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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전쟁> 책 표지 사진
<프레임 전쟁>책 표지 사진 ⓒ 창비
<프레임 전쟁>(죠지 레이코프·로크리지연구소 지음·나익주 옮김·창비)이 대선과 맞물려 정치권의 주목을 받고 있다.

레이코프는 책머리에서 “이 책은 미국을 진보적 이상의 길로 되돌리기 위한 장기적인 전략을 담고 있으며, 우리의 정치 활동 방식을 변화시키고, 미국이 진보적인 서민들과 교감하도록 도와주는 책”(10쪽)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진보적인 정치인 혹은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필독서처럼 느껴진다. 더 나아가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 정치에 나름대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충분히 유익하다.

주요 저자인 죠지 레이코프는 인지언어학의 창시자로 명성을 얻었고 인지주의 운동가로도 불린다. 이 책 또한 인지언어학의 개념적 은유 이론에 근거하여 서술되었는데, 이 이론을 정치에 적용한 레이코프의 분석은 앞서 나온 <도덕의 정치 Moral Politics>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Don't Think of an Elephant! >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레이코프가 MIT 재학 시절 노엄 촘스키의 제자였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지금 두 사람 모두 현실 정치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로 다른 도구를 들고 정치를 해부하고 있다. 촘스키는 언어학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날카로운 관점으로, 레이코프는 언어학에 기대어서 말이다.

레이코프는 <프레임 전쟁>을 통해 미국의 진보 세력이 선거에서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를 프레임의 부재 또는 프레이밍의 실패에서 찾았다. 평범한 사람들, 심지어 진보적인 시민들까지도 공화당에 투표하는 이유는 그들이 ‘진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진보세력이 자신들의 주장을 설파할 프레임을 제대로 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

이 책은 정확한 유권자 파악, 진보의 핵심 가치에 대한 성찰, 정치의 흐름을 결정하는 ‘심층 프레임’ 연구를 통해 진보주의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유권자를 설득해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필요한 핵심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심층 프레임'과 '표층 프레임' 과의 관계를 이해한 가운데 아래와 같은 인지과학의 교훈을 곱씹어 보는 것은 무엇보다 의미가 있다. 여기서 ‘심층 프레임’은 장기적인 과정에서 구축되는  어떤 가치와 원리로, ‘표층 프레임’은 단일한 이슈나 단기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는 것으로 이해하면 간편하다.

‘1. 프레임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사용된다. 2. 프레임은 상식을 정의한다. 3. 프레임은 반복을 통해 뇌 속에 주입될 수 있다. 4. 활성화는 표층 프레임을 심층 프레임에 연결하고 반대 프레임을 억제한다. 5. 기존의 심층 프레임이 하룻밤 사이에 변화하지는 않는다. 6. 이중개념주의자들에게도 당신의 지지자들에게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하라. 7. 진실만으로 당신은 자유롭게 되지 않을 것이다. 8. 상대편의 프레임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단지 그 프레임을 강화할 뿐이다.’

사실 한국의 현실도 미국의 그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레이코프의 프레임 분석틀로도 2007년 한국의 대선을 분석해 보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이 책은 읽는 모두를 초보 정치 분석가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 가운데 하나다. 그럼 레이코프의 틀로 한국의 대선을 분석해 보자.

'한반도 대운하' 비판으로는 부족하다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계속 50%가 넘는 고공행진을 기록하고 있다.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의 혼탁 속에 범여권 후보들과의 지지율 격차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명박 후보의 높은 지지율이 단지 범여권의 지지부진, 추태를 보이며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경선의 반사이익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국민 절반 이상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경제 프레임의 선점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시사IN> 창간호에 실린 여론조사 결과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신뢰도와 불신도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나 되는 52.7%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신뢰하는 인물로 꼽았고, 불신도는 2.4%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는 6.6%, 불신도는 21.2%에 달했다. 이 조사는 9월 6일에 실시되었는데, 이때는 ‘신정아 사건’과 ‘정윤재 의혹’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전이다.

이명박 프레임에서 허우적거리는 범여권 후보들

이명박 후보가 경제 대통령, 추진력과 실행력 등의 면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승계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이 여론조사 결과가 함의하는 바는 크다. ‘박정희=경제발전’ 프레임이 ‘박정희=독재’ 프레임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명박 후보를 향해 ‘개발독재’, ‘토건국가’ 등의 개념을 사용한 비판은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후보의 높은 지지율은 ‘747 공약’과 ‘한반도 대운하’로 상징되는 표층 프레임이 잘 먹혀들어서가 아니다. 이명박 후보가 경제에 관한 심층 프레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파상 공세는 피상 공세에 불과하다. ‘한반도 대운하’ 비판은 사실 더 이상 나올 게 없을 정도로 다 나왔다. 그 비판이 대세를 좌우할 정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이명박 후보를 이기고자 하는 후보의 승리 가능성은 매우 적다. 대선을 불과 두어 달 남겨둔 시점에서 뿌리 깊은 심층 프레임을 바꾸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머지 후보들이 이미 진 싸움이라며 지레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늦었지만 프레임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명박 후보와 맞서길 원하는 후보들이 프레임 전쟁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전쟁을 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 심층 프레임에 대한 준별은 고사하고, 표층 프레임조차 ‘한반도 대운하’ 비판만 빼면 이명박 후보와 크게 차별성을 지니지 못한다. 이명박 후보와 선을 그으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그것이 도리어 이명박 프레임을 강화해주고 있는 형국이다.

줄곧 하던 일 중의 하나가 이명박 후보의 의혹 혹은 말꼬투리를 잡아 도덕성 공격을 하는 것이었는데, 그건 오히려 부메랑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한나라당 경선 과정보다 더 혼탁해 보이는 현재의 범여권 경선 과정과 노무현 정부 관계자들의 비리 등이 겹쳐 읽히면서 대다수 국민들은 무능해 보이는 것은 물론 도덕성에 있어서도 전혀 우위에 있지 않은 범여권 세력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국현의 차별화된 프레임

범여권 장외 후보로 주목을 받고 있는 문국현 후보의 ‘사람중심 진짜경제’는 잘 만든 슬로건이다. 문국현 후보 또한 경제 프레임을 가장 먼저 내세우고 있는데, 그 경제 프레임이 이명박 후보의 프레임과 차별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화는 ‘진짜’와 ‘가짜’의 대비를 통한 표층 프레임의 작동을 통해 활성화되고 있다. 현재까지만 보면 문국현 후보는 일단 독자적인 프레임 설정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파괴력을 지닐 지는 다른 변수들과의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에 단언키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이명박 후보 외에 독자적인 프레임 설정에 성공한 후보라는 점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있다. 표층 프레임에서의 극명한 대비가 과연 심층 프레임의 차원에서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누구나 다 경제를 강조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대비되는 것으로 보이는 두 후보 사이에는 경제라는 공통의 지반이 있다.

이러한 지반이 아무튼 경제 심층 프레임을 강화시키고 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득이 될지 단언키 어렵다. 즉, 국민들이 이명박 후보의 경제 해결책으로 쏠릴 지, 문국현 후보의 경제 해결책으로 쏠릴 지 아직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치적 대안의 문제가 부상할 수 있다. 이명박 후보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할 것이다. 범여권 후보들도 마찬가지로 이 점을 부각시켜 문국현 후보를 견제하고 있다. 문국현 후보 진영이 14일 ‘창조한국당’(가칭) 창당발기인대회를 열고 창당 드라이브에 들어갔는데, 이 작업이 어떤 모양새로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이 신당이 선거철만 되면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내미는 여타 정당들과 어떤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민주노동당으로 표현되는 진보정치 프레임

또 다른 축이 존재한다. 바로 진보진영이다. 진보정치 프레임은 현재 문국현 프레임을 넘어설 수 있을까? 쉽지 않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는 ‘코리아연방공화국’과 ‘100만 민중대회’를 핵심으로 내세우고 있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을 통해 통일된 나라의 미래상을 제시하려 한다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고려연방제’를 떠올리며 퇴행적인 이미지를 연상하게 된다.

‘100만 민중대회’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것은 매년 11월 연례행사처럼 하던 일이다. 이에 대한 비판이 나오면, “낡은 방식이 세상을 바꾸는 가장 믿을 만한 방식이다”는 항변이 돌아오지만, 그건 주장자들의 희망일 뿐이고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게 인식하지 않는다. 알 만한 사람들은 운동권 다수파(혹은 자주파)의 ‘전민항쟁’ 노선이 여전히 고수되고 있다고 본다.

물론 대중들의 저항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하고, 이러한 힘을 정치적으로 선도하는 것은 진보정치 세력의 기본적인 임무다. 문제는 그것이 미리 짜인 일정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촉발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대중의 자발성과 역동성은 소수의 지도부가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달력에서 점을 찍어 그 날 발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대중들의 머릿속에는 진보개혁 세력의 무능한 이미지와 함께 진보정치 세력 또한 경제에 있어서 마찬가지로 무능하다는 인식이 있다.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다. 이미 그런 부정적 프레임에 빠져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민주노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반대만 일삼는 무책임한 세력이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주고 있다.

권영길 후보 또한 ‘사람 경제’, ‘노동 중심 경제’를 말했지만, 앞서 말한 이유들 탓에 이러한 프레임이 전혀 활성화되지도, 주목받지도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제 정책공약들은 급조되어 ‘표층’에서만 따로 놀고 있다. 그리고 문국현 후보에 대한 어설픈 차별화와 비판은 당사자로부터 “그러니깐 민노당이 공부를 더 해야 한다.”(11일 문국현 후보 기자간담회 발언 중)는 비아냥까지 받았다.

<사회적 공화주의> 출판기념 토론회  지난 9월 6일에 개최되었던 금민 한국사회당 대표의 저서 <사회적 공화주의> 출판기념 토론회 모습
<사회적 공화주의> 출판기념 토론회 지난 9월 6일에 개최되었던 금민 한국사회당 대표의 저서 <사회적 공화주의> 출판기념 토론회 모습 ⓒ 한국사회당

미래를 위한 진보정치 프레임 혁신

앞서 진보정치 프레임이라고 뭉뚱그리면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언급한 것은 민주노동당이 아직까지는 진보정치의 대표선수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그 진보정치 프레임이 위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된 프레임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 바로 진보정치 프레임의 혁신과 재구축이 필요하다.

새로운 진보정치 프레임은 문국현 프레임과 동반 상승하는 길을 찾으면서 문국현 프레임의 공백을 발전적으로 보완해야 한다. 경제 대안과 정치 대안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미래 담론과 미래 대안을 구축하고, 기존의 각종 성역들을 혁파해 정치적 신뢰를 재구축하며 새로운 진보정치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지난 경선과정에서 그러한 단초들을 발견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 이를 발전시킬 프로그램도,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상정, 노회찬 의원은 권영길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을 수락하면서 대선 승리를 위해 열심히 뛰겠다고 약속했지만, 결선투표에서 과반에 가까운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변화의 콘텐츠와 열망을 담아낼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어떻게 제시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한편 진보정치의 다른 한 축을 담당해 온 한국사회당은 공화주의의 진보적 전유를 통해 참정권과 사회권을 통일적으로 파악하고, 실질적인 국민주권이 보장되는 ‘사회적 공화국’을 수립하자는 낯선 정치 프레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경제 프레임으로는 ‘사람 중심 탈배제 경제, 생태 중심 가치 경제, 한반도 평화 경제’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당은 이러한 프레임을 지속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인프라가 부족하다. 구체적인 내용도 많이 부족하다.

2007년에서 진보정치의 새 판짜기는 절실하다. 각각의 장점들을 결합시켜 진보정치 프레임을 혁신할 수 있다면, 진보정치가 이번 대선에서 결정적 승리를 획득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진보정치 혁신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해내지 못하면 진보정치는 진보정치라는 간판을 스스로 떼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지적은 진보를 고민하는 한국 사회의 모든 정치세력이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어설픈 타협을 시도하는 것은 진보적 가치가 그릇되었음을 자인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레이코프의 말을 따르자면 한국의 진보진영이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과제 역시 자신들의 신념을 진정성 있게 설파할 수 있는 개념적 프레임을 찾아내는 것이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프레임 전쟁> 244~245쪽.)

덧붙이는 글 | 최광은 기자는 한국사회당 대변인으로, 현재 금민 한국사회당 대통령 후보 선거운동본부 대변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데일리서프라이즈에도 송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명박#문국현#권영길#금민#한국사회당#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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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비교정치, 한국정치 등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복지국가연구센터에 적을 두고 있다. 에식스 대학(University of Essex, UK)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박종철출판사, 2011) 저자이고,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 평생회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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