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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흘러가는 구름에 이색적이게 물음표가 그려졌다. 사진은 경복궁 민속 박물관입니다.
구름흘러가는 구름에 이색적이게 물음표가 그려졌다. 사진은 경복궁 민속 박물관입니다. ⓒ 이정근

충녕대군을 세자로 낙점한 태종은 대명(對明) 문제에 신속하게 대처했다. 동지총제(同知摠制) 원민생으로 하여금 표문(表文)을 가지고 연경으로 떠나게 했다. 조선왕의 등극과 세자책봉은 명나라의 고명을 받아야 한다. 명나라에서 거부하면 일이 꼬이게 된다.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려면 많은 시간과 정열을 허비하게 된다. 정치력도 실추한다.

태종이 원민생을 택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신으로 명나라를 드나들던 원민생이 밀무역으로 말썽을 부려 의금부에 투옥된 일도 있었지만 태감(太監) 황엄과 돈독한 사이였다. 황엄은 비록 명나라 조정의 내사(內史)였지만 조선에는 총독처럼 군림했다. 처녀주문사(處女奏聞使)로 조선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조선의 대명 창구였다. 태종이 원민생의 인맥을 활용하여 명나라 문제를 넘으려는 것이다.

여자를 좋아하는 황엄을 구워 삶아라

“신(臣)의 장자 제(禔)를 영락 3년에 주준(奏准)을 받아 세자로 삼았는데 나이가 장성하였는데도 행동하는 바가 후사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부득이 외방에 내보내어 안치하였습니다. 제2자 보(補)는 자질이 유약하여 중임을 맡기기가 어렵고 제3자 휘(諱)는 성질이 총명하고 지혜롭고 학문을 좋아하여 한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촉망하니 후사로 세우기를 청합니다. 신이 감히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이 때문에 삼가 주문(奏聞)합니다.”

명나라에는 황제가 있고 조선 왕은 신하다. 명나라와 조선 관계가 그렇다. 슬픈 일이지만 현실이다. 하지만 사후 추인을 받으면서 사전 고명을 요청하고 있다. 원민생을 믿기도 했지만 명나라에 대한 자신감이다. 원민생을 명나라에 파견한 태종은 상호군(上護軍) 문귀와 내관 최한을 전지관(傳旨官)으로 한양에 보내어 양녕에게 폐위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임금의 특명을 받은 문귀와 촤한이 세자전에 도착했다. 개성의 소식을 접한 세자전은 술렁거렸다. 한양에 머물고 있던 대소신료들이 세자전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서연을 간청하던 서연관들과 대간들이 세자전 앞뜰에 부복했다. 양녕도 무릎을 꿇었다.

“저부(儲副)를 어진 사람으로 세우는 것은 고금의 대의(大義)요, 죄가 있으면 마땅히 폐하는 것은 오로지 국가의 항구한 법식이다. 일에는 하나의 대개(大槪)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사리에 합당하도록 기대할 뿐이다. 나는 일찍이 적장자 제(禔)를 세자로 삼았는데 나이가 성년에 이르도록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성색(聲色)에 빠졌다.

나는 그가 어리기 때문이라 하여 장성하면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사람이 되기를 바랐으나 나이가 20이 넘었는데도 군소배(群小輩)와 사통하여 불의한 짓을 자행하였다. 지난해 봄에는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자가 몇 사람이었나? 제(禔)가 이에 그 허물을 모조리 적어 종묘에 고하고 나에게 상서하여 스스로 뉘우치는듯하였으나 얼마 가지 아니하여 간신 김한로의 음모에 빠져 다시 전철을 밟았다.

내가 부자의 은의(恩誼)로써 다만 김한로만을 내쳤으나 제는 이에 뉘우치는 마음이 있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노여운 마음을 품어 분연(憤然)히 상서하였는데 그 사연이 심히 패만(悖慢)하여 전혀 신자(臣子)의 뜻이 없었다.

정부·훈신·육조·대간·문무백관이 합사(合辭)하고 소장(疏狀)에 서명하여 말하기를 ‘세자의 행동이 종사를 이어받아 제사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종사만세의 대계(大計)를 생각하여 세자를 폐하여 외방으로 내치도록 허락하고 종실에서 어진 자를 골라 즉시 저이(儲貳)를 세워 인심을 정하소서’ 하였다.

또한 ‘충녕대군은 영명공검(英明恭儉)하고 효우온인(孝友溫仁)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하지 않으니 진실로 저부(儲副)의 여망에 부합합니다’ 하였다. 내가 부득이 제(禔)를 외방으로 내치고 충녕대군을 세워 왕세자로 삼는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화(禍)와 복은 자기가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니,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애증의 사심이 있었겠느냐? 중외의 대소 신료들은 나의 지극한 생각을 본받으라.” - <태종실록>

난 기필코 살아남아 그날을 기다리겠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세자전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만 들릴 뿐 미동하는 이 없었다. 부복한 신하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지만 뜨락엔 냉기가 흘렀고 부는 바람은 싸늘했다. 세자를 가르치던 서연관들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자신들에게 떨어질 책임추궁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최한이 대독한 부왕의 유시(諭示)를 듣는 동안 양녕은 담담했다. 억울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평온했다. ‘올 것이 왔다’라기보다도 ‘기다리던 것이 왔다’라는 생각이었다. 오히려 늦었다는 느낌이었다. 보는 이 없다면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었다. 하지만 초상집 분위기의 세자전에서 속내를 드러낼 수도 없었다. 양녕은 즉각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내관 최한의 유시가 끝나자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머릿속을 무겁게 짓누르던 어둠이 걷히고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희망의 빛이었다. 이때, 세자전 숲 속에서 사랑을 나누던 까치 한 쌍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푸른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도 날고 싶다. 너희들은 백악산과 삼각산을 마음대로 훨훨 날아다닐 수 있지만 나는 아직 날지 못한다. 하지만 야밤에 담장을 뛰어넘어야 했던 대궐을 백주 대낮에 내 발로 걸어 나갈 수 있다. 나는 이날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14년을 기다렸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하지 않더냐? 얼마를 더 기다려야 너희들처럼 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 기필코 살아남아 그날을 기다리겠다.’

그랬다. 양녕은 6년 후 부왕 태종이 훙(薨)하면서 서서히 날기 시작하여 왕위에 오른 아우 세종을 먼저 보내고 문종, 단종을 뛰어넘어 1462년 그러니까 세조 8년에 향년 68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스스로의 다짐을 지킨 것이다.

또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앞서가는 구름에 어리의 얼굴이 보였다. 보고 싶은 마음에 자세히 바라보니 금세 지워졌다. 뒤에 가는 구름에는 자신 때문에 죽은 구종수와 이오방, 그리고 진표와 이귀수의 얼굴이 만들어졌다 흩어졌다.

‘너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내가 너희들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상황이 너희들을 필요로 했다. 내가 미욱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숨 막힐 것 같은 대궐을 벗어나려면 도리가 없었다. 사람 죽이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내가 살인을 하겠느냐? 도둑질을 하겠느냐? 세자의 몸으로 저잣거리에 나가 시정잡배들과 싸움질을 하겠느냐?

내가 좋아하고 즐기면서 부왕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엽색행각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성색에 빠졌다고 조롱하고 이기적이라고 비웃어도 그것이 가장 실속 있고 신속하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다. 너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이 왔다고 생각한다. 고맙다. 편히 잠들어라.’

양녕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세자를 폐위당한 것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죽어 간 사람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진심으로 미안했다. 이러한 양녕을 지켜보던 주위의 신하들은 양녕이 부왕의 세자 축출에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착각했다.


#태종 #이방원 #양녕#폐위#이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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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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