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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가을 빨래


지금이 가을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젯밤, 그리고 오늘낮, 집에 있는 온도계를 보니 16∼17도입니다. 햇살이 내리쬐는 바깥은 20도를 넘길까요? 오늘은 며칠 만에 해가 얼굴을 내밀고 있어서 부랴부랴 이불을 걷어서 담벼락에 널어 놓습니다. 그러고는 머리를 감고 웃도리와 수건 빨래를 합니다. 온도계로는 가을이라 그런지 이른새벽이나 이른아침에는 머리감기 힘듭니다. 이제 막 가을 문턱을 넘어서서 그럴 텐데, 조금 지나면 익숙해지겠지요. 한겨울에도 찬물로 머리를 잘만 감아 왔으니까요.

 

 빨래는 집안에 널어 놓은 다음, 머리카락 물기를 조금 털어내고 마당으로 나와 해바라기를 합니다. 갈비뼈처럼 보이는 양털구름이 좋아 보여서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앞집 하나 건너에 있는 기찻길로 전철이 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요새는 전철길을 따라 길게 울타리가 놓여서 시끄러운 소리를 조금이나마 막아 줍니다. 이 울타리조차 없던 지난날에는 기찻길 옆 사람들은 우예 살았을까요. 아니, 지난날에는 기찻길 옆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리 공해’에 시달린다는 생각을 아예 안 했겠지요. 생각해 보면, 기찻길이든 넓은 찻길이든 가난한 사람들 살림집을 밀어내고 죽 밀어붙였어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모여살던 마을은 그예 두 동강이 나서 얼결에 남북, 또는 동서로 갈린 채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처럼 되고 맙니다. 때때로 고속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이 고속도로 왼편과 오른편으로 갈린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오갈 수 있을까 싶어 가슴이 짠합니다. 어쩌면, 두 마을 분들은 서로 오갈 일이 없을지 모르겠고, 고속도로로 나뉜 지 오래되어서 서로 오갈 일도 사라졌는지 모르겠어요.

 

 잠깐 동안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데에도 머리카락 물기가 거의 다 마릅니다. 웃도리를 들고 도서관으로 내려옵니다. 물 한 잔 마시고 책상 앞에 앉습니다. (2007.10.10.)

 

 

ㄴ. 고추잠자리


 창가로 밝은 빛이 스며든다. 늦었나 싶으면서도 몸이 고단하여 조금 더 눕는다. 그러다가 이제는 더 어기적거리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일어나서 시계를 본다. 여덟 시 반. 히유. 그다지 늦은 편은 아니구나. 열 시가 넘은 줄 알았는데.

 

 기지개를 켜고 찬물 한 잔 마신다. 씻는방에 들어가서 낯과 손을 씻은 다음, 어제 담가 놓은 빨래를 세 가지만 한다. 닷새 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다닌 탓에 몸이 많이 찌뿌둥하다. 잠도 모자라다. 다음 한 주는 집에서 멀리 나가는 일을 줄여야겠다. 밀린 일도 많고.

 

 빨래 두 가지는 집안에 넌다. 하나는 마당으로 들고 나와서 빨랫줄에 건다. 잠깐 해바라기를 한다. 아침햇살은 늘 따뜻하고 반갑다. 담벽에 기대어 이웃집 지붕을 바라보고 있자니, 고추잠자리 세 마리가 잰 날갯짓을 하며 내 옆쪽 담벽에 앉는다. 잠자리가 나오는 철인가. 지난달에도 잠자리 한 마리 보았는데. 가만히 잠자리를 들여다보다가 사진기를 꺼내 와 몇 장 찍는다. ‘좀더 가까이’를 생각하며 살살 다가서니 호롱 하고 날아간다. 먼곳 사물을 잡아당겨 찍는 렌즈가 없으니 아쉽다. 도서관으로 내려와 창문을 하나씩 열고 물을 반 잔 마시고 밀린 설거지를 한다. 조금 있으니 배가 살살 아파서 책 한 권 들고 살림집으로 올라가 뒷간에 들어간다. 책을 펴고 똥을 눈다. 개운하게 볼일을 마치고 나온다. 마당 담벽을 슬그머니 바라본다. 고추잠자리는 한 마리만 보인다. (2007.10.5.)

 

 

ㄷ. 책 사는 일


 조금 비싸게 산 책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책값만큼, 또는 책값보다 더 큰, 아니 책값으로는 가 닿을 수 없을 만큼 즐거움을 얻어서, 내 둘레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돈 몇 푼으로도 내 삶이 넉넉해지고 아름다워지겠지. (2007.9.18.)

 

ㄹ. 나한테 책읽기는


 나한테 책읽기는, 누구한테든 어느 것이든, 내가 제대로 모르거나 미처 몰랐거나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거나 자칫 지나쳐 버렸거나 손쉽게 생각하며 넘겨 버렸거나 거의 거들떠보지 못했거나, 아직 마음쓰지 못했던 모든 것을 고개숙여 배우는 일입니다. (2007.9.8.)

 

ㅁ. 좋은 책을 찾는 방법


 “알려고 하니까, 진짜 알아지는 기회가 오는데. 알아진 것 같지만, 고기 안에서 안주하려고 하면 알 수 없어.” (헌책방 〈아벨서점〉 아주머니 말, 2007.9.5.)


 좋은 책이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좋은 책을 나누는 잣대 또한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한테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일지, 또 자기 이웃한테도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일지, 자기 식구와 동무들한테 어떤 책이 좋을지를 깊이깊이 헤아리고 꾸준하게 살피고 두고두고 살피노라면, 저절로 눈이 트여서 책이 보입니다. 아니, 책이 우리 눈앞에 와서 엥깁니다. (2007.9.6.)

 

 
ㅂ. 책을 읽으면

 어제 낮, 헌책방 나들이를 하려고 서울로 전철을 타고 가는 길에 《하종강-길에서 만난 사람들》(후마니타스,2007)을 읽습니다. 73쪽, 다큐멘타리 영화를 찍는 태준식 감독 이야기를 읽다가 한동안 책을 덮습니다.

.. 그렇다. 사람은 ‘사상’이 아니라 ‘삶’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

 볼펜으로 꾹꾹 눌러 가면서, 책에 몇 글자 적습니다.
 
 사람은 그이가 써낸 책이 아니라, 그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로 평가를 받는다. 《무소유》라는 책이 아니라, 이 책을 쓴 분이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삶이 아닌 책으로 사람을 따진다.
 
 사람은 그이가 번 돈이 아니라, 그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돈을 쓰며 살았느냐로 평가를 받는다. 재산이 얼마요 땅이 얼마가 아니라, 그만한 돈을 번 사람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했고, 이렇게 번 돈을 어디에서 누구하고 어떠한 일을 하는 데에 썼는가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그이가 무슨 짓을 했고 말고는 헤아리지 않고 돈크기가 얼마이냐만으로 사람을 잰다.
 
 사람은 그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동무나 이웃이나 피붙이)이 아니라, 그이가 어디에서 누구와 어울리며 함께 일하고 노느냐로 평가를 받는다. 이름난 사람, 힘있는 사람, 돈있는 사람과 가까이 지낸다고 해서 이름이 나거나 힘이 있거나 돈이 있지 않다. 훌륭한 사람을 많이 알고 지낸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들 책을 많이 읽어서 알고 있다고 해서 그이도 훌륭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그이가 옆에 어떤 사람을 가까이 두고 있느냐를 놓고만 사람을 살핀다.
 
 사람은 그이가 얻거나 갖춘 지식이나 학벌이 아니라, 그가 어디에서 누구와 자기 지식을 베풀거나 나누었는가로 평가를 받는다. 아는 것 많아 똑똑하다거나 높은 학교를 마쳤다거나 나라밖으로도 공부를 다녀왔다고 해서, 그이가 세상을 좀더 두루 살펴볼 줄 알거나 깊이 파헤칠 줄 알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퀴즈대회에서 우승하고, 졸업장이나 자격증 숫자가 많으며, 온갖 어려운 학술 낱말로 자기를 감싸는 사람이 대단한 무엇을 보여주고 있기라도 한듯 떠벌리고 부풀린다. (2007.8.10.)
 

#책이 있는 삶#책 날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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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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