모습을 보인 적이 거의 없는 그들은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하니 어쩌면 이곳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특히 암향부동화 매교신은 명호 그대로 은은한 매화향기가 주위로 퍼져나가는 특징이 있는 여인. 허나 매화향기를 맡을 때쯤이면 이미 숨이 끊어지는 순간이라고 알려져 있는 살귀(殺鬼).
그것은 모습을 보는 순간 숨이 끊어진다고 알려진 흑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마 흑교신의 목적이 함곡의 확보였기 때문에 풍철한과 선화의 공격을 맨 몸으로 받아낸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다 보니 상만천의 말대로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지친 몸으로는 풍가가 저 자를 당해내기 힘들어. 저 자는 인간의 몸이 아니야.”
상처가 나도 금방 아물고, 내상을 입어도 피를 한 번 토해내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괴물이 바로 흑교신이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는 죽은 시체라도 오체분시(五體分屍) 해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괴물이었다. 왜 상만천이 양보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귀산노인이 이 말을 던진 이유는 풍철한을 자극하려기보다는 조심하라고 경각심을 높여주려는 것이었다. 허나 어디 풍철한이 그런 것에 위축되고 물러날 인물인가? 오히려 의도와는 다르게 풍철한을 자극하는 말이 되었다.
“핫핫. 모가지가 부러지고 나서도 살아있는지 한 번 보지.”
말과 함께 풍철한이 한 발 나섰다. 그 순간 흑교신의 깊고 어두운 눈 부위에서 섬광이 번쩍하면서 쏘아 나왔다. 정말 소문대로 상처를 입어도 금방 아물고, 내상을 입어도 피 한 번 토해내면 정상으로 돌아오는 인물 같았다.
그때였다. 이미 천과의 수중에 있는 함곡이 소리쳤다.
“그만 두게나! 능대협도 잠시 멈추고.”
비록 영어(囹圄)의 몸이지만 함곡을 무시할 사람은 이곳에서 아무도 없는 터. 천과마저도 함곡의 아혈을 제압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함곡은 다가오던 능효봉이 걸음을 멈추고 풍철한마저 자신을 주시하자 미소를 베어 물었다.
“시정잡배들이 패싸움이나 하는 것처럼 우당탕 해버리면 너무 재미없지 않은가? 이곳은 마침 이름도 그럴싸한 생사림이란 말이네. 생과 사가 교차하는 곳이지.”
본래 말투가 아닌 풍철한처럼 고의로 거친 말투를 사용하는 것 같았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허나 분명한 것은 붙잡힌 몸이지만 함곡에게 여유가 있다는 것이고, 아직 그의 두뇌 회전이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 안에서 생과 사를 결정짓는 것이 너무나 적절하지 않겠나? 한 두 가지 규칙을 세우고 이 안에서 술래잡기를 해보란 말이네.”
“술래잡기?”
“누가 술래가 되든 상관없네. 서로 역할을 바꾸어도 물론 상관없지. 다만 이 안에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하네. 살고 싶은 사람은. 그리고 이 싸움에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생사림 밖으로 나가면 그만이고. 생사림을 벗어나는 순간 이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