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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촬영 제자와 가족이  은사를 회고하며 기념촬영을 했다.
기념촬영제자와 가족이 은사를 회고하며 기념촬영을 했다. ⓒ 이명옥

2007년 10월 11일 오후 5시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2층 마로니에 홀에 반백의 신사들이 소리 없이 모여든다. 농부 철학자로 더 잘 알려진 전 충북대 철학과 교수 윤구병(변산공동체 대표) 선생의 소탈한 모습도 보인다.

제자 최화(경희대 철학과)) 교수가 '한국의 소크라테스, 세계적인 명품'이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 한국 철학계의 거목 소은 박홍규 교수 전집 완간을 기념하는  출판기념회장 전경이다.

박홍규 전집 전 5권은 그가 손수 엮은 제1권을 제외하면 제자들이 녹음해 소장하던 토론형식 강독 육성 녹음을 그대로 푼 것이다. 완결편이 된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강독> 역시 1981년부터 3년에 걸쳐 토요일마다 진행된 그의 강의를  류종렬 박사가 녹음해 소장하던 22개와 이정호 교수(한국방송대)가 갖고 있던 4개, 모두 26개 강의를 풀어 정리한 것이다.

소은 박홍규 교수는 많은 면에서 소크라테스와 닮은 점이 많다. 저작 활동 대신 애정을 다해 제자들을 길러낸 점, 치열한 사유에 몰두하느라 일상사에 소홀했던 점, 열린 사고, 치열한 논쟁과 토론식 수업으로 제자들 스스로 치열한 사유를 통해 깨달음을 더해 가게 한 점 등이다. 

그의 제자들 역시  플라톤을 비롯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아주 흡사하다.  마지막  병상을 제자들이 돌아가며 애정을 다해 지킨 점, 스승의 유고를 지켜 그들 또한 제자를 기르는데 전념한 점, 스승이 사유를 통해 일궈 놓은 커다란 틀과 사상을 정리하고 그 틀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학문적 토대를 일구어 가는 점 등이 그러하다.

추모 강연중인 윤구병(변산공동체) 선생 윤구병 선생이 '소은 선생님을 생각한다' 는 추모 강연을 통해 회고담을 들려주고 있다.
추모 강연중인 윤구병(변산공동체) 선생윤구병 선생이 '소은 선생님을 생각한다' 는 추모 강연을 통해 회고담을 들려주고 있다. ⓒ 이명옥

"선생님은 신문을 샅샅이 읽으시며 하루를 시작하셨고 누구보다 정확하게 현실을 읽어내는 예리한 시각을 지니고 계셨다. 하지만  대학 1학년의 눈에 비친 선생님의  모습은 너무나 한가하고 현실과 거리가 있어 보였다. 조금 더 철이 든 지금 생각해보니 선생님은 끊임없이 나름의 치열한 사유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거짓말을 하셨다. 가장 작은 하나이든 큰 하나이든 하나인 것은 말할 수 없다. 두 항을 대립해 놓고 나가는 것은 최소 단위가 둘인데 하나로 이야기 하라는 것이니 그 자체가 거짓이 아닌가?  선생은 아마도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징검다리가 되어 참된 이치를 깨닫고  이치에 기반한  참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사실 선생님은 얼마나 불친절한 분이셨는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플라톤  강독도 영어, 불어 독일어 원전을 가져다 놓고 라틴어 희랍어 원전, 영국 독일에서 나온 것들을 잔뜩 펼쳐 놓으시고 어떨 때는 한 두 페이지를 가르치시고 한학기가 끝나곤 했다. 게다가 이기적이리만치 행정 일을 도무지 맡아 보시려 하지 않았고 제자들을 어느 누구도 학교에 추천해 주실 생각조차 안 하셨다. 한 분 빼놓고는 그렇게 제자들을 다 내팽개치셨다. 계속 자기 공부만을 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유의 치열함이 모범이 되었고, 헌신적으로 고대철학을 가르쳐 주셔서 저마다 밥벌이를 하고 있다고 본다.

이제 좀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 선생은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합성하는 식물을 가장 온전한 생명체로 인식했다. 내가 사는 변산은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울려 있어 산 살림, 갯 살림, 들 살림을 두루 배울 수 있다. 한 나무에 맺힌 수많은 상수리 열매, 한 알로 수 백의 개체를 생산하는 볍씨, 수도 없이 많은 알을 낳는 숭어를 보며 그들의 욕망이 엄청나서 온 산을, 온 들판을, 온 바다를 자신의 개체로 덮으려는 것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자연과 소통을 하게 된 요즘 깨우친 것은 인간을 제외한 다른 자연계의 욕망은 지극히 단순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개체를 많이 생산하는가? 그것은 하나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른 자연에게 먹히기 위해서다. 다만 인간만은 먹기만 하고 도무지 먹히려 들지를 않는다. 즉 생명의 상생 작용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찰스디킨즈 소설에 모든 사람을 넌더리나게 만드는  고약한 인간이 있는데 그가  사경을 헤매자 그래도  생명을 살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정성을 다해 살려 놓았더니 생명의 기운이 살아남에 따라 못된 본성 역시 살아나 또 다시 살려 준 은인들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나  어린 아이를 주워서 잡아먹지 않고 젖을 먹여 키운 늑대이야기는 '생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생명의 비밀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한다. 내가 농사를 짓는 것도 어쩌면 식물을 가장 온전한 생명체로 인식한 박홍규 선생의 제자이기 때문이 아닐까?(웃음) 이제 이것으로 선생에 대한 추억담을 끝내려고한다  여기 오신 모든 분들께 감사한다.."

농사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스승의 사유를 현실에 접목시켜 풀어가고 있는 윤구병(변산공동체 대표)선생의 말이다. 그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한결 같이 소은 박홍규 교수를 순결한 철학정신을 지니고 치열한 사유의 삶을  산 이로 기억해 냈다

박홍규전집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강독간행으로 12년 만에 전집이 완간되었다.
박홍규전집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강독간행으로 12년 만에 전집이 완간되었다. ⓒ 민음사

이정호 교수(한국방송대 정암학당장)에게 전집 완간의 의의를 묻자  "선생은  고대 희랍 철학의 단순한 수용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자기 통찰을 통한 재해석으로  형이상학적 사유의 전형을 만들어 낸 분이다. 우리도 이제 서양 철학자가 아닌 조회할 수 있는  우리의 사상가 하나를 가지게 된 것이다.

행사를 준비하는 제자들 행사의 사회를 맡은 이정호 교수와 관계자들
행사를 준비하는 제자들행사의 사회를 맡은 이정호 교수와 관계자들 ⓒ 이명옥

선생님이 20년간 사유해 고대철학의 전체 틀을 놓았으니 전후세대들은 선생님이 세운 큰 그 기초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유체계를  발전시켜 나가야만  한다. 아직 제1세대인 우리는 그 큰 틀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아 가는  정도다. 선생님은 1세대 제자들에게 '번역조차 너희들은 하지 말아라. 제자들만 키우고 너희들은 더 공부해라' 당부하셨고 1세대들은 그 유명을 그대로 지켰다. 그동안의 공부를 기초로 제자들의 제자들이 플라톤의 <대화편> 같은 텍스트 번역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텍스트가 나오기 시작했으니 겨우 시작의 발걸음을 뗀 것이다"라는 말은 사유의 산물인 철학이 피와 살을 가진 철학으로  육화되는데 필요한 오랜 인고의 과정과 고통을  암시하는 듯했다.
첨부파일
박홍규교수는.hwp


#박홍규(아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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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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