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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들이 우산을 받고 걸어가고 있다. 사랑이 그들 생애의 우산이 되어 줄까.
 소녀들이 우산을 받고 걸어가고 있다. 사랑이 그들 생애의 우산이 되어 줄까.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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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머리는 스스로 깎지 못한 엉터리 카운셀러 

관념으로 가득 차서 설명을 읽고 나면 오히려 의미가 더 모호해지는 그런 철학사전 말고 읽는 순간  "맞아, 바로 그거야! "라고 무릎을 탁 치면서 읽을 수 있는 사전은 영영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죽기 전에 철학사전 같은 걸 하나 만들고 싶다. 내가 만일 사전을 편찬한다면 '사랑'이란 항목에다 이렇게 써 넣으리라.

인류의 가장 오래된 형이상학이었다가 최근에는 점차 형이하학에 자리를 내주고 있음. 그 형이하학의 현실적 이름은 sex로 통칭하고 있음. 사람에 따라 뜻이 달리 변이되는 기이한 울림을 갖고 있음. 예를 든다면, 이 단어를 극우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발음하게 되면 동물성의 의미 구조를 띠는 경향이 있으나  진보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발음하면 식물성 의미로 변환되기도 함.

이것이 내가 바라보는 오늘의 '사랑의 풍경'이다.  젊었을 때의 난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사랑의 '현장성'을 몸소 체험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고찰한 유일무이한 방법은 책에서 읽은 관념과 사변뿐이었다. 자화자찬 같지만, 당시 사랑에 관한 나의 관념적 지식은 능히 한 시대를 풍미하고도 남을 만큼 일가견을 이루고 있었다.

속 모르는 내 주변의 중생들은 사랑에 대한 내 현장지식도 그만큼 구구절절할 것으로 지레짐작했던 것인가. 수시로 자신들의 '사랑놀음'에 카운셀러 노릇을 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하곤 했다. 그때마다 난 대하장강같은 변설로 그들의 아픈 마음을 녹여주곤 했다. 사랑의 기원부터 사랑이 어떻게 형이하학으로 변해 사는지까지 설명해 주었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충고까지 하다니! 이건 마치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유부녀에게 부부 잠자리에 관해 '과외 지도'를 하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고나 할까.

스물다섯이 넘어서 간 군생활에서도 사랑의 카운셀러 역할은 계속됐다. 이번엔 그냥 카운셀러 역할에 그친 게 아니었다. 고참들의 펜팔 친구에 대한 상담은 물론이거니와 연애편지까지 대신 써주게 된 것이다. 편지는 내가 써주고 면회는 다른 사람이 하게 되는 개 같은 경우가 무릇 기하였던가. 고백하거니와 난 그 대가로 3년 동안 군용 담배 대신 거북선, 한라산, 은하수 같은 민간 담배를 뇌물로 받은 것 외엔 단 한 명의 여자도 내 앞으로 등기한 바 없다.  

하여간 타인들의 연애 프로젝트에 무료 자문을 계속하다 보니 난 점점 사랑이란 것의 성분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게 되고, 그 결과 사랑의 순수성에마저 의문부호를 찍기에 이르렀다. 사랑이란 결국 여자의 이기심과 남자의 이기심이 화려한 포장지에 싸여 한데 묶여있는 상태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랑이란 알고 보면 별거 아니다. 여자라는, 꼬리 아흔아홉 달린 여우가 남자라는, 이빨이 굴착기 삽같이 생긴 늑대를 만나서 이 동물의 '잔혹성'이 실제로 얼마나 발휘될 것인지를 긴장감에 쌓여서 관찰하다가 '음, 이 늑대는 비교적 선량하군!'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사랑이다. 여자가 품었던 긴장감이 해소됐을 때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 사랑이란 감정이다. 

여기까지 설(說)을 풀어놓으니, 벌써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뭔 설레발이 그리도 길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속도를 즐기는 그대는 몹시 불만이겠지만 난 어디까지나 내 식대로 살 뿐이다. 천천히, 시나브로.

어느 뽕짝 가수가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만, 사랑은 정말이지 아무에게나 시식이 허락된 레시피가 아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약간 맛이 간 사람의 사랑 이야기다. 이 사랑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술과 관련된 나의 일화를 단 몇십 바이트만 털어 놓기로 하자.

젊었을 적엔, 이상하게도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의기 상통하여 그의 집까지 함께 가서 잠까지 자고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지금은 자리를 안국동 쪽으로 옮긴 인사동 '시인학교'라는 카페에서도 그랬다. 전주나 군산의 선술집을 순례하며 살 적에도 마찬가지였고.

내 뇌리에 각인된 엽기적인 사랑 이야기

내가 오늘 꺼내려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곽부성(가명)을 만난 것도 바로 선술집에서였다. 홀로 앉아 진로 속에 정말 두꺼비가 들었는지를 몸소 탐험하고 있을 때였다. 일행과 함께 곽부성이 들어섰다. 일행 중엔 안면을 튼 사람도 두세 명 정도 끼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합석하게 되고, 곽부성과도 수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는 누구에게 들었는지 그때까지 일면식도 없던 나에 대한 정보도 몇백 바이트는 족히 저장해두고 있던 터였다.

술자리 노가리야 광대무변한 것. 우리 얘기는 마침내 문학에까지 장르를 확장하게 되었다. 그는 문학에 대해 아주 조예가 깊었다.  그가 가슴에 품은 도도한 허무가 얘기를 통해 내게로 해일처럼 굽이쳐 왔다. 그는 버리고 버렸으나 아직 술과 담배만은 버리지 못한, 아직은 승천하여 구름이 되지 못한 채 지상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도도한 허무주의자였다.

이후로 그는 틈만 나면 나를 찾아왔다.  우린 술집에서 마시다가 그의 집에 가서 마시다가 바닷가에 앉아서 마시다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011파 주당들이었다. 그는 애상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그의 시편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육사 2기로 '반혁명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투옥되었다가 출감한 뒤 알콜 중독자가 되어버린 그의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서로 깊이 알아가게 되자, 그의 애인이라는 아가씨도 알게 되었다. 아가씨는 종종 우리가 벌이는 연회 장소에 찾아와서 알코올의 순정한 맛을 즐겼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은 곽부성은 이 애인이라는 아가씨를 전혀 상대해 주지 않는 것이다. 아가씨는 만만한 나를 수시로 불러내어 그들이 얼마나 오래 열렬히 사랑했는지를 하소연하며 곽부성의 마음을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리 고집 센 곽부성이라도 내 말이면 들을 거라면서.

어느덧 둘만의 은밀한 문제여야 합당할 그들의 사랑 문제가 '내 현안'으로 둔갑해버렸다. 곽부성은 결론을 이미 내려놓은 눈치였다. 앞날에 희망이 없는 자기를 떠나는 것이 여자의 앞날에 서광이 있을 것이라는. 그러나 여자는 달랐다. 여자의 순정은 어느새 치정으로 변해 있었므로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둘의 관계가 그렇게 '빙글빙글' 돌았으므로 여자는 마땅히 곽부성에게 해야 말을 내게 쏟아놓곤 했다.

난 차츰 지치고 괴로웠다. 둘 사이의 '현안'이 음주라는 매우 곤혹스러운 형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나친 음주는 때로 내 몸의 극한을 시험하는 듯하기까지 했다. 여자는 주량도 두주불사였다. 내가 이미 몇 가지 현안들로 하여 적당히 얼큰해 있을 때쯤이면 여자는 나를 호출하곤 했다.

딸이 과년하거든 반드시 술값을 준비할 것

시간이 흘러가자, 곽부성에 대한 여자의 사랑도 점점 레테의 강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이젠 여자가 만나러 오는 사람이 곽부성이 아니라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새벽 6시나 됐을까?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겨울날에 6시란 좀 과장하면 한밤중이나 마찬가지다. 얼마나 급한 일이 생긴 것일까? 새벽인데도 여자는 내게 술집으로 가자고 한다. 해장술집에 앉아 막걸리 한 잔을 꿀꺽 마시고 나서야 여자는 비로소 이야기를 꺼냈다.

새벽 4시경에 곽부성이 자기 집으로 불쑥 찾아와 벨을 눌렀단다. 무슨 일인가 싶어 놀라 뛰어나간 여자의 어머니에게 곽부성이 말했다.

"돈 내놓으시오! "

이 무슨 전봇대로 이빨 쑤시는 소리냐. 여자의 어머니는 전에 곽부성을 몇 번 만난 적이 있긴 했다. 만나서 자기 딸과 헤어질 것을 요구한 바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꼭두새벽에 찾아와 뜬금없이 돈부터 내놓으라니!

곽부성의 말이 이어졌다.

"돈 내놔요. 지난 7년 동안 당신 딸 사귀느라 마음 아파서 마셨던 내 술값 내놔요."

여자의 어머니는 가지고 있던 돈 8,000원을 건네주고 나서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그리고 자기는 그런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이라 했다. 여자는 극도로 흥분해 선술집 천장이라도 뚫을 듯이 길길이 뛰었다. 사태는 뻔한 것이었다. 곽부성은 여자에게 남은 자신에 대한 미련을 그런 식으로라도 정리하고 싶은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세상 모든 여자의 어머니들은 자기 딸이 사귀다 헤어지는 남자의 술값을 물어내야 한다. 공연히 딸을 낳아서 남자들이 초조와 불안, 그리움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게 하고 사랑 때문에 괴로워서 술을 마시게 하고…. 아아, 이 원죄를 어찌할 것인가.

이 세상 여자들의 어머니여. 젊은 시절, 십수 년 동안 담당해온 사랑의 카운셀러 경험으로써 세상의 딸 가진 어머니들에게 충고한다. 자신의 딸이 과년하거든 반드시 술값을 준비할 것. 술값을 준비 못 할 처지거든 나중에 헤어질 때 술값을 청구하지 않을 것임을 딸의 남자친구에게 문서로라도 확인해줄 일이다.

이후로도 곽부성의 광란은 이어진다. 나중에 곽부성은 자신의 다섯 손가락을 하나하나 도끼로 자르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감수성을 지닌, 시인의 자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광기란 자신의 재능을 분출할 출구를 잃었을 때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둘의 관계는 '내 현안'으로 남아 심심하면 날 괴롭히곤 했다.

깊어질수록 진물 흐르기 쉬운 것이 사랑이니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월간문학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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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덧나기 쉬운' 사랑이 너무나 많다. 서로 난도질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랑이 너무나 많다. 김학산 시인의 시 '덧나기 쉬운 사랑'은 상처난 사랑을 아프게 노래한다.

푸르른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목숨 같은 사랑을 하지요 그러나
사랑은 덧나기 쉬운 상처와 같아서
깊어질수록 진물 흐르기 쉬우니
당신을 사랑한다고 쉽게 말할 수 없네
물안개 가득한 강가 버드나무는
저리 생애를 흔들리는 죄의 부피런가
붉은 장미 그 자태 아름다워 스스로
칼끝에 노을 달고 저리 불을 뿜으나
굳은살로 돋아난 그대 목숨 같은 사랑은
그 빛 그리 밝음도 하마 조심스러워
마음 밝지만은 않으니
눈먼 새 모양 푸르른 창공을
그대 주신 사랑의 줄을 잡고
황홀한 아주 황홀한 길을
승繩승繩이 그저 걸어갈 뿐이네


-김학산 시 '덧나기 쉬운 사랑' 전부  

김학산 시인은 현재 의왕 내손초등학교 교장으로 계시는 분이다.  시집 <백목련>, <시간의 얼굴>과  동화집 <컴퓨터 박사 산 속에 빠지다>, <1~6학년이 읽는 동화> 등을 상자했다. 시 '덧나기 쉬운 사랑' 은 올 4월에 나온 <둥근 사각형 그리기>(월간문학)라는 시집 속에 실려 있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잠들기 전에는 나는 못 잊겠네…. 육자배기 한 자락이 가슴 깊은 곳으로 스르르 안겨드는 가을밤이다. 김학산 시인의 시도 마치 육자배기 한 자락 같다. "물안개 가득한 강가 버드나무는/저리 생애를 흔들리는 죄의 부피련가"라는 구절이 내 마음을 출렁이게 한다.

곽부성은 지금 무얼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직까지 이 세상에 살아 있기나 한 것일까.인류의 영원한 '현안' 사랑, 원수녀러 사랑, 죽음 너머에까지 부둥켜안고 갈 그런 사랑.


#김학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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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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