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아우.” 감자를 잔뜩 먹은 후 뒷간에서 볼일을 본 강시우는 바로 눈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김학령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똥 누는 곳까지 따라와서 벌벌 떨 것까지는 없잖나?” “형님은 모르실거요. 정말 귀신이 그렇게 시켰대도.” 자꾸만 귀신타령을 하는 김학령으로 인해 강시우의 마음도 편하지가 않았다. 어쩐지 변소 아래에서 시커먼 손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에 강시우는 서둘러 볼일을 마치고 뛰어나왔다. “거 자꾸 그러는 바람에 일도 제대로 볼 수 없네! 아 그놈의 귀신이 그렇게 말했다고 정말 우길 거야? 그게 사실이라도 왜놈 목을 베어오라니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이네 그래.” “형님은 해가 뜨면 가시우. 난 귀신에게 시달리느니 왜놈하나 잡고 말테요.” “어이구… 다리도 제대로 못써서 왜놈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못 잡을 판에? 아서라 아서!” 새벽녘에야 잠이 든 김학령과 강시우는 늦은 아침에 일어나 찐 감자로 배를 채웠다. 김학령은 보자기에 찐 감자 몇 개를 담아들었다. “아 진짜 가는거야?” “왔던 길을 되짚어 가면 우금치에서 버려진 칼이라도 주울 수 있을 것이고 지나간 왜놈들의 뒤도 잡을 수 있을 것 아니오. 형님, 고마웠수. 내 목숨이 붙어있으면 다시 만납시다.”
김학령이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가자 강시우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서 있다가 김학령을 쫓아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봐 아우! 나도 같이 갑세!” 김학령은 머리를 긁적이며 강시우에게 손을 내저었다. “형님! 형님은 이 일에 낄 거 없수! 하나 있는 목숨을 버릴만한 일은 아니지 않수?" “이봐,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우금치고개를 넘으려 죽어간 동지들은 뭘 위해 목숨을 버렸나? 자네의 귀신 얘기가 아니더라도 나 역시 그 한이 평생 기억 속에 남을 판이네. 왜놈의 목을 베어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하는 것도 산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나?” “에휴 형님. 나중에 귀신이 되어 나 때문에 죽었다고 원망은 마시오.” “야 이놈아 네가 죽어서 귀신 되어 나타날까 무서워 따라가는 거다!” 어제만 해도 비참한 전쟁터에서 겨우 목숨을 구해 빠져나가고 귀신소동으로 밤잠까지 설쳤던 그들이지만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길은 가볍기 짝이 없었다. 강시우는 때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이거 누가 보면 봄날 꽃놀이 가는 사람인줄 알겠소.” 전날 밤에만 해도 부축을 받아야 걸어야 했던 김학령은 언제 다쳤냐는 듯 오히려 강시우보다 빠른 걸음으로 신명나게 걷고 있었다. “아니 다리는 괜찮은거야? 딴 것도 아니고 총에 맞은 건데….” “글쎄, 귀신 짓인지 조금도 아프지 않수.” 김학령은 총에 맞은 곳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뛰기까지 해보였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가던 그들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진 건 어제의 참혹한 전장이 수습되지 않은 우금치에 다다랐을 때였다. 처참하게 널브러진 시체들은 아무도 거두지 않은 채 어제의 모습 그대로 누워 있었다. 김학령은 그 앞에 엎드려 절을 두 번 올렸고 강시우도 얼떨결에 그를 따라 절을 올렸다. “내 그대들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지 못해 미안하오. 대신 그대들의 원혼을 달래주려 가는 길이오. 귀신의 요청에 의한 일이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할 짐이 무서웠소. 부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되도록 앞길을 열어주소서.” 김학령의 기원에 대답이라도 하는 어디선가 바람 한줄기가 세차게 휘몰아쳤다가 사라져 갔다. “자, 무기를 찾아보자.” 시체들 사이에 있는 부러진 죽창과 칼, 화승총들 사이에서 김학령은 눈을 부릅뜬 채 날이 선 칼을 쥐고 죽어 있는 시체에 눈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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