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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홍성군 광천읍 폐광 갱도 아래에 희생자의 유해로 추정되는 물체가 드러나 있다.( 붉은 원안)  이밖에도 여러 점의 추정 유해와 철사줄이 눈에 띠었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 폐광 갱도 아래에 희생자의 유해로 추정되는 물체가 드러나 있다.( 붉은 원안) 이밖에도 여러 점의 추정 유해와 철사줄이 눈에 띠었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폐금광 갱도입구. 이곳에 약 30-50 여명의 희생자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폐금광 갱도입구. 이곳에 약 30-50 여명의 희생자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1950년 한국전쟁 당시 '9·28 서울 수복' 직전 또는 직후에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해 집단학살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유해가 발견됐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중담마을 야산 기슭. 지난 10월 초 벼베기가 한창인 논과 밤나무 숲을 지나자 폐금광 갱도로 보이는 작은 입구가 드러났다.

수직 갱도는 흙으로 메워져 약 1.5m 정도에 불과했다. 구덩이 속으로 불빛을 비추자 사람의 뼈로 보이는 여러 점의 물체가 반사됐다. 희생자들의 손목을 묶을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철사줄도 눈에 띄었다.

동행한 홍성에 사는 이종민씨(홍성신문 상무)는 "몇 달 전에도 이곳에 들러 확인한 바 있다"며 "유골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증언에 따른다면 사건은 '9·28 서울 수복' 직전 또는 직후의 일로 추정된다.  충남 홍성 및 광천읍 일원을 장악하고 있던 북한군이 퇴각하자 경찰과 우익단체가 북한군에 동조하거나 부역한 사람들을 색출해 이곳에서 보복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주민들은 폐광 수직갱도 속에 약 30-50명 가량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 마을에 사는 이 모씨(81)는 "경찰이 6·25가 터지던 그해 가을 한밤중에 트럭에 사람들을 싣고 와 마을 앞 길바닥에서 총살했다"고 밝혔다. 이어 "총살이 끝나자 시체를 들것을 이용해 100여m 떨어진 폐광 구덩이에 버렸다"며 "당시 마을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동네 청년들이 시체를 옮기는 일에 동원됐다"고 말했다.

 폐금광 갱도가 있는 광천읍 담산리 앞산 기슭(붉은 원). 오른쪽 끝 건물이 축사다.
폐금광 갱도가 있는 광천읍 담산리 앞산 기슭(붉은 원). 오른쪽 끝 건물이 축사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이씨는 이 때를 "인민군이 죄 도망가고 난 얼마 후"로 기억했다. 같은 마을의 정모씨(78)도 "벼가 누렇게 익었을 때"라고 말했다. 그는 "마을 어른들에게 들은 바로는 총살은 경찰과 우익단체가 했고 끌려온 사람들은 두 손이 철사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고 덧붙였다.

주민들은 희생자들에 대해 "인근 광천을 비롯 충남 인근에서 인민군에 동조해 좌익활동을 하던 사람들로 알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31명에서 50여명까지 다양했다.

당시 홍성군 광천읍에 살던 유가족 장석현(60)씨는 "내가 태어나자 마자 이곳에서 아버지와 사촌형님이 끌려가 희생됐다"고 밝혔다.

이어  "아버지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며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형평사(衡平社, '평등'을 외치며 사회혁신운동을 벌인 단체) 활동을 한 것으로 미뤄 할아버지와 관련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씨는 "지난 해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해 놓은 상태"라며 "아버지의 유해가 하루빨리 수습되길 바랄 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현장조사를 통해 유해매장 여부 확인을 거쳐 발굴작업에 나설 계획이다.


#홍성군 담산리#9.28 서울 수복#진실화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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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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